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64:믿음은 버티는 것입니다.(마 24:15-31)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7-10-22 00:00
조회
912
마태복음 강해 64믿음은 버티는 것입니다.(마 24:15-31)2017. 10. 22. 프롤로그

-올해 5월 23일 “버티기 힘들어요” 란 제목으로 네이버 지식iN에 올려진 글이다.
중학생입니다.
사실 저는 애들앞에서 많이 밝고 웃고, 뒤에서 우는 그런 아이에요.
근데 저 진짜 너무 힘드네요.
항상 드는 생각이지만.. 살고싶지 않아요.
이런 주변에서 진심이에요.
몇번이나 ‘버텨보자 힘내자’ 하는데, 결과는 정말 비참해요.
내 편은 없어요.
그냥 혼자 길을 걷는 느낌이에요.
힘들다고 말해도 “그래?”라고 해요.
친구관계도 정말 복잡해요.
진짜 자해 그런 거 많이 해봤어요.
학교는 정말 지옥이에요.
감옥에 있는거 같아요.
진짜 너무 힘들고 ‘가정에서는 괜찮을거야’ 라면서, 몇번 되새기면서 가거든요.
집에서는 행복해 웃을 수 있어, 근데 돌아오는건 비교하고 싸움 뿐이에요.
제가 아빠랑 같이 안 살다보니까, 아빠 있는 환경도 그립고, 언니 비교하고, 집에서 밤마다 울어요.
힘들어서 전 중학생 밖에 안榮쨉? 다들 절 고딩처럼 보드라구요.
너무 힘들고, 언니는 공부도 잘하지만, 저는 미술로 가는 거여서 희망이 크진 않단 말이에요.
부담감도 쌓이고, 친구관계도 갈등이 깊어지고, 가정에서도 계속 부서지고, 그냥 이런 환경에서 살고싶지않아요.
내 편이 아무도 없어요.
울고 싶어요.
근데 내 편이 아무도 없어요.
살고 싶지 않아요.

-이 글을 보면 ‘중학생만 돼도 이렇게 힘들 수 있구나’ 싶었다.
그 시기에, 삶의 짐을 잔뜩 자기 어깨에 짊어지고 사는 게 짠해 보인다.
자기 짐을 자기가 지는 게 원칙이지만, 과연 계속 버틸 수 있을까, 그 애가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다.

-올해 3월 31일 <날개>라는 블러그에 올려진 글이다.
“나는 이렇게 힘든데 너는 힘들지 않니?” 라고, 전 남친에게 물어보기에는 본인도 많이 힘들어 보이네요.
하지만 둘이 항상 같은 문제로 싸웠고, 서로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매번 실패로 돌아가서, 결국 헤어지게 됐어요.
우리 둘 다 받아 들여야 하는것이기 때문에, 각자 알아서 견뎌내고 있지만, 정말 하루하루 버티기가 힘드네요.
잠을 자지 않아도 내일은 오고, 내일은 또 회사를 나가야 하고, 계속해서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밥도 먹고 싶지 않고, 그냥 나를 내버려뒀으면 좋겠는데, 시간은 자꾸 무언가를 하라고 재촉하네요.
이별 때문에 힘들어하다가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예전에는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는 이해가 갈 것 같아요.
매일같이 극도의 스트레스를 오랫동안 받으면,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죠.
물론 저는 생을 포기하지는 않을 거지만, 정말 하루하루 버티기가 너무나도 힘드네요.
이렇게 버틴다고 해서, 그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남자 친구와 헤어진 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헤어질 때는 서로 안 맞아서 용감하게 헤어졌지만, 막상 헤어지고 나니 하루하루 버티는 게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이다.
더구나 버틴다고 남자 친구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라서, 더더욱 힘들다는 것이다.

-작년 7월 2일 203호 세입자라는 블러그에 올려진 글이다.
그럼에도 사는 것은 버티기 아니겠는가.
무엇을 버텨야할지, 그것을 버텨서 무엇이 남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없지만,나는 버티기로 승부할 생각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징징대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 힘들다 힘들다하면서 누워있는 나를 경멸하는 것도, 이젠 부질없어보인다.
그저 지금을 버텨야한다.
뭐, 니가 그렇게 무슨 걱정이 있어 버티냐고 묻는다면, 사람들 거의 모두에게 보이지 않는 짐 덩어리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쉽게 남의 인생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공부가 되든 안되든 붙잡고 있어야 하고, 돈이 벌리는 족족 나가야하는 현실이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인지 가늠이 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무너지지도 않는다.
처음 사는 인생이라지만, 지금 이거 어디서 본 것만 같다.
꼭 해본 것만 같다.
그래서 오늘도 엉덩이 꼭 붙잡고 앉아, 뭐라도 해볼 참이다.
이미 몇 번 '이게 뭐라고?', '주말인데?'에 약해졌지만, 결국 포기하지 않음으로서 지금 자리를 지켜내고 싶구나.

-그렇다. 인생은 누림과 버팀의 연속극이다.
누리는 일만 있다면 지루할 것이고, 버티는 일만 있다면 주저앉게 될 것이다.
가정생활도 교회 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커브길 하나 없고 경사길 하나 없이, 일직선으로 쭉뻗은 평탄한 길을 몇 시간 째 달려야 한다면, 운전자는 극도로 지루할 것이다.
하나님이 인생길에 커브길도 주시고, 경사길도 주신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루한 인생이 아닌, 깨어 있는 인생을 살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지루하면 죄 짓는다.
다윗이 깨어 있을 때는, 그의 눈에 하나님밖에 안 보였다.
그러나 그가 낮잠을 자고 일어난 후 지루하여 옥상을 거닐 때, 목욕하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좋은 일이 있을 때 잠깐 누리는 것이다.
우승 했을 때 잠깐 기분을 만끽하는 것이다.
그리고 평상심으로 돌아가 다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찾아오는 고난을 일부러 달려나가 영접할 필요는 없지만, 예상은 하고 대비는 해야 한다.

-주님은 제자들을 붙들고, 주의 임하심과 세상의 끝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 전에 어떤 징조가 있을지를 예고하셨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 때문에 많은 것을 누렸다.
물론 고생도 했지만, 고생에 비하면 누린 것이 더 컸다.
하루살이 인생을 살고 있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자기들이 따르던 예수님이 가장 유명한 랍비가 되었다.
덩달아 자신들도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이다.

-사람이 누릴 때가 있었으면 버틸 때가 찾아오는 법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버텨야 할 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앞으로 몇 년 내에 일어날 일과, 세상 끝날에 일어날 일이 섞어서 말씀하셨기에 분별이 필요하긴 하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에게는 전적으로 미래에 대한 말씀이지만, 우리에게는 과거에 일어난 일과 미래에 일어나게 될 일이 뒤섞여 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통해서는 교훈을 받아야 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앞에 일어날 일에 대해 미리 알아버리면 재미가 없을텐데, 또 인간이 미래를 점쳐서 아는 것을 원하시지 않을텐데, 주님이 왜 미래에 임할 일에 대해 말씀하셨을까?
주의 임하심과 세상의 끝에 임할 환난을 갑작스럽게 당하면, 버텨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리 언질을 주어, 단단히 준비하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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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머잖아 닥칠 환란에 대해 말씀하셨다.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진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경배해야할 성전이, 우상을 숭배하는 곳으로 바뀌게 될 거라는 말씀이다.
예전에도 성전이 더럽혀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B.C. 168년에 수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의 상을 세우고, 그 제단에 돼지를 제물로 바쳤었다.
예전에 있었던 일을 상기시키며, 또 다시 그런 치욕스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하셨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진 A.D. 70년 전에, 열심당원들이 성전에서 만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대제사장을 살해했다.
매일 드리는 제사를 훼방했다.
합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자기들 맘대로 대제사장을 임명했다.
그나마 형식이라도 남아 있던 성전이 무너져내린 것이다.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성전을 파괴한 후에, 성전 동편 문쪽에 로마 군기를 세우고 경의를 표하게 했다.
마치 일제 때의 신사참배가 연상시킨다.
일제의 조선 식민화정책에 가장 걸림돌이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려고, 신사참배를 하게 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숭배라며 신사참배를 거부할 것을 알고,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강제로 참배하게 했다.
그 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투옥되고 순교를 당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신사참배에 동참하고 말았다.
이게 한국교회사에 가장 큰 치욕으로 남아있고, 그 후유증으로 해방 후 교단이 분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다가오는 재난이 예루살렘만이 아닌, 유대 전체에 임할 것임을 알려주셨다. 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예수님은 다가올 재난을 예고만 하시지 않았다.
그들에게 살 길을 알려주셨다.
그 사는 길은 산으로 도망하는 거였다.

-옛부터 그들은 산을 하나님의 도움의 근원으로 생각했다.시 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들은 산을 보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생각했다.
그들은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 산을 향하여 눈을 들었다.

-그들은 산으로 피하는 것과 하나님께 피하는 것을 동일시했다. 시 11:1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그렇다고 이 말씀이 상징적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실제로 재난을 만났을 때,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산으로 도망한 자들은 살았다.
A.D. 68년 베스파시안 장군이 예루살렘을 공략했을 때, 성내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베레아 지역의 펠라 산으로 도망하여 생명을 건졌다고 한다.

-강단에서 경고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다.
좀체 싫은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아서이다.
어떤 교회는 목회자를 청빙할 때, 이런 주제의 설교는 하지 말아 달라고 한다.
이유인 즉슨 교인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좋은 말씀 들으려고 교회 왔는데, 귀에 거슬리는 소리 들으면, 기분 나빠서 다른 교회 간다는 것이다.

-강단은 좋은 말씀 전하는 곳이 아니다.
복음 곧 복된 소식 전하는 곳이다.
생명의 말씀 곧 살리는 말씀 전하는 곳이다.

-강단은 교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곳이 아니다.
교인들이 궁금해하는 정보를 제공해주는 곳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살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영원히 살 수 있는지, 그 원리를 알려주는 곳이다.

-더 나아가 강단은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건강하게 이끄는 곳이다.
그러려면 균형잡힌 식단을 제공해야 한다.
편식 시키지 않고, 영양소를 골고루 줘야 한다.
이제 말씀드리지만, 마 23, 24장을 강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건너 뛰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유혹을 스스로 이겨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살 길이 있다.
말씀대로 살면 죽는 것 같아도 안 죽는다.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목숨처럼 붙들기 바란다.

-가진 것이 재난 때에는 복이 아닐 수 있다. 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집이 있다는 것은 복이다.
집 없는 설움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살 집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복인지 모를 것이다.
집한칸 장만하는 게 평생의 소원인 사람이, 이 나라에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자녀는 또 어떤가?
자녀가 복이다.
자식으로 인해 속이 썩어 문드러질 때,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하지만, 그건 예외다.
자녀는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복이다.

-집과 자녀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흥미로운 기사를 봤다.
2011년 11월 16일 세계일보 기사다.
전·월세를 사는 여성이, 자기 집에 거주하는 여성보다 자녀를 덜 낳는 경향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이로 인해 두 집단 간 자녀 수 격차도 벌어지고 있다.
내집 마련 전까지 자녀 출산을 미루는 가정이 많다는 의미로, 주거 안정이 출산율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현택수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전세 가정이 자녀 출산을 꺼리는 가장 큰 이유는, 내집 마련 때까지 생활비라도 아끼려는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집 없이 떠도는 상황에서 자녀가 있다면, 이사 때마다 학교를 옮겨다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그런 불안정한 생활을 피하고 싶은 심리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평화로울 때, 이 땅에서 최고의 복 중에 하나인 내 집과 자녀가, 재난 때에는 복이 아닐 수 있다.
꼭 집이나 자녀만 그러겠는가?
우리의 모든 소유가 다 그럴 것이다.
소유를 죄악시해서는 안 되지만, 자칫 소유가 나를 생명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다.
그 소유 때문에 영생을 놓칠 수 있다.
언젠가는 소유와 생명 중에 택일해야 하는 날이 올 수 있다.
그 날을 위해, 작은 것을 버리는 연습, 자기를 포기하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환난의 때에 대해서도 기도하라고 하셨다. 20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겨울과 안식일은 재난 때에 취약할 수 있다.
겨울은 우기이다.
땅이 질고, 식량 문제도 있다.
안식일은 1.8Km 이상은 이동이 금지되어 있다.
그럼 안식일에 침공을 받으면, 산으로 도망할 수도 없다.
실제로 B.C. 168년 수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침공이 있던 날이 안식일이었고, 유대인들은 무방비상태로 살육을 당했다고 한다.

-안식일에 침공을 받았을 때, 안식일을 지키다가 죽어야 하는지, 아니면 적과 맞서 싸워야 하는지, 어떤 것이 옳은지 의견이 나뉠 수 있다.
예수님은 도망갈 일이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다.

-환난의 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면, 죽음의 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본다.
화창한 봄날에 죽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사실 날씨가 궂으면 장례 치르는데 불편하다.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교우들과 조객들에게 불편이 따른다.
그러므로 좋은 날씨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다.

-또한 수명을 위해 기도할 수도 있다.
모조건 오래 사는 게 복이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 수명을 위한 기도는 더욱 절실한 기도가 아닐 수 없다.
평균 수명 늘어나는 것에, 나는 솔직히 기쁘지 않다.
“좀 더 살아야 하는데” 할 때 죽어야지, “이제 안 죽나” “아직도 살아있나” 할 때까지 살면, 서로 힘들다.

-예수님은 큰 환난 중에서도 자기 백성을 보호해주신다.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환난의 규모가 보통이 아니다.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환난이다.
환난을 맞아서 살아남을 사람이 없다.
그래서 앞에서 도망하라고 하신 것이다.

-소낙비는 피하고 보라는 말씀이다.
소낙비는 하루 종일 오지 않기 때문이다.
억수같은 소낙비를 피하지 않고 맞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환난이 임할 때 피하지 않고 있다가, 예수님이 안 도와주신다고 원망할 일이 아니다.

-물론 피해있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날들을 감하시겠다고 했다.
환난과 맞딱뜨려 이길 사람도 없고, 환난을 피해 끝까지 견딜 사람도 없기에, 환난의 날들을 감하시겠다는 것이다.
세상에 환난의 날들이 감해지면, 그건 순전히 택하신 자들 덕이다.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세상이 숨을 쉬는 것이다.
지금은 세상이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욕하지만, 그 날에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자기들이 산다.
그 때 우리가 세상을 향해 큰소리칠 수 있다. “이게 다 우리 덕인 줄 아시오!”

-그 때까지 우리는 잘 버텨야 한다.
믿음은 버티는 것이다.
믿음은 버티는 능력이다.
믿음의 훈련은 버티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넉넉해서 헌금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믿는다.
십일조한 만큼 생활비가 줄어드는 게 사실이다.
그만큼 줄어든 생활비로 한 달을 버티는 것이다.
그게 십일조의 행복이다.

-환난의 날이 이르면 민심이 흉흉해진다.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유언비어도 퍼진다.
근거가 불확실한 소문들이 나돈다.
미혹하는 말들이 꼬리를 문다.
환난 때가 되면 구원자를 절실히 찾는다.
유대인들에게 구원자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다.
하루 이틀 기다려온 게 아니다.
몇 백년을 기다려 왔다.
힘들 때마다 행여나 오시려나 했다.
환난 때마다 이제는 오실 때가 되지 않았나 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이미 오신 줄도 모르고 계속 기다렸다.
그러다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전무후무한 환난 앞에, 더 절실하게 그리스도를 기다렸다.

-영화 <남한산성>>을 봤다.
병자호란에서 서로 상반된 입장의 두 충신을 그린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상주의자 예조판서와, 현실주의자 이조판서가 끝까지 자기 입장을 굽히지 않는다.
감독은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관객에게 선택하게 한다.
나는 영화를 보고 나서, 큰 숙제를 받은 느낌이 들었다.

-이조판서 최명길은 영화 후반에 이런 말을 한다.
"삶이 있은 다음에야 새 길이 있을 것이고, 오랑캐의 발밑을 기어서라도 제 나라 백성이 살아서 갈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임금만이, 비로소 백성이 마음으로 따를 수 있는 임금일 것이다."

-인조가 삼전도에 가서, 청나라의 칸에게 무릎을 꿇을 때, 이상주의자 예조판서는 눈물로 자결을 선택했고, 현실주의자 이조판서는 왕과 함께 치욕의 눈물을 흘렸다.
누구의 눈물이 더 피에 가까웠을지 모르겠다.

-<수>란 이름을 가진 블러거는, 영화 <남한산성>>을 본 소감 말미에, 이런 글을 남겼다.
“지금 우리나라는 2016년부터 사드문제로 대외적으로 시끄럽다. 중국은 사드 배치에 따른 암묵적인 중국 내 기업들의 압박을 주고 있으며, 미국은 이번에 한미 FTA 재협상을 내걸었다. 나라의 왕, 대한민국의 리더가 부디 현명한 선택을 현실주의적인 선택을 해주길 바란다.”

-영의정에게서 군사지휘권을 물려받은 예조 판서는, 칙서를 보내 지원군을 요청한다.
역사에 가정이 무의미하지만, 그 지원군의 규모가 몇 만명이니, 만약 그 지원군만 왔어도,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남한산성에서는 다들 눈이 빠지게 지원군을 기다렸다.
그들에게 지원군은 그리스도인 셈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당도한 것은 지원군이 아닌 적의 대포알이었다.

-환난 때에 사람들이 정신줄을 놓기 쉽다.
그래서 심력이 중요하다.
심력이 강하지 않으면, 믿음도 흔들릴 수 있다.

-여호수아는 믿음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를 이어 백성을 지휘해야 할 때,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 때 하나님께서 심력을 강하게 할 것을 말씀하셨다.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을 거듭 거듭 말씀하셨다. 수 1:6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심력을 강하게 하는 것이, 리더에게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환난을 앞두고 주님도 미리 말씀하셨다. 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강하고 담대하지 않으면, 환난 때에 귀가 약해진다.
그럼 흔들리게 된다.
광야로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님 골방으로 가야 하나, 흔들리게 된다.

-큰 어려움을 몇 번 겪어보면, 어지간한 어려움에는 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 삶에서 순간순간의 어려움은, 그 날을 위한 훈련이다.
어려운 순간에 그리스도가 부재한 것 같을 때가 있다.
불러도 불러도 그리스도께서 묵묵부답일 수 있다.

-사실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침묵이다.
창조 이래 가장 큰 환난 때에, 그리스도를 얼마나 애타게 부르겠는가?
그런데 유언비어만 있다.
근거도 없는 소문만 풍성하다.
거짓 그리스도는 표적과 기사로 미혹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대답은 없다.
그 때 심력이 강하지 않으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믿음과 함께 심력을 길러야 할 이유이다.
믿음이 버티는 능력이라면, 심력은 더 잘 버틸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심력과 함께 또 한 가지가 필요한데 그게 지력이다. 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지금 우리는 지식 정보시대를 살고 있다.
지식이 힘인 시대, 정보가 돈인 시대이다.
그런데 환난 때의 지식과 정보는 힘과 돈 그 이상이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다.

-주님은 재림이 어떻게 임하는지를 알려주셨다.
번개를 통하여 재림 시기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갑작스럽게, 재림 장소는 제한이 없을 것을 말씀하셨다.
모여드는 독수리를 통하여, 환난 후에 있을 재림의 임박성을 말씀하셨다.

-환난의 밤이 깊어지면, 영광의 새벽이 가까운 것이다.
지금 환난의 깊은 밤을 지내며, 눈물로 기도하고 있는가?
영광의 새벽이 머잖았음을 믿고, 조금만 더 버티기 바란다.
결국 버티는 자가 승리한다.

-버티는 자가 재림의 주님을 만날 수 있다.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최후 환난이다.
이쯤되면 주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다.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이제는 드디어 끝장났구나 하는 통곡이다.
재림주 앞에서 모든 불신자는 희망을 버려야 한다.

-그 때도 꿋꿋이 버티는 사람이 있다.
바로 믿음의 사람이다.
버틸 때 주님을 만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 빈무덤 앞에서 버텼던 마리가가,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
믿음으로 버티는 자가, 구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시는 재림 주님을 만날 수 있다.

-일상에서 믿음으로 버티는 훈련을 하자.
평상 시 말씀과 기도로 버티는 것을 훈련해 보자.
버티는 사람이 최후에 웃는다는 것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