마태복음 강해 67:당신은 착하고 충성된 사람입니까?(마 25:14-30)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7-11-19 00:00
조회
917
마태복음 강해 67당신은 착하고 충성된 사람입니까?(마 25:14-30)2017. 11. 19. 프롤로그

-유대인의 지혜를 담은 책 <탈무드>에 이런 글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사람이며, 가장 사랑받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칭찬하는 사람이요, 가장 강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인품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내용이다.
능력 중요하다.
실력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인품이다.

-인품(人品)을 한자사전에서는 ‘사람의 품격’으로 풀이했다.
국어사전에서는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지는 품격과 됨됨이’로 풀이했다.

-사람의 격은 능력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실력으로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인성이 좋아야 한다.
물론 능력이 있어야 한다.
당연히 실력이 뛰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사람의 격이 올라갈 수 없다.
결정적인 것은 인품이다.

-영국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성실한 마음은 하늘에 이르는 길이다.”
인품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속담이다.
성실한 마음 곧 인품을 하늘에 이르는 길이라고 했는데, 하늘 대신 다른 말을 대입해도 뜻이 충분히 통할 것 같다.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를 다들 알 것이다.
그는 나이 13살 때 가족과 함께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하여, 훗날 미국의 철강 재벌이 되었다.

-그가 은퇴하기 전에 후계자를 발표하였다.
막대한 부와 명예를 가질 수 있는 그 후계자 자리에, 과연 어떤 사람이 앉게 될 것인가를 두고,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그런데 그가 자기 후계자로 삼은 사람이 찰스 스웹으로, 모두의 예상을 빗나간 의외의 인물이었다.

-찰스 스웹(Charles Sweb)은 중학교도 나오지 못했고, 처음에 회사에 정식 직원도 아닌 청소부로 입사한 사람이었기에 모두가 놀랐다.
그가 카네기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는, 어떤 사람도 예상하지 못했고, 심지어 스웹 자신도 그랬다.

-어느 날 카네기가 새로운 공장 확장과 생산과정에 대한 검토를 하느라고, 밤 늦게까지 퇴근하지 않고 있었다.
새벽이 돼서야 일을 마치고 나오다가, 퇴근을 하지 않고 있는 스웹을 보게 됐다.

-카네기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스웹, 아니 왜 아직까지 퇴근하지 않았는가?”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장님께서 저를 언제 부르실지 모르는데, 어떻게 자리를 비울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감과 이같은 성실함이, 결국 직계 아들을 제치고 카네기의 후계자가 됐다.

-카네기는 스웹을 후계자로 지명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스웹 씨는 내가 유일하게 이름을 알고 있는 청소부였네.
정원을 청소하라고 하면, 항상 그 주변까지 즐겁게 자발적으로 청소를 하곤 했지. 내 비서 일을 할 때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공부하며 기록하더군. 업무 시간이 끝나도, 내가 퇴근을 하기 전에는 항상 자리를 지켰네. 이런 사람에게 회사를 물려주지 않으면, 어떤 사람에게 물려주겠나? 좋은 대학을 나오고 유능한 사람은 매년 수만 명씩 나타나지만, 이런 성실성과 책임감을 가진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법이지."

-<인간관계론>의 저자답게, 카네기는 사람보는 눈이 탁월했다.
그래서 자기가 피땀 흘려 일군 기업을 믿고 물려줄 수 있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속담과 관련하여, 블러그 명이 <법환>이란 사람의 글을 소개하겠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예전에 내가 가장 싫어하는 속담 중 하나였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생각했고, 사람들이 날 그렇게 보는 것이 싫었으며, 내가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했었다.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 생겨버리면, 이후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이 그 선입견을 통해서만 본다고 생각했었다.
사람은 누구나 무궁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 어떻게 그 가능성이 폭발할지도 모른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속담이 사람의 가능성을 무참히 짓밟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체득하고 깨달은 것은,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우리가 믿는 것보다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으며, 성인이 되어버린 후에는 특정화된 패턴들을 쉽사리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개미는 무더운 여름내내 열심히 일을 하는데, 베짱이는 어영부영 놀았다.
베짱이는 나무 그늘에서, 노래나 부르고, 기타나 치다가, 겨울이 와서 먹을 것이 떨어지자, 개미네 집을 찾아 가서 구걸을 했다.

-베짱이가 문을 두드리니, 개미가 안에서 소리쳤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모은 곡식을 왜 너하고 나눠 먹어야 되냐? 자기 밥벌이는 자기가 하는 법, 어서 꺼져!”

-베짱이는 집에 돌아와서 그 슬픔을 노래로 불렀는데, 마침 지나가던 음반 기획자가, 그 노래에 반해서 음반을 내게 되었다.
베짱이는 노래만 부르다가, 너무 노래를 잘하게 돼 가수가 된 것이다.
그 음반은 대박을 쳐서 베짱이는 일약 돈방석에 앉게 되었다.

-그런데 개미는 죽자살자 일만 하다가, 허리 디스크에 걸려, 그만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동안 벌어 놓은 재산은, 병원비에 다 들어가고, 거의 빈털털이가 되었다.
개미와 베짱이의 처지가 역전이 되고 말았다.

-그 후 개미는 치료도 열심히 받고, 나름대로 건강관리에 심혈을 기울여, 몸이 다 나았다.
그리고 전보다 더 성실하게 살아서, 다시 부자가 되었다.

-베짱이는 음반 수입으로 얻은 그 많은 돈으로 흥청망청 살았다.
술과 마약, 거기다 도박에까지 손을 댔다가, 몸은 몸대로 망가지고, 빚은 빚대로 지고, 다시 구걸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

-오늘 말씀은 일명 달란트 비유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세 개의 비유를 들었다.
달란트 비유는 열처녀의 비유에 이어진 두 번째 비유이다.
주제 역시 열처녀의 비유와 다음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종말에 대해서다.
예수님은 같은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세 가지 비유를 들어 같은 주제를 입체적으로 설명하셨다.
듣는 사람들에게 종말에 대해 이보다 잘 가르칠 수 있을까 싶다.
논리적인 설명도 좋지만, 이야기가 귀에 잘 들어오고 기억에도 오래 남는다.

-우리가 전도할 때, 예수님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면 힘들다.
내 이야기를 해야 한다.
예수님 때문에 변화된 내 이야기를 하고, 예수 믿고 구원받아 변화된 내 삶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제 예수님의 두 번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지어내었다고 보기 어렵다.
당시에 상업을 하던 부호들이 있었다.
그들이 무역을 위해 먼 나라로 가서 오랫 동안 집을 비우곤 했다.
그들이 동네에서 구멍가게를 했더라면, 부호가 되지 못했을 게다.
그들은 일찍이 무역에 눈을 떴고, 그래서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부자가 아무런 조치도 없이 타국으로 훌쩍 떠날 수 없는 법이다.

-먼저 자기 종들을 불렀다.
그래서 자기의 소유를 맡겨주었다.

-이 부분은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시기 전, 제자들을 불러놓고 복음을 위탁한 것을 연상시킨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믿음의 식구이자 제자공동체인 교회가, 예수님이 맡겨주신 복음을 위탁받았다.
교회의 지체인 우리는 교인 수준을 넘어 복음을 맡은 자들이다.
우리가 맡은 복음을 가지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시계침은 종말을 향하여 바쁘게 달려가고 있다.
주님은 저 고개 너머 동구밖에 오고 계신다.
아직은 주님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깨어 준비할 시간이, 아직은 좀 남아 있긴 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기한이 주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부자가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기는 기준이 있었다.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모든 종들에게 똑같은 양을 맡기지 않았다.
눈에 띄게 차이가 났다.
그 기준이 뭐였는가?“각각 그 재능대로”
누가 봐도 모든 종들이 같은 양의 달란트를 받지 않았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우리 역시 각자가 받은 달란트의 차이가 있다.
그 달란트가 능력일 수 있다.
아니면 지혜와 지식일 수 있다.
아니면 육체적인 건강일 수 있다.
아니면 처한 환경일 수 있다.
아니면 재물일 수 있다.
아니면 리더십일 수도 있다.

-사람은 똑같은 조건과 환경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그 점에 있어서 날 때부터 불공평한 게 사실이다.
하나님께 그 불공평을 따진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확실한 것은 끝까지 불공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달란트를 맡길 때의 기준이 있었듯이, 달란트를 결산할 때도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그 기준을 보면 공평하다.
우리는 맡겨진 달란트 양을 보고 불평할 게 아니라, 그 달란트를 어떻게 잘 활용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해야 한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창조주이시다.
곧 우리를 지으신 분이다.
우리를 모태에서부터 조성하신 분이시다.
우리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분이시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형편과 처지에 맞게 달란트를 맡겨주셨다.
우리가 잘 감당할 수 있는만큼, 우리가 잘 활용할 수 있는 만큼의 달란트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맡겨주셨다.

-우리는 자신을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곤 한다.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으니 많이만 달라고 하는 게 과대평가다.
그것도 감당하기 힘드니 제발 그만 달라고 하는 게 과소평가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정확히 모른다.
우리의 설계자이신 하나님이 정확히 아신다.
그걸 인정하는 표가, 하나님이 맡기신 것에 감사하는 것이다.

-제대로 감당하지도 못할 거면서 달란트 욕심 부려서는 안 된다.
남들이 더 많이 받았다는 것을 부러워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건 결코 부러워할 일이 아니다.
‘내가 그 사람보다 못한 게 뭐냐’며 시기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얼마의 달란트를 받았든지, 주인이 그것에 대해 책임을 요구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받은 달란트를 잘 활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어떻게 했는가?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주인이 자기의 재능을 높게 평가하여 다섯 달란트를 맡기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섯 달란트를, 그냥 용돈으로 준 것이 아니고, 보관만 하고 있으라고 준 것이 아님을 알기에, 상당한 부담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지체하지 않았다.“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그는 꾸물거리고 있지 않았다.
바로 가서 받은 다섯 달란트로 장사를 했다.

-자신을 믿고 다섯 달란트를 맡겨준 주인에 대한 감사가 있기에 가능했다.
감사의 마음이 즉각적이고 자발적인 행동을 하게 했다.
아울러 자기가 맡은 다섯 달란트에 대한 책임감이 있기에 가능했다.
책임감을 강하게 느낀다면서, 지금 할 일을 다음으로 미룰 수 없는 법이다.

-감사와 책임감은 종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이 종은 달랐다.
그런 점에서 본문에 나오는 종들은 종이기보다 청지기다.
종은 주인이 시킨대로만 하면 된다.
종에게는 재량권이 허용되지 않는다.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는 것은, 종의 신분으로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사람이 맘에 있으면 굼뜨게 행동하지 않는다.

-몇 주 전 아내가 “시호가 벌써 사춘기가 왔나봐요?” 했다.
내가 웃으며 “에이, 벌써 왔을까봐.” 했다.
하도 요즘 애들은 성장 속도가 빨라서, 사실 왔을 수도 있다.
보면 한 번 시켜서 바로 하는 법이 없다.
예전에도 “잠시만요.”가 입에 붙어 있긴 했다.
요즘에는 같은 말을 서너대여섯번은 해야, 겨우 움직임이 있다.
시켜놓고 지켜보는 나는 숨너머갈 지경인데 자기는 천하태평이다.
“이 놈의 새끼 진짜...” 하며 목소리를 높이면, 안경 너머로 커다란 눈망울을 껌벅거리며,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러나 자기가 맘에 있는 것을 할 때는, 얼마나 재빠른지 모른다.

-우리가 왜 말씀에 순종하는데 굼뜬가?
왜 말씀에 순종하는 걸, “잠시만요” 하며 차일피일 미루는가?
맘에 없어서다.
아멘은 하는데 맘에는 없는 것이다.
진짜 맘에 있으면 즉시 순종이 된다.
진짜 맘에 있으면 자발적인 순종이 된다.“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장사를 잘하여 다섯 달란트를 남겼다.
장사를 잘하여 갑절의 이익을 창출했다는 의미보다는, 100% 충성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주인이 종들에게 기대한 것은, 자기의 주어진 여건 안에서 100% 충성하는 거였다.
100% 충성, 이게 최선이다.

-프로축구 K리그 클래식에 진출했다가, 바로 다음해 챌린지로 강등된 수원FC가 챌린지에서도 성적이 좋지 않자 감독을 바꿨다.
새 감독에 김대의 씨를 선임했고, 김감독은 부임하여 첫승을 거두고, 이런 인터뷰를 했다.

-“수비수 레이어가 경기 도중 아파서 헤딩도 못하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그러면 미드필드로 올라가 서 있기만 해라’고 했다. 그런데 레이어가 끝까지 버텨줬다. 경기 직후 라커룸에 들어가니 선수들이 모두 지친 표정을 짓더라.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축구다. 매 경기가 결승전 같은 축구, 90분이 지나면 걸어다니는 것도 힘든 그런 축구를 하고 싶다. 그러면 팬들도 경기 내용이 좋든 나쁘든 박수를 쳐 줄 것이다.”

-각 사람은 재능의 차이는 존재한다.
서로 간의 실력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100%를 쏟아붓지 않은 것은 문제다.
“90분이 지나면 걸어다니는 것도 힘든 그런 축구”
이게 최선을 다한 것이다.
선수가 그렇게 최선을 다하면, 팬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100%면 된다.
그것이 충성이다.

-두 달란트 받은 자는 어떻게 했는가?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두 달란트 받은 자 역시 그같이 하였다.
여기서 “그같이 하여”는, 16절의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와 같은 의미이다.
그는 비록 두 달라트를 받았지만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였다.
주인에게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에 비해, 자신의 재능을 낮게 평가받은 게 사실이다.
그래서 기분 나빠 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바로 가서 100% 충성했다.
만약 그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비교하여, 그가 자기보다 어떤 재능이 낫냐며 주인에게 따지고 대들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두 달란트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한 달란트도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지혜로웠다.
그리고 100% 충성했다.

-반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어떻게 했는가?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앞의 두 종과는 다른 선택을 했다.
그는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가서 장사하지 않았다.
땅을 파고 감추어 두었다.
땅을 파서 돈을 감추어 두는 것은, 당시 돈을 보관하는 방법이었다.
그는 장사라고 하는 모험 대신, 땅에 묻는 안전을 선택했다.
‘굳이 장사하느라 고생할 필요가 뭐 있나? 땅에 묻어두면 심신이 두루 편안한데...ㅎㅎㅎ’
또 곱씹어 생각할수록, 주인에게 기분이 언짢았다.
‘아니 나한텐는 왜 한 달란트밖에 안 맡기셨을까’
‘내 재능이 그들의 재능보다 모자란 것도 없을 거 같은데...’

-그럼 한 달란트가 작은 돈인가?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에 해당한다.
당시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이다.
300데나리온이 노동자 1년 품삯이었음을 감안할 때, 한 달란트는 노동자가 약 20년 동안 받는 품삯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달란트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주인이 한 달란트를 맡겨놓고, 다섯 달란트를 남기라고, 혹은 두 달란트를 남기라고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100% 충성이면 되었다.

-그리고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아무런 소식이 없었던 주인이 갑작스럽게 귀국했다.
종들은 생각지도 않은 날,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들은 불만을 가질 수 없다.
주인이 제 집에 왔기 때문이다.
주인이 오는 때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인이 왔을 때, 겉으로는 모든 종이 환영했다.
“주인님, 안녕하셨습니까? 그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러나 속마음은 다 같지 않았다.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종과 두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은근히 결산에 기대를 걸었지만,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야 이거 큰일났네 싶었다

-주인이 종들을 모아 놓고는, “이제 한 사람씩 결산하자”고 했다.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먼저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가 주인에게 나아왔다.
그의 손에 다른 다섯 달란트가 주어져 있었다.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렇게 말하는데 스스로에 대해 뿌듯해 하는 게 느껴졌다.

-주인도 적잖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여기서 핵심은 칭찬의 내용이다.
“오, 다섯 달란트나 남기다니, 너는 아주 사업가 기질이 뛰어나구나!”
이런 칭찬이 아니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수치상 결과를 칭찬한 것이 아니라, 인품을 칭찬했다.
충성스런 인품을 크게 칭찬했다.

-영국의 소설가 키플링은 충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충성을 다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일의 크고 작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이다.
내가 학생이라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충성이다.
내가 군인이라면 배치된 부대에서 훈련받는 것이 충성이다.
내가 직장인이라면 주어진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이다.
하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한 자를, 더 큰 일에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미국 미시건 주의 성 요셉 고아원에 불쌍한 형제가 있었다.
타미로 불리는 아이는 원생들과 싸움만 일삼은 문제아였지만, 베라다 선생님은 늘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소년의 행동에는 변화가 없었고, 결국 그는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시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너를 무척 사랑하신단다. 큰 꿈을 갖도록 하렴” 이라며, 늘 자신을 격려해준 베라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깨달았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 용기를 냈고, 피자가게에 취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정말 열심히 배워, 피자 한 판을 11초에 반죽하는 솜씨를 발휘했다.

-그는 1960년에 그의 형제 지미와 함께, 500달러를 가지고 작은 피자 가게를 차렸다.
이 가게는 큰 성공을 거뒀고, 전 세계에 7000여 개의 점포를 소유한 ‘도미노 피자’가 되었다.
그가 바로 토마스 모너건(Thomas Monaghan)이다.

-그는 자기가 차린 작은 피자가게가, 그렇게 세계적인 회사가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그는 단지 작은 일에 충성했을 뿐이다.
그렇게 작은 일에 충성했더니, 하나님께서 큰 일에 충성할 수 있는 복을 주셨다.

-다음은 두 달란트 받았던 자가 주인에게 나아왔다.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살짝 긴장이 되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대단한 칭찬을 받았기 때문이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종이 주인한테 이보다 더한 칭찬을 받을 수 없다.
그는 자기가 받았던 두 달란트와 장사하여, 남긴 두 달란트를 주인에게 내보였다.

-그러자 주인이 활짝 웃는 게 아닌가.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세상에,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과 칭찬이 동일하다.
큰 의미는 없지만, 그 칭찬이 토시 하나 다르지 않다.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에게도, 중요한 것은 그가 충성했다는 것이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두 달란트를 남겼다면 충성하지 않은 거다.
두 달란트 받은 자가 다섯 달란트를 남기려고 하는 것도 문제다.
두 달란트 받은 자가 충성할 때, 두 달란트를 남길 수 있다.
그런데 두 달란트 받은 자가 다섯 달란트를 남기려고 하면, 편법이나 불법이 동원되어야 할 수 있다.
그건 충성이 아닌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달란트 받았던 자가 주인에게 나아왔다.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는 앞의 두 사람에게 한 칭찬을 듣고 긴장이 됐다.
벌써 등어리가 식은 땀으로 축축해졌다.
그는 사실 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왜 그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는지를 이실직고했다.

-그에게 들려온 것은 주인의 호된 책망이었다.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악하고 게으른 종아”
“악하고”의 원어 ‘포노스’가 무가치하다는 뜻이고, “게으른”의 원어 ‘오크네오’가 지체하다는 뜻이다.
한 달란트를 받았던 자를 자기 안일에 빠져 주인에게 무가치한 종이라고 책망한 것이다.
여기서 특히 “충성된”의 상대어로 “게으른”이 사용한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게으름이 곧 불충성이란 말이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 곧 악하고 게으른 종은 두 번 죽었다.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한 달란트를 주인이 가져가는 거야 당연하지만, 자기 것을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는 것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다.
이건 그를 두 번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는 주인의 집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다시는 희망을 가질 수 없는 바깥 어두운 데로 말이다. 주의 몸된 교회에 직분자로 사역자로 부름 받은 여러분...“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