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66:당신은 슬기로운 사람입니까?(마 25:1-13)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7-11-12 00:00
조회
634
마태복음 강해 66당신은 슬기로운 사람입니까?(마 25:1-13)2017. 11. 12. 프롤로그

-예배 때 설교를 듣는 여러분은 어땠는지 몰라도, 설교자는 마태복음 23장, 24장 강해하는 것이 여간 힘들었다.
솔직하게 “달고 오묘한 이 말씀”이 아니었다.
오히려 건너뛰고픈 말씀이었다.
23장 강해 세 번, 24장 강해 세 번으로 넘겨 안도가 되나 했는데, 25장 말씀 앞에서 한 동안 멍해졌다.
그건 25장에 나오는 세 비유의 말씀이, 너무 익숙한 말씀이어서였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다들 많이 들어본 말씀이어서였다.

-어려운 말씀은 쉽게 풀어주면 된다.
그러나 뻔한 말씀은 그럴 수도 없다.
애초 말씀에 대한 기대치가 낮다.
이 뻔한 말씀을 어떻게 뻔하지 않게 전할 수 있을까, 이게 설교자의 고민이다.
또한 이건 설교자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냉장고를 부탁해>란 프로그램에 보면, 세프들이 뻔한 식재료를 가지고, 기가 막힌 요리, 감탄을 자아내는 요리를 만들어낸다.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에 말이다.
물론 그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세프들인 건 인정한다.
하지만 나도 안수받은 설교자로 20년이 넘었는데, 설교준비할 때마다 진땀이 나니 자괴감이 든다.

-예수님은 말재주가 뛰어나셨다.
천하의 이야기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들녘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다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배고픈 줄도 모르고 들었다.
어려운 진리의 말씀을 쉽게 푸는 재주가 있었고 추상적인 진리의 말씀을 일상의 비유로 푸는 능력이 있었다.

-25장에 나오는 세 비유는 극적이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극적인 이야기 중에서도, 비유의 백미로 꼽히는 말씀이다.
그 비유가 더욱 극적인 것은, 그게 종말 비유라는데 있다.
종말은 다음이 없다.
다음 기회가 있다면 종말이 아니다.
다음 기회가 없다는 말은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때에”로 시작된다.
여기서 그 때는 종말 즉 예수님의 재림의 때이다.
세 비유가 모두 그 때에 관한 말씀인 것이다.
종말에 대한 말씀이 24장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25장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4장에도 종말 비유가 없지 않았다.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있었고, 두 부류의 종의 비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25장에서 종말 비유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같은 주제의 말씀을 거듭 반복하는 것은 강조의 의미가 있다.
또한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작 중요하다.
어떻게 시작하느냐는 너무 중요하다.
그럼에도 시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끝이다.
시작도 잘 해야 하지만, 끝을 잘 맺어야 한다.
스타트도 잘 해야 하지만, 결승 라인도 잘 통과해야 한다.
기초 공사도 잘 해야 하지만, 마지막 인테리어도 잘 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은 종말에 대해 강조하고 또 강조한 것이다.

-주님은 종말 비유를 하시며, 시작의 의미가 더 강한 결혼식 비유를 하셨다.
결혼은 시작이기도 하지만 종말이기도 한단 말인가?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을 불행 시작 행복 끝으로 여긴다.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지만, 실제 그런 경우도 꽤 있다.

-유대인들은 결혼을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탈무드에 결혼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온다.
로마의 어느 부인과 랍비 요세 바르 할라프타의 얘기를 통해, 그들이 얼마나 결혼을 신중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다음은 귀부인과 랍비의 대화이다.귀부인 :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는 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랍비 : 6일 걸렸습니다. 귀부인 : 그럼 그 후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랍비 : 하나님은 그후 지금까지 사람들을 결혼시키기에 분주하시답니다.귀부인 : 그런 일이라면 나라도 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수많은 남녀 노예들을 소유하고 있는데, 잠깐 동안에 그들을 전부 결혼시킬 수 있습니다. 랍비 : 그럴까요? 당신의 눈엔 그 일이 쉬워 보여도 하나님에겐 어떤 결혼이든 간에 그 일이 홍해를 가르는 일만큼이나 힘이 드신답니다.

-랍비와 헤어진 후, 귀부인은 자기 집의 남녀 노예들을 모두 소집했다.
남자 노예 1,000명, 여자 노예 1,000명을 두 줄로 세워 놓고 명령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왼쪽의 사람과, 왼쪽의 사람은 오른쪽의 사람과 오늘부로 결혼할지어다.”
이렇게 하여 과연 귀부인은 1,000쌍의 남녀 모두를, 단 하루 저녁에 결혼시켰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그들은 불평하며 주인에게 나왔다.
어떤 사람은 머리가 깨졌고, 어떤 사람은 눈두덩이 터져 있었다.
어떤 사람은 팔이 부러졌고, 어떤 사람은 다리가 부러졌다.

-귀부인은 의아해하며, 그들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그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당신이 맺어준 사람은,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귀부인은 즉시 랍비에게 달려가 말했다.
“선생님, 당신의 가르침이야말로 참이며 칭송받을 만한 것입니다.”-그러자 랍비가 웃으며 대답했다.
“제대로 짝을 맺어 주는 것이 겉으로는 쉬워 보여도, 하나님은 이 일을 홍해를 가르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로 생각하십니다.”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결혼식 날은 신랑신부의 과거의 모든 죄가 용서되는 날이며, 동시에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날이다.
그러므로 신랑과 신부는 결혼식 전날 저녁부터 다음날 결혼 예식이 끝나기까지, 경건한 마음으로 하루를 금식한다.

-그들은 결혼식이 끝남과 동시에, 신랑은 유리컵을 밟아 깨뜨리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첫째는, 유대인의 성전이 파괴된 것을 애도하기 위함이다.
인생의 절정의 순간에 민족 최대의 비극을 상기하는 것이다.
역시 유대인은 무서운 사람들이다.
둘째는, 산산조각난 유리컵은 원상복구가 불가능하듯이, 그들의 결혼도 이제는 되무를 수 없는 영원한 것임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이혼을 쉽게 생각하는 이 시대에, 곱씹어 볼만한 교훈이다.-------------------------------------------------------

-이스라엘 결혼식은 밤에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래서 ‘등 이야기’가 등장한다.
우리나라도 주 5일제 근무가 시작되고부터, 야간에 결혼식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결혼식은 낮에 한다.
생각을 넓히면, 야간결혼식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

-유대인의 결혼식에는 몇 가지 절차가 있다.
신랑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자기 집을 떠나, 신부를 데리러 신부의 집에 간다.
그리고 신부의 집에서 여러 의식을 마치고 나서, 해가 질 즈음에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

-1절의 열 처녀는 신부가 아닌 신부의 친구들 곧 들러리를 가리킨다.
이들은 저녁 무렵부터 등을 들고 나가, 신부를 데려오는 신랑을 기다렸다가, 그들 일행을 혼인 잔치로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때 들러리가 사용하는 등이, 횃불을 말하는지, 등불을 말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랍비들에 의하면, 혼인잔치 때에 사용했던 등은, 긴 막대기 끝에 역청과 헝겊과 기름을 담은 그릇이 달려 있었다고 한다.
랍비의 설명에 의하면, 어찌보면 횃불 같고, 어찌보면 등불 같다.
횃불을 들었느냐 등불을 들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밤새 밝힐 수 있는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느냐 그렇지 못했느냐가 중요하다.

-요즘 같이 통신시설이 발달해 있다면, 언제 오는지 확인하면 되지만, 당시는 그렇지 못했다.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니 신랑이 올 때까지 등을 밝혀야했고, 여분의 기름이 충분해야 했던 것이다.

-열 사람이 다 똑같지는 않았다.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부의 친구들인 것은 맞지만, 다 슬기롭지만은 않았다.
절반은 슬기로웠지만 절반은 미련했다.
차라리 기울면 나은데 반반이다.
5:5로 갈라졌다.
그러면 편이 나눠진다.
8:2나 9:1이었으면, 2나 1이 8과 9를 따랐을 것이다.
절묘하게 5:5로 갈리니 의견 조율이 힘들다.

-슬기로운 다섯의 주장도 일리가 있고, 미련한 다섯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이래서 여분의 기름이 필요하고, 저래서 여분의 기름은 필요없다고 한다.
양쪽 다 확신이 있다.
자기들 생각에 작은 의심도 없다.
똑같은 상황이지만, 얼마든지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나오는 내용이다.
몸을 구겨서 지하철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앞 뒤 옆 사람이 꽉 찼네요.
이 순간 우리의 마음은 짜증을 부릴 수도 있고
‘헤헤, 손잡이 잡지 않아도 된다’고 재미있어 할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일이 벌어져도 사람들은 이처럼 반응이 달라요.
왜냐하면 세상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고, 알고보면 내 마음이 나를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일리 있는 글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자기를 괴롭힌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자기가 세상을 더럽히고, 자기가 세상을 혼탁하게 하는 데, 그걸 모른다.

-역대하 18장에 보면, 이스라엘 왕 아합이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길르앗 라못 치기를 권했다. “당신이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시겠느냐”

-여호사밧이 선뜻 대답했다.“나는 당신과 다름이 없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다름이 없으니 당신과 함께 싸우리이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을 했다.“청하건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오늘 물어 보소서”

-아합은 선지자 사백 명을 모아놓고 물었다. “우리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그러자 그들은 입을 맞춘 듯이 하나같이 말했다.“올라가소서 하나님이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여호사밧은 어딘지 모르게 미심쩍어 아합에게 물었다.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

-아합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아직도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그는 내게 대하여 좋은 일로는 예언하지 아니하고 항상 나쁜 일로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은 아합을 재촉하듯 말했다.“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길르앗 라못을 쳐야 하는 똑같은 상황이다.
하지만 아합과 여호사밧의 반응은 달랐다.
아합은 미가야 선지자가 늘 자기한테 나쁜 일로만 예언한다고 생각해서, 자기가 미워한다고 했다.
여호사밧은 그래도 그의 말을 들어봐야 한다고 했다.

-결과를 말하자면, 미가야 선지자의 말을 듣고도 무시했던 아합은 전장에서 죽고 말았다.
선지자의 예언이 찜찜했던지, 나름 잔머리를 써봤다.
그래서 변장을 하고 나섰지만, 죽음을 면하지 못했다.
한 사람이 무심코 당긴 화살이, 아합의 갑옷 솔기에 꽂혔고, 전쟁이 워낙 맹렬했기에, 아합은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죽고 말았다.

-순간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생과 사를 결정했다.

-우리는 말씀을 대할 때,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다.
그런데 보면 지금의 나와는 별로 상관 없는 거 같은 말씀일 때가 있다.

-설교자인 나는 설교 본문을 대할 때, 오늘 우리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다.
그런데 보면 지금의 우리교회와 별로 상관 없는 거 같은 말씀일 때가 있다.

-그때 당연히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그냥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한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우리교회에 꼭 필요해서 주신 말씀이라고 믿고, 담대하게 선포한다.
말씀은 예언적인 성격이 있다.
들었던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의 안내를 받으라는 것이다.
예언적인 말씀에는, 약속도 있지만, 경고도 있다.
순종할 때는 복의 약속이 되고, 불순종할 때는 심판의 경고가 된다.

-추석 연휴 금요일에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저녁뉴스를 들었다.
진행자가 여야 의원들에게 “추석 민심을 어떻게 들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여당인 민주당 의원은 ‘적폐를 청산해달라’고 들었고,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에서는 ‘정치 보복을 중단해야 한다’고 들었다고 했다.
그러자 진행자가 뼈 있는 말을 했다.
“어떻게 국회의원들은 자기 듣고 싶은 말만 들리나 봅니다??”

-자기 듣고 싶은 말씀만 듣는 게 문제다.
우리교회처럼 한 주에 예배를 주일예배 한 번만 드리면, 공식적인 설교는 한 주에 한 번밖에 못 듣는다.
하지만 아직 대다수의 교회들은, 주일예배, 오후예배, 수요예배까지, 공식적인 설교만 해도 한 주에 3번이나 듣는다.
거기에 새벽기도회나 심야기도회 등에서도 설교를 듣?쨈?

-그럼 말씀이 결코 부족한 게 아니다.
그런데 말씀적인 삶은 아니다.
말씀과 동떨어진 삶을 산다는 말을 듣는다.
왜 그럴까?
주로 자기가 듣고 싶은 말씀을 골라 들어서이다.

-뷔페에 가면 음식이 얼마나 다양한가?
아마 옛날 임금들도 그렇게 먹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별로 먹을 게 없다고 한다.
보다 정확하게는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이 별로 없다는 표현이 맞을 거다.

-자기가 기준이다.
말씀 앞에서도 자기가 기준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말씀이 기준이어야 한다.
그래서 말씀의 기준에 자기 자신을 맞춰야 한다.
그러나 자기 기준이 있어 말씀을 선별하여 받아드린다.
자기가 듣고 싶은 말씀이면 받아드리고, 그렇지 않은 말씀은 흘려보낸다.

-언젠가 회전 초밥집에 가본적이 있다.
초밥이 담긴 작은 접시가 자기 앞을 지나간다.
그 때 자기가 원하는 초밥 접시가 오면 집어들면 된다.
그런데 자기가 원하지 않는 초밥 접시가 오면 흘려보낸다.
말씀 앞에서도 이런 식이니 문제다
말씀의 자리는 지키고 있지만, 실제로는 영양실조다.
열심히 말씀을 듣는 거 같은데, 영혼은 건강하지 못하다.

-말씀을 자신한테 맞추려고 하지말자.
자신을 말씀에 맞추자.
그게 슬기 있는 자이다.

-신랑이 더디 옴으로 문제가 발생했다.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다.
신랑이 더디 오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신랑이 주인공 아닌가?
그럼 누가 누구에게 맞춰야 하는가?
신랑이 들러리에게 맞춰야 하는가?
아니면 들러리가 신랑에게 맞춰야 하는가?

-보면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 있다.
어디 가서 앉았다 하면,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통 바쁜 게 없다.
뭘 해도 서두르는 법이 없다.
자기는 괜찮은데, 옆에서 보는 사람은 속이 터진다.

-오늘 신랑이 그런 사람일 수 있다.
그러면 신랑을 기다리는 들러리는 마냥 기다려야 한다.
신랑이 오는 거리를 계산하여 ‘아, 언제쯤 오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때를 훌쩍 넘겨서 오면 기름이 떨어질 수 있다.
여태껏 기다린 것이 허사가 된다.
그래도 신랑을 탓할 수 없다.
그렇게 했다고 신랑이 죽을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신랑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랑이 해도해도 너무 늦어진다.
초저녁부터 기다리던 들러리들은 지쳐서 존다.
일부는 졸음을 못 이기고, 잠이 들기도 했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미련한 자들만 그랬을까 아니면 슬기로운 자들도 그랬을까 이다.
성경은 그런 구분을 하지 않는다.
피곤하면 슬기로운 자도 졸 수 있고, 잠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연약한 인간의 한계다.

-물론 한 시간은 깨어 있어야 한다. 마 26: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순전히 자기 영혼을 위해 ‘한 시간 기도’는 해야 한다.
그러면 적어도 자기 영혼은 지킬 수 있다.
사람이 24시간 깨어 있을 수는 없다.
오늘 하루만 살고 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도 야간에 당직을 서면 다음날 휴식을 준다.

-들러리들이 초저녁부터 퍼져 잤다면 문제가 있겠지만, 밤이 깊어가는 데도 신랑이 오지 않자, 기다리다 지쳐서 잠든 것이다.
그러니까 기다리다가 졸며 잔 것은, 결정적인 잘못이 아니다.
그것으로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렇게 기다리던 신랑이 드디어 도착했다.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말에, 다들 비상이 걸렸다.
반가워 해야 할 신랑이다.
지금까지 얼마나 기다렸던 신랑인가?
목이 빠지게 기다렸던 신랑이 드디어 도착했다.
그런데 비상이다.
깜짝 놀라 일어났지만 정신이 몽롱하다.
10명이 같은 시간에 잠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는 이른 밤에 잠들었고, 어떤 이는 얼마 전에 잠들었다.
조금만 더 깨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주님의 재림 때도 안 그러겠나?내 사모하는 주님 온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다시 오실 주님을 “내 사모하는 주님”으로 고백한다.
하지만 깨어 있지 않으면, 막상 “보라 주님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소리가 들릴 때, “아차” 하며 때늦은 후회를 한다.
끝까지 깨어 있어야 한다.
끝까지 예수 잘 믿어야 한다.

-얼마전까지 예수 믿다가 포기한지 얼마 안 되었다.
그러면 얼마나 아쉬움이 크겠는가?
아니 그건 아쉬움 정도가 아니라, 땅을 치며 후회할 일이다.

-열 사람이 잠 들어 있들어 있다가, 신랑이라는 말을 듣고 서둘러 챙기는 것이 있었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그게 바로 등이었다.
그들은 졸음이 덕지덕지 붙은 눈을 비비며, 등을 준비했다.
여기까지는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의 구분이 없었다.
교회 안에는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섞여 있다.
평소에는 구분이 안 될 수 있다.
슬기로운 자가 미련한 자로 보일 수 있고, 미련한 자가 슬기로운 자로 보일 수 있다.
슬기로운 자가 미련한 자로 대우받을 수 있고, 미련한 자가 슬기로운 자로 대우받을 수 있다.
신랑이신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그렇게 그렇게 살아간다.

-함께 예배 드리고, 함께 교제하고, 함께 식사하고, 함께 어울린다.
굳이 구별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가자” 하는 소리와 함께, 자연스럽게 구별되기 때문이다.
다만 설교를 통해, 눈에 보이는 지금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알려줄 필요는 있다.

-보면 헛똑똑이들이 있다.
자기 분야에 대해서는 잘 안다.
그래서 그것으로 밥먹고 살고 사회적 지위를 누린다.
그런데 내세에 대해 무지하다.
이 땅의 삶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모른다.
그러면 헛똑똑이인 것이다.
이 땅에서 모든 걸 가지고 누리고 산들, 영생을 잃으면 무슨 소용 있겠나?
그러면 헛똑똑이인 것이다.

-준비는 미리 하는 것이다.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미련한 자들이 달리 미련한 자들이겠는가?
때를 모르니 미련한 것이다.
준비도 때가 있는 것이다.
형통할 때 고난의 때를 준비하는 것이 슬기다.
고난이 닥쳐서 그 때 준비하려고 하면 늦고 그게 미련이다.

-열 사람 중 어떤 사람이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니까 기름을 넉넉히 준비하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신랑이 오는 거리가 뻔한데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거 같다’고 상반된 의견을 냈다.
의견이 5:5로 갈렸다.
지금 있는 기름에 더하여 넉넉하게 준비한 사람이 5명, 지금 가진 기름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5명이었다.
만일을 위해 기름을 더 준비한 사람들은, ‘굳이 미련하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이 미련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신랑은 도착해가는데 맞이해야지, 등불은 꺼져가는데 기름은 바닥이지, 그들은 할 수 없이 기름을 넉넉히 준비한 사람들에게 갔다.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그들은 다급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기름을 더 준비하는 그들이 미련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정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오히려 자신들이 어리석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상황에서는 이것 저것 따질 여유가 없다.
그래서 기름 좀 나눠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름을 가진 자들로부터 들려온 대답은 거절이었다.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슬기 있는 자들의 대답이 일리가 있다.
기름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기름을 얻으러 온 자들이 미워서도 아니다.
기름을 나눠쓰다가 다 부족하면 낭패가 된다.

-기름을 얻으러갔던 사람들은, 더 이상 사정할 수가 없었다.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들은 기름집으로 달려갔다.
그 시간에 열려 있는 기름집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 기름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신랑이 도착했다.
그래서 준비하였던 자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갔고, 곧 문이 닫혔다.

-당시 공식적인 연회를 열 경우, 현관 문 입구에는 초대받지 않은 낯선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종들이 서서 손님들을 확인했다고 한다.
초대받은 손님들은 초대장과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증명서를 보여야만 입장할 수 있었다.
손님들이 다 모이면 집주인은 문을 닫았고, 그 후에는 어떤 경우에도 더 이상 손님들을 입장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준비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뒤늦게 달려왔다.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기름을 사서 왔을 수도 있고, 가다가 말고 돌아왔을 수도 있다.
그들은 가뿐 숨을 몰아쉬며 달려와서 문을 두드렸다.“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자신들이 신부의 들러리임을 밝히며, 제발 문을 열어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러나 안에서 들려온 대답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구원의 문 닫힌 후엔 들어가고 싶으나 한 번 닫힌 구원의 문 또 열려지지 않으리

-우리는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깨어 있는 것이다.
깨어 있어 신랑으로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항상 깨어 기도하며 거룩한 기름 준비하지 않고 주를 맞지 못하리 그날 밤 그날 밤에 주님 맞을 등불이 준비됐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