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65:깨어 있어야 삽니다.(마 24:32-51)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7-10-29 00:00
조회
889
마태복음 강해 65깨어 있어야 삽니다.(마 24:32-51)2017. 10. 29. 프롤로그

-2017년 1월 10일, 네이버 지식iN에 사오정이란 이름으로 올라온 글이다.
듣기 거북할 수도 있으니 우야든동 마음 주저앉히고 들으라.
“깨어 있으라” 이 구라질 언제까지 할까?
이 말은 예수 녀석이 어느날 갑자기 겨 내려 올수있으니,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는 먹사들의 너스레다.
그치요?
근 2000년간 예수 녀석은 겨 내려오질 않고, 먹사 녀석들은 깨어있으라는 소리를 끊임없이 해댄다.
그치요?
아 이 미친 구라질을 이대로 더이상 두고보는 것도 죄스럽다.
개독교 자체를 박멸하기 전에는, 깨어 있으라는 구라질은 계속될수 밖엔 없다.
그치요?
그토록 많은 사막잡신들이 성충권으로 겨 올라갔다 주장하나, 아직도 한 넘도 겨 내려온 넘이 없었다.
그치요?
멍청한 눔들 놀리는 개소리 중에, 이 개소리가 제일이지 싶다.
그렇지 않은가요?
우리 모두 십일조에 선교헌금, 건축헌금, 감사헌금, 헌신예배헌금, 생일감사헌금, 주정헌금, 부활절헌금, 월정헌금, 사랑의금식, 금요심야부흥회, 구역예배헌금, 비전헌금, 몽땅내고 구원받읍시다!! ㅠㅠ

-이 글에 얼씨구 좋다며 맞장구를 치는 댓글이 주렁주렁 달렸다.
교회에 대해 전혀 모른 사람의 댓글 같지는 않고, 한 동안 교회에 몸담았던 사람의 글 같아 안타깝다.
교회는 다녀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면, 이렇게 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안티 댓글을 쭉 보는데, 마음을 다스리려고 애를 써도,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좀 시간이 흐르자 적응이 됐고, 그 사람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댓글 중에, 그 사람의 영혼을 걱정하는 글도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의 글을 인용하겠다.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진짜 곧 주님이 오실 때가 임박했습니다.
질문자님에게 한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하며 살다가, 만약 반대로 진짜 하나님은 계시고, 하나님이 이땅에 다시 오시면, 그때에는 하나님께 뭐라고 변명을 하실 겁니까?
그때 돼서 하나님께 원망할까봐,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깨어 있으세요.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세요.

-오늘 이 자리에는 “깨어 있으라”는 말을, 구라질로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문제는 흘려듣는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듣는 것이다.
나와 무관한 일로 듣는 것이다.
다소 추상적인 가르침으로 듣는 것이다.
아득히 먼 훗날에나 일어날 일로 듣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받았다가, 불벼락 맞은 사람이 있다.
롯의 사위다.
하나님이 롯이 살고 있던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고 했다.
이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알려줬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봐서 롯은 살려주려고 했다.
대신 롯은 가만 있으면 안 된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얼른 빠져나와야 했다.
그래서 천사를 보내 롯에게 알렸고, 롯에게 속한 자를 성 밖으로 이끌어내게 했다.

-롯에게는 아내와 두 딸 그리고 결혼할 사위들이 있었다.
롯은 그들을 다 모아놓고 말했다.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그러나 예비 사위들은 롯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농담으로 여겼다.
그 결과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이 비같이 내릴 때, 그 성과 함께 멸망하고 말았다.

-깨어 있으란 말을 구라질로 믿고, 주님과 그 몸된 교회를 조롱하다가는, 어느 날 롯의 예비 사위들 꼴 난다.
그 때 가서 땅을 쳐도 소용없다.

-권토중래(捲土重來)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어떤 일에 실패하였으나, 힘을 축적하여, 다시 그 일에 착수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권토중래는 본래 당나라 시인 두목이 항우(項羽)가 유방(劉邦)과 패권을 다투다, 패하여 자살한 오강에서 항우를 생각하며 지은 한시에 나오는 말이다.
그 한시를 풀어보면, “승패란 병가에서 기약할 수 없는 일이니, 부끄러움을 안고 참을 줄 아는 것이 사나이라네. 강동의 젊은이 중에는 준재가 많으니,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쳐들어왔다면 어찌 되었을까”
항우가 패전의 좌절을 딛고 훗날을 도모하였다면, 다시 한번 패권을 얻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리라는, 진한 아쉬움을 토로한 것이다.

-인생은 실패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실패로 끝인 경우도 없지 않다.
깨어 있어야 할 때 깨어있지 않는 일이다.
깨어 있어야 할 결정적일 때 잠들어 있는 일이다.

-나는 군대생활을, 서울에서 남태령고개만 넘으면 있는 과천에서 했으니, 후방에서 한 셈이다.
후방에서는 별 할 일이 없으니 훈련이 강했고, 서울을 방어하는 수도방위사령부니 군기도 엄청 셌다.
고된 훈련을 받고 잠자리에 들면 시체처럼 뻗었다.

-그런데 문제는 자다 말고 중간에 일어나, 경계 근무를 서야 한다는 것이다.
경계 근무 중에서도 대표적인 게, 야간에 내무반에서의 불침번을 서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잠이 부족한데, 불침번 근무를 1시간에서 1시간 반 선다.
제 근무 시간보다 최소 30분 전에는 일어나야, 근무복장으로 준비할 수 있고, 또 근무 끝나고도 바로 잠이 들지 않는다.
그러면 실제로 잠잘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줄어든다.

-한참 잠 많은 나이에, 또한 낮의 고된 훈련에, 밤에 근무를 서고 있으면,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졸음을 당해낼 수 없다.
졸음을 이겨보려고, 허벅지를 꼬집고, 볼을 때려보고 갖은 수를 써도 안 된다.
아마 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보초를 서다가 깜박 졸아서, 몇 번쯤 얼차려를 받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실감나게 경험했다.
졸다가 들키는 순간, 심장이 멎을 것 같다.
속으로 아 이제 죽었구나! 외마디 비명이 나온다.
나도 모르게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흘러내린다.
그나마 나 혼자 혼나면 보면 꼭 동기 전체를 집합시킨다.
그러면 동기들은 자다말고 영문도 모른체 일어나 얼차려를 받는다.
동기들한테 얼마나 미안한지 모른다.

-그래도 그 정도는 양호한 편이다.
어떤 지휘관은 군기교육대에 넣거나, 심하면 영창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면 군대가서 고생하고 신세까지 망친다.

-그래도 후방이니까 목숨이 위태한 것은 면할 수 있다.
만약 적이 코앞에 있는 최전방에서는, 경계 근무자가 졸면 부대원 전체가 죽을 수 있다.
최전방에서 근무자가 졸고 있을 때, 북한군이 침투하여 내무반에서 곤히 자고 있던 군인들 목을 따갔다고 한다.
실화인지 만든 얘기인지 확실치 않으나, 얼마나 섬뜩한지 모른다.
확실한 건 보초가 깨어 있어야 산다는 것이다.

-깨어 있어야 내가 산다.
깨어 있어야 모두가 산다.
“나는 자도 당신은 깨어 있으시오” 해도 안 되지만, “내가 깨어 있을테니 당신은 자도 되오” 해도 안 된다.
영적으로는 다 깨어 있어야 한다.

-주의 오심과 마지막 때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의 답이 24장이다.
오늘 말씀은 24장 마지막 부분이다.

-먼저 무화과나무를 비유로 드셨다.
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에서 흔하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나무다.
주의 오심은 비밀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재림 징조도 누구나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특별 대우를 받고 싶어하지만, 그래서 재림 조차 자신에게만 특별히 알려주길 기대하지만, 그렇지 않다.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가 나는 것은, 결코 특별하지 않다.
그 무렵이면 여름이 다가오는 게 일반적이다.
어느 한 해만 특별하게 그런 것이 아니다.

-주의 재림의 징조는 계속 있어왔다.
주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은, 주님이 아직 준비가 덜 돼서가 아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인내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기다리는 것이 쉽겠는가, 심판하는 것이 쉽겠는가?
심판하는 것이 쉽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이 아닌 기다림을 선택하셨다.
하나님 자신을 위한 선택이 아닌, 우리를 위한 선택인 것이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32절 말씀을 이스라엘의 독립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이 독립하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깝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독립은 우리나라보다 3년 늦다.
1948년에 독립했으니, 이미 60년이 지났다.
그래도 확실한 건 재림의 날이 더 가까워졌다는 사실이다.

-주님이 문 앞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문 앞에 이르렀다는 말은, 들어올 준비가 됐다는 말이다.
문 열고 들어오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얼마나 가까운지 알 수 있다.
누워 있을 시간이 없다는 말이다.
‘조금만 더 자겠다’고 할 여유가 없다는 말이다.
지금 깨어 있어야 한다.
지금 깨어 있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자고 있는데 주님이 문 열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게 된다.

-몇 년에 한 두 번 일어나는 일이긴 하지만, 새벽에 못 일어날 때가 있다.
보통은 새벽기도회가 5시 30분인데, 3시 50분에 일어난다.
면도를 포함 세면하고, 간단하게 아침 식사까지 하고 와도, 새벽기도회 시작 50분 전에 교회에 도착한다.
커피를 마시며 설교준비하고, 남은 시간엔 성경타자통독한다.

-그런데 자다가 눈을 뜨니, 5시 20분이었다고 치자.
그러면 정신없이 허둥댄다.
예전 목사님들 목회 비하인드 스토리에 의하면, 너무 급해서 런닝셔츠에 넥타이를 하고 가기도 하고, 위의 양복에 잠옷 바지차림을 하고 가기도 했다고 한다.
보통 때 깨어 있지 않으면, 주의 재림 때 그 꼴 난다.

-하물며 깨어 있으라는 말을 구라질로 여겼던 사람들의 결말이, 어떻게 되겠는가? 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님이 뭐가 아쉬워서, 허튼 소리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은 분명하다.
깨어있으라는 말은, 결코 구라질이 될 수 없다.

-그들이 지금이야 무슨 말을 못하겠는가?
교회와 기독교가 전체적으로 욕먹고 있는데, 무슨 소리인들 못하겠는가?
재림하여 심판하실 예수님 앞에서는, 고개를 떨구고 가슴을 치며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다.
제멋대로 욕하게 버려두라.
그들 앞에서 교회와 기독교를 변호하려고도 하지 말라.
그래봤자 더 못되게 나온다.
대신 우리가 바로 믿고 바로 살자.
우리가 깨어 있어 주의 재림을 준비하자.

-주님은 재림의 시기를 다시 환기시키셨다.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는 말을 혹 오해할까 싶어서, 다시 정리를 해주셨다.
재림 정확한 시기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재림 징조에 대해서는 알려주셨다.
그럴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적당한 긴장이 필요하다.
그래야 깨어 있는다.

-재림의 정확한 때를 알면, 꾀를 부릴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설계하신 분이다.
사람이 얼마나 간사하고 계산에 능하며 잔꾀를 부릴 수 있는지, 다 파악하고 계신다.
그래서 재림의 때를 비밀에 부치셨다.
천사도 아들도 모르게, 철저히 비밀에 부치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알고 누가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재림의 때가 비밀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더 이상 논란이 없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재림의 때에 대해서 논란이 있어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그럴듯한 주장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줄여서 안식교에서 하고 있다.

-미국의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라는 침례교 목사가 시작한 재림 예언 운동이, 후에 안식일교의 출현의 모태가 되었다.
그는 성경을 많이 연구하던 사람으로, 특히 주님의 재림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Miller는 다니엘 8:14에 나오는, “그 때에 내게 이르되 2300 주야 때 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이루리라는” 말씀을 “2300년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예언”으로 해석했다
그리하여 본문의 예언의 시점을, 이닥사스왕이 성전재건의 영을 내린 주전 457년으로 보고, 그때부터 계산하여 주님의 재림의 때가, 1843년 3월 21일과 1844년 3월21일 사이에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날을 주님이 재림하실 날로 선언했다.

-그런데 그 때가 되어도 주님은 오시지 않았다.
그러나 Miller는 계산을 잘못했다면서, 다시 재림 날짜를 수정했다.
1844년 10월 22일로 재림일자를 수정해서 발표했다.
그래도 주님의 재림은 없었다.
이에 Miller는 실의에 찼고, 그의 동역자들은 그를 떠나 새로운 모임들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 모임들 중에 하나가, 바로 안식교의 모체가 된 것이다.

-Ellen G. White와 그의 부군인 James White는, 1844년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주장하도록 Miller를 부추긴, 밀러니즘의 핵심간부였다.
Miller를 따르던 무리가 모두 흩어지자, 나머지 사람들을 모아 Miller의 가르침을 다시 재해석하여 만든 것이, Ellen G. White 라는 여자가 만든 안식교이다.

-그들의 주장은 주님은 이 땅에 눈에 보이게 오시지 않은 것일 뿐, 실제로 주님은 하늘의 성소에 재림하였다고 주장한다.
하늘의 성소에 재림한 주님은, 그곳에서 이른바 ‘조사심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정작 재림하실 당사자가 “나도 모른다”고 하는데, 예수님을 억지로 재림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예수님은 재림의 시기를 비밀에 부치며, 노아의 때에 비유하셨다.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노아의 때는 죄악이 세상에 가득한 시대였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대의 의인 노아에게 심판을 예고하셨다.
구원의 방주를 예비하게 하셨다.
노아는 오랜 해에 걸쳐, 산위에 방주를 지었다.
사람들은 그런 노아를 조롱하고 놀리고 손가락질했다.

-사람들의 죄는 세상에 점점 더 차서, 이제는 넘치게 되었다.
노아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죄짓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노아는 그들을 보며 근심이 쌓여갔다.
그 근심을 잊으려고 방주를 짓는데 집중해보지만, 하나님의 혹독한 심판 앞에 죽게될 그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노아를 불쌍하게 생각했다.
허구헌날 세 아들과 함께 산 꼭대기에 방주를 짓고 있는, 노아가 제정신일까 싶었다.

-지금까지도 문제 없이 잘 살아왔는데 무슨 심판이냐며, 앞으로도 문제없을 거라고 호언했다.
이렇게 날씨가 좋기만한데 무슨 홍수 심판이 있겠느냐며, 또 비가 얼마나 와서 온 세상을 심판할 수 있겠느냐며, 괜한 소리하지 말라고 했다.

-노아는 비가 조금만 와도 덜컥 겁이 났다.
아직 방주가 덜 지어지긴 했지만, 혹 홍수가 시작되는 거 아닌가 싶어, 가슴이 콩닥거렸다.
하지만 그들은 비가 얼마간 오다가 그치니, “거 봐라”며 “홍수 심판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다.
그러기를 120년이다.

-그런데 드디어 심판의 비가 시작되었다.
노아는 알았다.
방주를 다 지은 후에 내리는 비였기 때문이다.
빗줄기가 예사롭지 않다.
하루 이틀 오다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동물을 두쌍씩 방주로 집어넣은 후에, 가족과 함께 방주에 들어갔다.
그러자 방주의 문이 닫혔다.
노아가 닫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닫으셨다.

-그런 와중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했다.
잘못하면 홍수나겠는데 하는 생각을 했지, 그게 하나님의 심판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뒤늦게 아차 싶었다.
노아와 그가 짓고 있었던 방주를 떠올렸다.

-그들은 차오르는 물을 피해, 방주가 있는 산으로 젖먹던 힘을 다해 올라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빠르게 차오르는 물에 잠기고 말았지만, 소수는 방주에 도달했다.
와서 노아를 부르며, 방주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했다.
“이봐요 노아씨 문좀 열어줘요. 당신 말이 맞았어요. 우리가 잘못 했어요. 그러니 제말 문 좀 열어주세요.”
그걸로 끝이었다.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주의 재림 때도 그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주님의 재림이 문 앞에 이르렀을 때까지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할 거라는 것이다.
재림 직전까지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날이 그 날 같다.
그제나 어제나, 어제나 오늘이나 차이가 없다.
여전히 부지런히 죄 지으며 살아간다.

-예수님은 일상을 예로 드셨다.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두 사람이 밭에 간다.
밭을 갈고 밭 이랑을 만들고 씨앗을 뿌린다.
두 사람은 앞집 뒷집 살면서 형님 동생 하는 사이다.
그런데 구원받는 사람은 한 사람이다.
한 사람만 천국에 데려가고, 다른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한다.
손맷돌은 두 사람이서 돌린다.
여기서 두 여자는 엄마와 딸일 수도 있고, 시어머니와 며느리일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가족이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은 한 사람이다.
한 사람만 구원을 받고, 다른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아무리 가족이라도, 그 날에는 갈라질 수가 있다.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옆 사람 믿고 있으면 안 된다.
스스로 깨어 있어야 한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마지막 날의 징조는 알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그 날은 누구도 모른다.
그래서 한사코 깨어 있으라고 하는 것이다.

-어느 날 도둑이 집주인에게 예고장을 보냈다. 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내가 당신 집에 가겠소”
그런데 도둑은 시간을 말해주지는 않았다.
그럼 집주인은 하루 종일 깨어 있어야 한다.
지레 짐작하여 언제쯤 오겠지 하고 방심하고 있다가는, 생각지도 않았던 때에 도둑이 다녀간다.
그런데 도둑이 몇 시에 온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게 됐다.
그럼 집주인은 깨어 있어 도둑을 붙잡을 수 있다.

-주님이 재림 예고장을 보내왔다.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이다.
뭐 별 다른 준비는 할 거 없다.
깨어 있는 것이 준비다.
그렇다고 밥도 거르고 기도만하고 있으란 말이 아니다.
생업도 접고 어떤 산에 올라가 흰옷 있고 기다리란 말이 아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라는 말이다.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주님이 우리를 충성되이 여겨, 그 집 사람들을 맡겨주셨다.
우리는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줘야 할 사람들이다.
먼저는 교회 안에 있는 영혼들을 잘 돌보고 섬겨야 한다.
또한 교회 바깥에서도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 결과는 이렇다.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악한 종처럼 살면 안 된다.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달리 악한 종이 아니다.
주인이 더디 올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악한 종이다.
처음부터 악한 종이 아니다.
주인이 더디 올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악한 종이 되었다.
주인이 더디 올 거라고 생각이 들면, 제 멋대로 산다.
교회 안에서 밖에서, 자기가 주인 노릇하며 산다.

-그 결과는 이렇다. 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깨어 있으라는 말은 구라질이 아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생명의 말씀이다.
깨어 있어야 산다.
깨어 있어야 내가 살고 우리 모두가 산다.
깨어 있어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