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62:삶에는 책임이 따릅니다.(마 23:29-39)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7-10-08 00:00
조회
764
마태복음 강해 62삶에는 책임이 따릅니다.(마 23:29-39)2017. 10. 8. 프롤로그

-방관자효과(bystander effect)라는 말이 있다.
주위에 사람들이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게 되는 현상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다.
‘제노비스 신드롬(Genovese Syndrome)’이라고도 하고, ‘구경꾼 효과’라고도 한다.

-1964년 새벽 3시 30분경, 키티 제노비스(Kitty Genovess)라는 여인이, 뉴욕의 자기 집 근처에서 강도에게 30분 동안 반항하다 살해당했다.
집 주변의 40가구에서 그 소리를 들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를 구하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면, 관심을 끄려고 한다.
괜히 신경 써봤자,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무슨 신고를 하면, 오라가라 귀찮게 한다.
그러니 그냥 지나친다.
점점 타인에 대한 책임 의식이 흐려져 간다.

-어떻게든 책임을 자신이 지려고하기 보다,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고 한다.
특히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책임회피의 도사들이다.
공영방송 문제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다룬, 영화 <공범자들>>을 봤었다.
한 기자가 자신이 mbc 출신이라고 밝히면서, 차에서 내리는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물었다.
“이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김재철 전 사장이 와서 mbc를 많이 망가뜨렸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특유의 표정을 지으며...
“그건 그 사람한테 물어 봐야지.”
그리고는 황급히 발길을 돌렸다.
자기가 한 일이 떳떳하다면, 그렇게 책임을 회피하고 도망치듯 떠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의 비겁함이 보였다.

-책임 회피는 비단 위정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 대학교수가 말했다.
"대학교에 저런 형편없는 녀석들이 들어온 것은 수치야.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육이 문제야. 그 책임을 져야 해."

-그러자 중고등학교 교사가 말했다.
"나는 저런 말썽꾸러기 소년을 맡지 않았어야 했어. 초등학교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중고등학교에 보냈단 말이야."

-그 말을 듣고 초등학교 교사가 말했다.
"저런 멍청이. 왜 저따위 애를 학교에 보낸단 말인가? 유치원에서는 뭘 가르친 거야?"

-유치원 선생이라고 할 말이 없겠는가?
"저렇게 훈련받지 못한 애는 처음 봤어. 도대체 저 애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일까?"

-당연히 그 어머니도 할 말이 있었다.
"불쌍한 내 자식. 그러나 알고 보면 그 애 잘못도 아니지. 그 애비와 조상들이 모두 그 모양이었다니까.“

-참 핑계도 책임회피도 가지가지다.

-어느 엄격한 아버지가 신문을 보며, 아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빵을 집으려던 아들이 그만 실수로, 식탁에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그 우유는 아버지가 보던 신문까지 적시고 말았다.
순간 아들은 아버지의 눈치를 재빨리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아들을 매섭게 쏘아보며 말했다.
“조심하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니.”
이내 어린 아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부엌에 있던 어머니가 달려와 식탁을 닦았다.

-일주일 뒤 어느 때와 똑같은 아침 식사시간이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빵을 집으려다, 그만 팔꿈치로 우유잔을 건드렸다.
식탁은 온통 우유로 뒤범벅 됐다.
아들은 아버지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봤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아니 우유잔을 걸리적거리게 놓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겠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어린 아들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윤리 신학자인 리처드 니버는 [책임적인 자아]라는 책에서, 세 가지 유형의 인간상을 말하고 있다.

-첫째는 목적론적 윤리, 즉 목적지향적인 사람이다.
자신의 꿈과 이기적인 욕심을 이루기 위해,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웃은 타자이며 수단이다.

-둘째는 의무론적 윤리, 즉 규칙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규범을 만들어놓고, 철저히 지켜나가는, 요즘말로 지성인이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도, 손해를 보지도 않는다.
경우가 분명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서는 인간적인 매력을 찾아볼 수 없다.

-끝으로 응답적 윤리, 즉 책임적인 존재이다.
이타적이며 타인에게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다.
공동체의 괴로움은 내 괴로움이요,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사회가 잘못된 것도 내 책임이요, 이 세상이 타락한 것도 나와 무관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래서 이런 유형의 사람은 언제나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간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인 같은 사람이다.

-여러분은 세 가지 유형의 사람 중, 어떤 유형에 속하는가?
목적지향적인 사람? 규칙의 사람? 책임적인 존재?
그 중 세 번째 유형의 사람이 많아질 때, 세상은 점점 밝아지고, 하나님나라는 좀 더 가까워질 것이다.-------------------------------------------------------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에게 일곱 번째 화를 선포하셨다.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그 선하신 주님이 한 번도 아니고 일곱 번이나, 연달아서 화를 선포하신 것은 의외이다.
주님이 왜 그랬는가?
크게 보면 그들의 외식 때문이었다.
지난 주일 설교 때, “외식”으로 번역된 원어의 본래 뜻이 ‘가면을 쓰고 무대에 나와 연극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종교지도자들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가면을 쓰고 연극하듯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그들의 모습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연출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살면서 느끼는 것은, 가끔은 연출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연출도 실력이겠다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삶 전체가 연출이라면, 아예 가면을 쓴 삶인 것이다.

-우리가 예수 믿고 한 번은 깨져야 한다.
뭐가 깨져야 하는가?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이 깨져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내가 드러난다.
‘진짜 나’로 살기 전까지는 산 게 아니다.

-어느 날 시호가 학교에서 누에 에벌레를 가져왔다.
어릴 적에 동네에서 보고, 그렇게 가까이서 오랬만에 봤다.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는 것을 지켜보니 신기했고, 자기 입으로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드는 것도 신기했다.
예람이는 그 장면이 하도 신기해서 동영상을 찍기도 했다.
누에가 고치를 만들고 시간이 지나면, 그 안에서 나방이 된다.
그러나 누에고치를 뚫고 나오기 전에는, 진정한 나방이 아니다.
사실 나방의 연약한 입으로 튼튼한 누에고치를 뚫는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걸 뚫고 나와야 힘이 생겨서, 나방이 날개짓을 할 수 있다.

-누에고치 안은 편안하다.
그러나 그곳에 있으면 머잖아 죽게 된다.
우리는 살기 위해 자신을 깨야 한다.
아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깨져야 한다.
깨지는 데는 당연히 아픔이 따른다.
그러나 그 아픔이 있어야, 내가 살고 성장할 수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다들 제명에 못 살았다.
당시는 선지자들이 틀렸다.
선지자들의 외침이 듣기 싫었다.
의인들이 꼴 보기 싫었다.
의인들의 행위가 눈꼴사나웠다.
그래서 그들을 박해했고 끝내는 죽였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재평가가 된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민다.
그렇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다고 죽은 자들의 명예가 회복되겠는가마는, 후손들에게는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거 같기는 하다.

-패역한 세대에서 자기 믿음을 지키면서 사는 것도 쉽지 않다.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증인의 삶을 사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비난, 손가락질, 수근거림은 기본이고, 손해, 박해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어느 때고 전도자가 환영받았던 적이 없다.
예수님의 제자가 세상으로부터 쌍수를 들고 환대받았던 적이 없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막 1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현세에서 백 배의 보상을 약속하셨는데, “박해를 겸하여 받고” 라고 하셨다.
예쁜 포장지에 싸인 백 배의 보상이 아니다.
밤송이 같은 보상이다.
밤을 잘 삶아서 주는 것이 아닌, 밤을 알맞게 구워서 주는 것이 아닌, 밤송이 채 주는 보상이다.
겉에 드러난 뾰족뾰족한 가시만 보면, 그게 보상인 줄 모른다.
밤송이를 까는 수고는,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을 가진 자는 선구자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자는 선각자다.

-선구자의 길은 고달프다.
글루시스 대표 이사인 박성순 씨의 “선구자는 밑지고 산다”는 말에서, 선구자의 길이 고달픈 길임을 말해준다.

-선각자는 어떤가?
차미리사라는 여성 선각자의 삶을 소개하겠다.
부모가 다섯 아이를 모두 잃고 오십줄에 들어 얻게 된 아이가 딸이었기에, 그는 나서부터 '섭섭이'로 불렸다.
열일곱 나이에 결혼했지만, 3년이 채 못돼 남편과 사별한, 그가 당시 조선 여성의 비참한 처지에 눈뜨게 된 것은,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23살의 나이에 유학을 떠나, 중국과 미국에서 공부한 뒤, 34살이 된 1912년 귀국해 교육운동에 투신, 봉건적 여성 교육에서 1925년 근대적 여성 교육의 장으로 근화여자실업학교로 거듭나게 한 그는, 대다수 문맹 상태에 있던 여성들을 위한 교육을 실현했다.
60세 이던 1938년 덕성여자실업학교로 개칭, 현재 덕성여자대학의 전신을 일궈냈다.

-임종 순간 "온전한 독립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유한이로다"라며 애석해 한, 그는 독립 운동가이기도 했다.
70세이던 1948년 성명 '통일 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남북협상을 서원함'의 발표에 참여할 정도로 통일을 갈구했다.

-뒤늦게 2002년 독립 유공자로 추서된, 그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 받았다.

-뒤늦게... 그렇다.
선구자나 선각자의 가치는 뒤늦게 깨달을 때가 많다.
그래서 뒤늦게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꾸민다.

-우리는 말씀을 가진 선구자다.
당연히 고달픈 삶을 각오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선각자다.
가치를 뒤늦게 인정받을 것도 각오해야 한다.
혹 이 땅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그러면 훗날 역사가 평가해 준다.
혹 역사가 왜곡될 수도 있다.
그래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
역사의 평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가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조상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자기들 같았으면, 선지자들의 피 흘리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조상들의 영적 수준이 떨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선지자들을 몰라보고 박해하고 죽이고 했다는 것이다.
조상들의 실책은 어쩔 수 없다.
이미 지난 일이고, 그걸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후손된 자로서, 조상들의 실책에 사죄하는 마음으로,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몄다.

-조상들의 명백한 죄악까지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일본 집권자들보다는 훨씬 나아 보인다.
그들은 진정한 과거사 반성이 없다.
과거를 건너뛰고, 바로 미래로 나아가려고 한다.
분명한 것은, 과거 청산 없는 미래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비록 동기는 순수하지 않지만, 조상들의 과오를 인정한 것은 다행이다.
그럼에도 주님께 칭찬 받지는 못했다.

-자신들의 실체를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고 보셨다.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자신들이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인정했으니,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말로만 인정하고 슬쩍 넘어가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은 조상들의 잘못에 대한 책임은 피하고, 조상들의 잘못을 통해 자신들의 영적 우월성을 주장하고 있다.
사죄없는 반성수준이다.
반성도 진정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주님은 그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이 말씀을 공동번역성서로 다시 읽어보겠다.32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여라.
조상들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뜻도 있지만, 그보다는 조상들이 채우다 만 죄악의 잔을 그들에게 마저 채우라고 한 것이다.
조상들보다 의로운 척 하지 말고, 덜 채워진 조상들의 죄를 이참에 충만하게 채우라는 것이다.

-이런 도발적인 말은, 목숨을 포기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자기 목숨에 대한 미련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감히 꺼낼 수 없는 말이다.
주님은 자신의 때를 아셨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의해,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셨다.
역시 목을 걸면 힘이 있다.
목숨을 구걸할 때 비겁해진다.

-주님은 그 전에 죽을 고비를 몇 차례나 넘기셨다.
때론 그 자리를 슬며시 피하곤 했다.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때가 되지 않아서였다.
우리 역시 함부로 목숨을 걸어서는 안 된다.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어서는 안 된다.
목숨을 걸어야 할 결정적일 때가 다가오고 있다.
그 때를 위해 우리는 기도할 필요가 있다.
깨어있지 않으면, 이 땅에서 목숨을 연장하려다가, 영생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독설 수준이다.
너무 나가는 것 아니가 싶다.
듣는 이들의 귀를 의심하게 하는 표현이다.
예수님한테 이런 면이 있나 싶을 정도다.

-독사는 독을 품은 뱀이다.
그럼 독사의 새끼는 어떤가?
독사와 마찬가지로 독을 품은 뱀이다.
예수님은 조상들을 독사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새끼에 비유하셨다.
자기들은 조상들보다 의롭다고 하지만, 독사나 독사 새끼나 다를 게 뭐냐는 것이다.
조상들이 독사처럼 선지자들과 의인들의 피를 흘리게 함으로 지옥 판결을 받았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독사의 새끼인데, 조상들과 달리 지옥 판결을 피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다 조상들의 잘못이고, 나와는 우리와는 무관하다고 선을 긋는다고, 지옥 판결을 면제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생각해 왔다.
자신들이 조상들보다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해 왔다.

-그런 그들의 주장을 사람들은 믿었다.
그들이 가면을 쓰고 너무나 완벽한 연기를 하니, 다들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님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주님은 불꽃 같은 눈으로, 그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셨다.
그들의 외식을, 그들의 위선을, 그들의 가식을 놓치지 않으셨다.

-주님의 판결이 무섭다.
그들은 이미 지옥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돌이킬 기회가 아직은 있다.
자신들이 조상들에 비해 비교 우위를 논할 게 아니라, 자신들도 조상들의 잘못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면 소망이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미리 보셨다.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조상들이 범한 죄에 더 악한 죄를 더할 것을 예지하셨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과, 그 제자들을 박해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니 그들이 지옥 판결을 피할 수가 있겠는가?

-조상들이 선지자들과 의인들의 피를 흘린 것을 두고, 자신들은 그 시대에 살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 제자들을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 저 동네에서 박해했다.
“부모는 욕하면서도 닮는다”는 말이 있듯이, 그들은 조상들을 욕하면서도 닮았다.
아니 그들은 조상들보다 한 술 더 떴다.
조상들은 하나님이 보낸 종들의 피를 흘렸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흘렸다.
조상들이 모르고 죄를 행했다면, 그들은 알고도 행했다.

-참 사람 앞일을 알 수 없다.
지금 의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악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고, 지금 악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스스로 겸손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
오늘 내가 그 사람보다 믿음이 좋고 헌신도가 뛰어나다고, 훗날에도 그럴 거라고 확정할 수 없다.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역전될 수도 있다.

-주님이 괜한 말씀을 하셨겠는가?막 10: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어쩌다 한 두 사람 있을 것이다”가 아니라, “많으니라” 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 몇 명씩 있을 것이다.
분명히 나보다 먼저 출발했는데, 지금은 나보다 뒤쳐져 있는 사람이 있고, 분명히 나보다 나중 출발했는데, 지금은 나보다 앞서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피값이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하셨다.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창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남을 피 흘리게 해놓고 자기는 잘 될 줄 안다면, 하나님도 성경도 모른 것이다.
죽임 당한 사람의 핏소리가 하나님께 호소한다.
억울한 사람의 피맺힌 절규가 하나님께 호소한다.
남을 잘 되게 하면 나도 잘 된다.
남을 잘못 되게 하면 나도 잘될 수 없다.

-아벨 사건과 상반되는 말씀이 있다.행 9: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알 수 있다.
결국 그 사람이 잘 살았는지는, 지금 살아 있을 때는 모른다.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어렵다.
그 사람이 죽고 나서야,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모든 걸 독차지 했다.
하나님까지도 독차지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나님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우상이라면 가능했지만, 살아계신 하나님 인격적인 분에게는 어림없다.
하나님이 그의 악행을 보고 기억해 두셨다.
하나님이 직접 드러내셨다. “삶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도르가는 자기 것을 나눴다.
축적하기 보다는 나눴고, 치부하기 보다는 나눴다.
자기의 은사를 자기의 재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과 나눴다.
그리고 조용히 죽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선행을 보고 기억해 두셨다.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드러내셨다. “삶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탄식하셨다.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예수님의 격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얼마 있지 않으면, 이방에 인정사정없이 짓밟힐 예루살렘을 생각하니, 주님의 마음이 무척 착잡했다.
머지않아 완전히 황폐하게 될 예루살렘을 떠올리니, 주님의 마음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주님은 종교지도자들을 향해서는 화를 선포하셨지만, 무지한 예루살렘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몇 번이나 자기 백성을 모으려고 하셨다.
하지만 무지한 백성들은 원하지 않았다.

-무지가 죄다는 말이 있다.
백성들이 무지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말에 귀를 열었다.
반면 선지자들, 의로운 자들의 목소리에는, 귀를 틀어막았다.
그래서 망하는 것이다.
귀 막은 사람치고, 흥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막은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흥할 수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 소음에 세상 잡음에 귀를 막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면, 틀림없이 사는 길이 열린다.
주님은 말씀을 붙든 자를 붙들어주신다.
말씀을 붙들고 몸부림치는 자를, 보란 듯이 붙들어주신다.

-주님은 최종 이별을 암시하는 말씀을 하셨다.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시편 118:26을 인용하신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말씀을 인용하셨다.
말씀으로 기도하셨고, 말씀을 놓지 않으신 것이다.
이 말씀이 21장에서는 예루살렘에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신 예수님을, 본문 39절에서는 재림 시 심판주로 오실 예수님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님은 마지막 때 심판주로 오신다.
오셔서 삶에 따른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착하고 충성되게 살았으면,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칭찬받게 될 것이다.

-악하고 게으르게 살았으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삶에는 책임이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