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주일(2017):추수감사주일의 정신을 아십니까?(신 16:13-17)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7-11-05 00:00
조회
606
추수감사주일(2017)추수감사주일의 정신을 아십니까?(신 16:13-17)2017. 11. 5. 프롤로그

-손자들이 와서 일주일을 묵어갈 것이라는 소식에 기쁜 마음에 할머니는 교회에 가서 감사헌금으로 5만원을 냈다.
그런데 손자들이 예정된 한 주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손자들이 떠난 후 할머니는 또 감사헌금 봉투를 챙겨서 교회에 갔다.
이번에는 10만원을 넣고 다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우리의 감사생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추수감사주일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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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의 정신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나눔의 정신이다.13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14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들인 후”라는 말은 1년 동안의 모든 추수 즉 곡식과 과실의 수확을 끝마치고 이를 창고에 저장한 때를 가리킨다.
일 년 동안 열심히 농사하여 수확을 얻게 되었다.
정성을 다해 씨를 뿌리고, 땀을 흘려 농작물을 가꾸고, 최선을 다하여 소출을 얻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을 함께 나누라는 것이다.

-먼저 집 안에 있는 사람과 나누라고 했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가족과 함께 나누는 것이 첫 번째이다.
가족과 함께 나누지 않는 것은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가족사랑이란 제목의 글을 인터넷에서 본적이 있다.
아내가 어이없이 우리 곁을 떠나지 4년...
지금도 아내의 빈자리가 너무 크기만 합니다.
어느 날 출장으로 아이에게 아침도 챙겨주지 못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날 저녁 아이와 인사를 나눈 뒤, 양복상의를 아무렇게나 벗어놓고, 침대에 벌렁 누워 버렸습니다.
그 순간 뭔가 느껴졌습니다.
빨간 양념국과 손가락만한 라면이 이불에 퍼질러진 게 아니겠습니까?
컵라면이 이불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는 뒷전으로 하고, 자기 방에서 동화책을 읽던 아이를 붙잡아, 장딴지며 엉덩이며 마구 때렸습니다.
"왜 아빠를 속상하게 해?" 하며, 때린 것을 멈추지 않고 있을 때, 아들녀석의 울음 섞인 몇 마디가, 제 손을 멈추게 했습니다.
‘아빠가 가스렌지 불을 함부로 켜서는 안된다는 말에 보일러 온도를 높여서 데워진 물을 컵라면에 부어서, 하나는 자기가 먹고, 하나는 아빠 드리려고 식을까봐 이불속에 넣어둔 것이라고...’

-가슴이 메어왔습니다.
아들 앞에서 눈물보이기 싫어, 화장실에 가서 수돗물을 틀어놓고 울었습니다.
일 년 전에 그 일이 있고 난 후, 저 나름대로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무던히 노력했습니다.

-아이는 이제 7살 내년이면 학교 갈 나이죠..
얼마 전 아이에게 또 매를 들었습니다.
일하고 있는데 회사로 유치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이가 유치원에 나오지 않았다고..
너무 다급해진 마음에 회사에 조퇴를 맞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찾았죠.
동네를 이 잡듯 뒤지면서, 아이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놈이 혼자 놀이터에서 놀고 있더군요..
집으로 데리고 와서 홧김에 마구 때렸습니다.
하지만 단 한차례의 변명도 하지 않고, 잘못했다고만 빌더군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날 부모님을 불러놓고 재롱잔치를 한 날이라고 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아이는 유치원에서 글자를 배웠다며, 하루 종일 자기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글을 써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나고, 아이는 학교에 진학했죠..
그런데 또 한 차례 사고를 쳤습니다.
그 날은 크리스마스날이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퇴근을 하려고 하는데 한통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우리 동네 우체국 출장소였는데, 우리아이가 주소도 쓰지 않고 우표도 부치지 않은 채, 편지 300여통을 넣는 바람에, 연말에 우체국 업무가 지장을 끼친다는 전화였습니다.

-아이가 또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불러서 매부터 들었습니다.
아이는 그렇게 맞는데도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은 채, 무조건 잘못했다는 말만 하더군요.
그리고 우체국가서 편지를 받아온 후, 아이를 불러놓고 “왜 이런 짓을 했냐”고 하니 아이는 울먹이며 “엄마한테 쓴 편지라구..”
순간 울컥하며 나의 눈시울이 빨개졌습니다.

-아이에게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그럼 왜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편지를 보냈느냐”고.
그러자 아이는 “그동안 우체통에 키가 닿지 않아 써오기만 했는데, 오늘 가보니깐 손이 닿아서 다 들고 갔다고...”
순간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엄마는 하늘나라에 있다고...
다음부턴 적어서 태어버리면 엄마가 볼수 있다고...”
밖으로 편지를 들고 나간 뒤 라이타 불을 켰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무슨 내용인가 궁금해 편지 하나를 들었습니다. 보고 싶은 엄마에게. 엄마 지난주에 우리유치원에서 재롱잔치 했어. 근데 난 엄마가 없어서 가지 않았어. 아빠한테 말하면 엄마생각 날까봐 하지 않았어. 아빠가 날 막 찾는 소리에 그냥 혼자서 재미있게 노는 척 했어. 그래서 아빠가 날 마구 때렸는데 얘기하면 아빠가 울까봐 절대로 얘기 안했어. 나 매일 아빠가 엄마생각하면서 우는 것 봤어. 근데 나는 이제 엄마 생각 안나. 아니 엄마 얼굴이 기억이 안나. 보고 싶은 사람 사진을 가슴에 품고 자면 그 사람이 꿈에 나타난다고 아빠가 그랬어. 그러니깐 엄마 내 꿈에 한 번만 나타나. 그렇게 해줄 수 있지. 약속해야 돼

-난 편지를 보고 또 한 번 고개를 떨구어야 했습니다.
아내의 빈자리를 제가 채울 순 없는 걸까요..
시간이 이렇게 흘렸는데도...
우리아이는 사랑받기위해 태어났는데, 엄마사랑을 못받아 마음이 아픕니다.
정말이지 아내의 빈자리가 너무 크기만 합니다. 혁수야, 아빠야.. 우리 혁수한테 정말 미안하구나.. 아빠는 그런 것도 모르고. 엄마의 빈자리 아빠가 다 채워줄 수는 없는 거니? 남자끼린 통한다고 하잖아. 혁수야 너 요즘에도 엄마한테 편지 쓰지 . 아빠 너 하늘로 편지 보내는 거 많이 봤다. 엄마가 하늘에서 그 편지 받으면 즐거워하고 때론 슬퍼서 울기도 하겠지... 혁수야 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어. 그걸 잊지 마. 아빠가 널 때린다고 엄마가 혁수를 놔두고 갔다고 섭섭해 하지 마. 알겠지? 끝으로 사랑한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우리 아들...

-가족은 너무나 가까이 있어, 때론 소중함을 모를 때가 많다.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늦다.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추수감사주일이 되기 바란다.

-다음은 성 안에 있는 사람과 나누라고 했다.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레위인은 오늘날로 말하면 목회자다.
객이나 고아 과부는 오늘날로 말하면 사회적 약자다.
하나님께서 왜 일 년 동안 농사를 지어 그들과 함께 하라고 했을까?
그들과 함께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다.

-레위인과 함께 할 때 누릴 수 있는 복이 무엇인가?
신령한 복이다.
레위인은 하나님을 가까이서 모시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복이다.
그들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할 때 신령한 복을 누릴 수 있다. 갈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기 때문이라고 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복의 통로이다.
모든 사람이 복의 통로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목회자를 통해서 주시는 복이 있는데, 그게 바로 신령한 복이다.
신령한 복을 사모하는 사람은, 목회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고자 힘쓴다.
여러분이 남은 삶 동안 신령한 복을 풍성하게 누리기 바란다.

-레위인과 함께 할 때 누릴 수 있는 복이 영적인 복이라면, 객이나 고아 과부와 함께할 때 누릴 수 있는 복은 구제의 복이다.
구제 자체가 복이다.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줄 모른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주위에 가난한 사람이 있는 것에 대해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 수 있다.
그들이 우리에게 구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아무리 구제하고 싶어도 구제할 대상이 없다면 못한다.

-어느 전도자가 길을 지나다가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 앞에 섰다.
주머니를 뒤졌습니다만, 마침 그에게는 한 푼의 돈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차마 그대로 지나칠 수 없기에, 전도자는 손을 내밀어 걸인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면서 말했다.
"형제여, 마침 내게 준비된 것이 없군요. 그러나 당신의 너무 춥게 보이는 그 손을 잡아드리고 싶소. 부디 용기를 내어 일어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새 생활을 시작해 보십시오."

-걸인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당신은 지금까지 나에게 적선한 어떤 이들보다, 더욱 값진 선물을 주셨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나이든 전도사님이 어떤 동네에서 개척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분이 병 고치는 은사가 있어, 특히 침을 잘 놨는데 어려운 동네사람들에게 침을 놔주면서, 꼭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수, 믿을 거야? 안 믿을 거야? 믿을 거면 놔 주고, 아니면 안 놔줄거야.”
그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이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예수는 안 믿는다.”

-구제는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구제에서 사랑이 빠지면 상대에게 수치심을 안겨준다.
구제에서 섬김의 자세가 빠지면 상대에게 모멸감을 준다.
그럼 구제하는 사람도 복이 안 되고, 구제를 받는 사람도 복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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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예배정신이다.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나눔이 사람과의 관계라면,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추수감사절은 단순히 사람들끼리 나누는데 있지 않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중심이어야 한다.

-먼저 예배 장소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본문이 속해 있는 신명기 16장에서만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이란 말이 무려 6번(2, 6, 7, 11, 15, 16절)이나 나온다.
절기를 지킬 장소를 대단히 강조한 셈이다.

-하나님이 예배를 위해서 택하신 곳이 어디인가?
예루살렘 중앙 성소이다.
그곳은 유일성소였다.
종교적 열심이 특심인 사람들 중에, 개인적으로 단을 쌓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기도 했지만 그곳을 성소라고 부르지 않는다.
산당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우리도 직장 내에서 신우회 예배를 드릴 수도 있다.
집안에서 식구들끼리 모여 가정예배를 드릴 수도 있다.
산이나 들로 나가서 자연을 벗삼아 야외예배를 드릴 수도 있다.
그리고 그곳 어디나 하나님은 계신다.
그분이 계시지 않은 곳은 없다.
심지어 그분은 사이버상에도 계신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예배를 위해 택하신 장소는 교회뿐이다.
교회는 예배를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유일한 장소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의 예배를 거부하고, 공동체에서 벗어나 개인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잘못이다.
예배를 위해서 유일하게 택하신 장소인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즐거움을 누리기 바란다.

-다음 예배장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다.
예배자의 자세이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예배 장소에 대해 질문을 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그 때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셨는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그럼 어디서 예배를 드리란 말인가?
그저 아무데서나 드려도 된단 말인가?
예배장소는 무시해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아니다. 장소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자세라는 말이다.
예배를 어떤 장소에서 드리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배자가 어떤 자세로 예배 드리느냐는 것이다.

-예배에 있어 예배자의 마음 자세는,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비뚤어진 마음자세로 반듯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거역하는 마음으로 순종의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느냐 말이다.
아무 곳에서 예배를 드려도 반듯한 마음 자세가 나올까?
그렇지 않다. 사람은 절대적으로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예배를 위해 잘 정돈된 환경에서, 반듯한 마음 자세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예배에 있어 장소와 마음자세는 따로 떼어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둘은 너무나 밀접한 관계에 있다.

-다음은 예배자의 자아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여기서 절기를 지키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려면 많은 양의 짐승을 잡아야 한다.
그 피 비린내가 얼마나 났겠는가?
그리고 그것을 불로 태워서 화제로 드리라고 했으니, 그 연기와 그 냄새는 또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그렇게 제사를 드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은가?
자아의 죽음이다.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주는 말씀이 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예배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자아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들이다.
우리의 자아는 이미 장사를 지낸 바 되었다.
제물이 제삿상에서 꿈틀대면 안 된다.
죽은 셈치고 가만히 있어도 안 된다.
죽어야 한다.
아니 죽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잘 안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말씀 묵상도 해보고, 찬양도 해보지만, 여전히 고개를 내밀며 살아나는 자아를 발견한다.

-그 위대한 믿음의 사람 바울도 그랬나 보다.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자기가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했다.
스스로를 쳐서 복종시키지 않았다면 그 역시 믿음의 경주를 잘하지 못했을 거다.
우리가 왜 매일 새벽기도를 해야 하는가?
매일 자신을 쳐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기 위해서다.
우리가 왜 날마나 큐티를 해야 하는가?
날마다 자신을 쳐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기 위해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지만, 예전 마귀에게 종노릇하던 근성이 남아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을 쳐서라도 복종시켜야 한다.
아니 꼭 쳐가면서까지 복종시킬 필요가 있는가?
물론이다. 쳐서라도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있다.
그게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의 문제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다.
불순종은 죽는 길이다.
순종만이 사는 길이다.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하면 사는 길이 열린다.
이 땅에서 살기 위하여 말씀에 불순종하면 영원히 죽는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순종의 중요성을 교훈하셨다.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사울의 왕으로서의 생명은 사실상 끝난 것이다.

-순종의 중요성을 잘 말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하루의 전투가 끝나고 나서, 지휘관이 그날의 전투 상황에 대해 장교들과 함께 평가회를 가졌다.

-지휘관이 물었다.
“어느 군인이 그 날 가장 탁월한 군인이었는지 자신의 생각을 말해보시오.”-어느 장교가 말했다.
“가장 탁월한 군인은 그 날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군인이었습니다.”-다른 장교들도 나름대로 자기 의견을 제시했다.-그 때 지휘관이 말했다.
“아니오. 여러분 모두가 다 틀렸어요. 오늘 전장에서 최선의 군인은 적을 죽이려고 칼을 들어 막 내리치려는 순간 퇴각 나팔 소리를 듣고 적을 치지 않고 나팔 소리대로 후퇴한 군인입니다.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한 군인이 가장 탁월한 군인입니다”

-지휘관의 말이 맞다.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사실은 그런 순종이다.
주님은 엄청난 업적을 이룬 사람의 편이 아닌, 순종하는 자의 편이다.
주님을 위해 대단한 위업을 달성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치고 말씀에 순종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왜 순종이 잘 안 될까?
자아가 죽지 않아서 그렇다.
자아의 죽음 없이 순종은 불가능하다.
복종은 자아의 죽음 없이도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순종은 안 된다.

-예배가 뭔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 예배이다.
성경은 온통 하나님께 예배하라는 말씀들로 가득 차 있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자아의 죽음을 통한 온전한 예배자가 되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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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헌신의 정신이다.16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17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하나님 앞에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는 게 먼저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 보이는 것이 먼저다.
하나님 앞에 몸을 보이는 것 곧 헌신이 먼저이고, 헌금은 그 다음이다.
물론 참으로 헌신한 사람은, 헌금하는 것을 힘들어 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해 한다.
내가 헌금에 힘들어한다 그러면 ‘내가 헌신이 되어있지 않구나’ 생각하면 틀림없다.

-헌신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다.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너희 몸으로 다시 말하면 헌신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한다.
우리는 헌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우리가 통 크게 헌신할 때, 더 큰 영광을 받으실 줄 믿는다.

-소치영 목사님의 [성도 길라잡이]라는 책에, 미국에서 유명한 강변 교회 이야기를 싣고 있다.
강변교회는 종이 68개나 달린 종각을 자랑하는 교회다.
이 종은 소망을 잃은 자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 교회 종이 울려 펴지게 된 데에는, 어느 한 젊은이의 헌신이 있었다.
9살난 한 소년은 어릴 때부터 남의 집 점원 노릇을 하며 돈을 모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큰 은혜를 받아 교회를 출석하던 가운데 4억 달러의 돈을 하나님을 위해 헌금하였고, 이 돈은 결국 강변 교회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에게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려주게 되었다.

-이런 헌신이 그의 자녀들에게까지 복을 받게 했는데, 그의 자손들은 후에 미국의 경제계를 흔드는 큰손들이 되었다.
그의 손자 중 한 사람이 바로 록펠러다.

-하나님은 헌신한 사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헌신한 사람을 영광스럽게 하신다.
당대는 물론이고 대대로 영광스럽게 하신다.
남은 삶을 영광스럽게 살고자 한다면, 헌신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바란다.

-성경은 물질을 죄악시하지 않고, 오히려 물질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라고 했다. 고후 9: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후한 연보 곧 넉넉한 헌금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다.
여러분의 생업이 번성하여 넉넉한 헌금 생활을 하기 바란다.
그래서 물질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란다.
괜히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라고 하신 게 아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풍속에 의하면, 왕 앞에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예물을 준비해야 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다.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가 왕이신 그분께 예물을 들고 나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께 헌금하는 두 가지 기준이 나온다. 17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첫째는 주신 복을 따라 드리라고 했다.
“주신 복을 따라” 드리라는 말은, 받은 만큼 드리라는 말이다.
많이 벌었으면 많이 드리고, 적게 벌었으면 적게 드리라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복을 많이 받았다 적게 받았다고 하는 기준이 주관적일 수 있다는데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많이 받은 것 같은데, 본인은 적게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많이 받은 사람인가?
많이 깨달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복을 주셨다.
문제는 깨달음이다.
깨달은 사람이 감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깨닫기 바란다.
남은 삶을 많이 깨달아 많이 감사하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

-둘째 그 힘대로 드리라고 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힘껏 헌금하라는 뜻이다.
헌금 시늉만 내지말고 최선의 헌금을 하라는 뜻이다.
하나님 앞에서나 자기 자신에게 떳떳하게 하라는 뜻이다.

-마게도냐교회 교우들이 그렇게 했다. 고후 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마게도냐교회 교우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고 했는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있다고 했다.
극한 가난에 처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헌금을 어떻게 드렸는가?
풍성하게 넘치도록 했다.
그들이 힘대로 할 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누가 시켜서 마지못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원하여 했다.
힘에 지나도록 하면서 자원하여 할 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