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59:논쟁은 별로 유익이 없습니다.(마 22:23-46)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7-09-17 00:00
조회
747
마태복음 강해 59논쟁은 별로 유익이 없습니다.(마 22:23-46)2017. 9. 17. 프롤로그

-<흐름을 넘어서>라는 블러그명을 가진 사람의 글이다.

-좁은 길을 걸어가던 중, 헤라클레스가 사과처럼 생긴 것이 땅위에 뒹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부수려고 그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순간 그것은 아까보다 몇 배나 커졌다.
헤라클레스는 약이 올라서, 그것을 더욱 세게 밟고, 또 몽둥이로 내리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것은 더욱 커졌고, 마침내 길을 꽉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그제야 헤라클레스는 몽둥이를 내던지고, 놀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자리에 아테네가 나타났다.
“그만하면 됐어요 . 이것은 싸움과 말다툼의 정신이지요. 도발하지 않는 한, 그것은 처음 모양으로 있지요. 그러나 더불어 싸우면 그건 한없이 불어나요.”

-십중팔구 논쟁은 논쟁하는 당사자가,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을, 전보다 더 굳게 확신을 한 채 끝난다.
당신은 논쟁에서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이 진다면 지는 것이고, 이겨도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고?

-그럼 당신이 논쟁의 상대방을 이겨서, 허점투성이인 그의 주장을 묵사발을 만든다고 가정해 보자.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당신은 기분이 좋을지 모르지만 그는 어떤가?
당신은 그가 열등감을 느끼게 만들었고,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그는 당신의 승리에 분개할 것이다.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논쟁을 피하는 것이다.
당신은 방울뱀을 피하듯이 논쟁을 피하라.

-논쟁에 대한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논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모든 논쟁이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논쟁의 성격상, 처음엔 명분 있는 토론으로 시작하였다가, 결론 없는 언쟁으로 끝날 수 있다.

-지엽적인 논쟁이 얼마나 불필요한 것인가를 말해주는, 역사적인 실례가 있다.
과거 제정 러시아가 망할 때, 러시아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서 격렬한 신학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논쟁의 주제가 재미있다.
성직자의 옷단을 붉은색으로 할 것인가 황금색으로 할 것인가가 주제였다.
그들은 이 주제로 열흘 낮과 밤을 두고 논쟁을 벌였으나, 끝내 결론을 얻지 못했다.

-바로 그 시간에 여섯 명의 볼셰비키 운동가들이, 지하실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초안하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혁명을 일으켜 소련을 휘어잡은 다음, 당시 러시아를 주름잡고 있던 모든 기독교 지도자들을 잡아 처형하고 말았다.

-진리 논쟁은 필요하다.
본질 논쟁이라면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실생활에서 그 정도의 논쟁거리는 거의 없다.
대개 우리는 사소한 일로 논쟁한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상관없는 일로 논쟁한다.
소모적인 논쟁에 우리의 에너지를 소모하곤 한다.
오죽 했으면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라>는 책이 나왔을까?

-허구연 씨는 야구해설에 있어 대부 같은 존재다.
환갑을 훌쩍 넘긴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는 서재를 두 개 갖고 있다.
집에 있는 서재에는 전공이 법학이니까 법학 서적도 있고, 미술, 음악 관련 교양 서적들이 진열되어 있다.
주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무실 서재에는, 거의 대부분이 미국, 일본 야구 스포츠 관련 서적들이 채우고 있다.

-그런데 그가 유독 가까이에 두고 보는 책이 있다.
리처드 칼슨의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라>는 책이다.
모든 세상이 그렇지만, 야구계도 서로의 이해관계라든지 첨예한 대립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고, 또 중계방송도 아무리 객관적으로 한다고 해도 말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그가 가장 편하게 보는 책이,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라>는 책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가끔씩 보면서, 인내도 하고 '이타행 : 남을 위해 이로운 일을 하라' 라는 문구도 마음에 새기고, 화내지 않고 스트레스 받지 않고 마인드 컨트롤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 입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에 두고 보는 책 중에 하나입니다.”

-또한 그는 그 책을 야구 선수들에게 즐겨 선물하기도 한다.
야구는 보기와는 달리 매우 예민한 운동이라고 한다.
사소한 문제에 따라 경기력이 크게 좌우될 때가 많다고 한다.
사소한 것을 얼마나 잘 털어버리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건 운동선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고집 센 사람 하나와 똑똑한 사람 하나가 있었다.
둘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논쟁의 이유인 즉, 고집 센 사람은 4x7=27이라 주장하고, 똑똑한 사람은 4x7=28이라 주장했다.
이 논쟁이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답답한 나머지 똑똑한 사람이 고을 원님께 가자고 말하였고, 그 둘은 원님께 찾아가 시비를 가려줄 것을 요청했다.

-고을 원님이 한심스런 표정으로 둘을 쳐다본 뒤, 고집 센 사람에게 말했다.
"네가 4x7=27이라고 말했느냐?"
"네,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말했는데, 글쎄 이놈이 28이라고 우기지 뭡니까?"
그 말을 듣고 고을 원님은 이렇게 판결했다.
"27이라 답한 놈은 풀어주고, 28이라 답한 놈은 곤장 열 대를 쳐라!“
고집 센 사람은 똑똑한 사람을 놀리며 그 자리를 떠났고, 똑똑한 사람은 억울하게 곤장을 맞아야 했다.

-똑똑한 사람은 곤장을 맞으면서, 원님께 억울하다고 하소연했다.
그러자 원님의 대답은 이랬다.
"4x7=27이라고 우기는 그런 놈이랑 싸운, 네놈이 더 어리석은 놈이다. 내 너를 매우 쳐서 지혜를 깨치게 하려 한다.“
그 똑똑한 사람은 똑똑하기는 했지만 지혜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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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은, 앞에서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과 일치했다.
질문은 달랐지만 질문한 의도는 같았다.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 목적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앞서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이 찾아와, 세금 문제를 질문할 때 지혜롭게 답하셨다.
본래 바리새인들은 로마에 세금 납부를 반대했고, 헤롯 당원들은 찬성했다.
납세 반대파와 납세 찬성파가 함께 예수님을 찾아, 세금 납부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을 물은 것이다.

-예수님은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에, 단순하면서도 지혜롭게 답하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은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그들은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지도 못하고, 도리어 놀라움만 가득 안고 떠나갔다.

-한 고비 넘겼는가 싶었는데, 또 다른 고비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세금 문제로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했는데 실패하자,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한테 나아왔다.
예수님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공공의 적으로 여겨졌다.
그저 이 세상 보이는 것에 대한 관심뿐이었던 그들에게,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나라는 낯설기만 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예수님을 용납하면 자신들을 부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 둘레를 태양, 행성, 달이 공전한다는 천동설을 주장해온 사람이, 그와 정반대인 지동설을 용납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양심있는 종교지도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니고데모는 그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바리새인, 헤롯당원, 사두개인 등, 각자가 주장하는 바는 다르고 대립되기도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예수님에 대한 입장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을 공공의 적으로 여겼다.

-사두개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바리새파와 가까웠다.
부활을 말하기 때문이다.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사두개인들이 부활문제로 예수님과 논쟁하여 이기면, 예수님께 대한 승리를 넘어, 바리새인들에 대한 승리까지 쟁취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기세 좋게 부활을 주제로 논쟁을 걸었다.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28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형식은 질문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실상 논쟁을 건 것이다.
보면 다소 현실성은 떨어진 얘기다.
있을만한 것을 가지고 질문을 해야 하는데, 너무 논리적인 비약을 하고 있다.
어떻게든 부활을 믿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공격하고자 한 것이다.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우는 것은 율법에 있다. 신 25: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사두개인들은 이 율법과 부활문제를 연계하였다.
자신들의 주장을 위해 율법을 적당히 이용한 셈이다.
율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지키라고 주신 말씀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상해 보이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꼭 필요한 말씀이었다.
그 말씀은 논쟁거리가 아닌 순종해야 할 말씀이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논쟁거리로 이용했다.
논쟁을 통해 말씀이신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했다.

-말씀은 생명이다.
말씀은 자신을 살린다.
더 나아가 말씀은 타인을 살린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타인을 죽이는데 쓰고 있다.

-사실 사두개인들은 한 여자가 일곱 번 결혼하여, 부활 때에 누구 아내가 되는가에 관심이 없다.
부활 자체를 안 믿기 때문이다.
부활도 안 믿는 사람들이, 그 이후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럼에도 그들은 오직 예수님을 곤란에 빠뜨리려는 목적을 위해, 자신들의 신앙을 포장하고 있다.

-뻔히 그들의 시커먼 속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이지만, 목소리를 높이기보다 조용히 설명을 하셨다.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한 마디로 그들이 오해했다는 것이다.
논쟁이 오해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모든 다툼은 오해에서 시작된다.
오해란 이해의 부족이다.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한데서 오해가 생긴다.
오해는 잘못 들음에서 생긴다.
잘 듣기만 했어도 오해가 없었다.
오해는 짐작과 추측에서 생긴다.
자기 직감을 믿고, 지레짐작하고, 나름대로 추측하면, 오해 안 생기는 게 이상하다.

-아빠가 보기에 애가 늘 늦게 들어오는 거 같다.
그래서 언성을 높여 “너는 왜 허구한 날 늦게 들어오나?”
애도 지지 않고 “내가 언제 늦게 들어온다고 그래.”
“야, 너 거의 늦게 들어왔잖아?”
“월요일은 이런 사정으로, 화요일은 저런 사정으로, 수요일은 그런 사정으로, 목요일은 일찍 들어왔고, 오늘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늦었는데...”

-막상 들어보면 다 사정이 있다.
그쯤 되면 언성 높인 사람이 머쓱해진다.
나도 살면서 목소리 높여서, 이문 얻은 적 없었던 거 같다.
그럼에도 가끔씩 목소리가 올라가곤 한다.

-요즘에는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올라갈 기미를 보이면, 예람이가 브레이크를 건다.
“아빠 화내지 말고 말해.”
“야, 내가 무슨 화를 냈다고 그래...”
“아니, 아까 화난 목소리였어...”
나는 화를 내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그렇게 느낀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그럼 할 수 없다.
잠시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수밖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다.
사두개인들이 자신들이 성경에 대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그토록 무지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처럼 용감하게 부활에 대한 논쟁을 걸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배움에 목마른 사람은, 논쟁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실력을 통하여, 상대방을 꺾어보겠다는 승부근성에서 논쟁이 생긴다.

-보면 꼭 싸움닭 같은 사람들이 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일단 싸우고 보겠다는듯이 달려든다.
그런 사람은 멀리해야 한다.
괜히 그와 논쟁에 말려들었다간, 자칫 낭패를 보게 된다.

-논쟁은 피하고 봐야 한다.
논쟁의 내용이 말씀일지라도, 신앙적인 내용일지라도, 영적인 내용일지라도 그렇다.
이단을 제외하고는 논쟁을 피해야 한다.
이단과 논쟁하는 것도, 어쩌면 피하는 게 나을 수 있다.
논쟁해서 이겨봤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긴다고 그들이 무릎 꿇고 항복하지 않는다.
자기보다 더 센 사람 데려온다.
이단에 대해 알고는 있되, 이단 붙들고 논쟁하는 것은, 시간 낭비에 가깝다.
그걸 진리 수호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할 필요 없다.
자기 일 바빠 봐라... 그럴 시간 있는가?

-자기가 믿는 방식만 옳다고 여길 때, 논쟁이 일어날 수 있다.
신앙에도 나름 색깔이 있다.
자기와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신앙 색깔이, 어느 정도는 맞아야 한다.
너무 다르면 서로 힘들다.

-지난 여름휴가 때, 문경에 있는 <잉카마야박물관>에 다녀왔었다.
폐교가 박물관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그런데 보니 박물관 안에 교회가 있었다.
그래서 궁금하여 물었다.
“지역 교회에 나가지 않으세요?”
그러자 “처음에 나갔는데, 도저히 나하고 맞지 않아서, 자체 예배를 드리고 있어요. 이곳에 오기 전에 용인에 있는 지구촌교회를 다녔는데, 이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가보니, 꼭 계모임하는 거 같았어요. 그래서 할 수없이 자체적으로 예배를 드려요.”

-집이 띄엄띄엄 있는 문경의 농촌교회와, 용인의 지구촌교회를 비교하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된다.
우리나라에 몇 만개의 교회가 있지만, 그중에 지구촌교회와 비견될만한 교회가, 과연 몇 개나 있겠는가?
농촌에 와서 지구촌교회를 찾으면, 영원히 못 찾는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왜 교회에 등록하면 새가족안내를 하는가?
그가 설령 다른 교회를 다니다 왔어도, 새가족 안내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 교회 왔으면 그 교회식으로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꿈교회에 와서 두꿈교회식으로 믿으려고 하면 안 된다.
한꿈교회 식구가 됐으면 한꿈교회식으로 믿어야 한다.
한꿈교회 담임목사와 같은말 같은마음 같은뜻이 돼야 한다.
한꿈교회에 출석하면서, 이전 두꿈교회에서는 이렇게 했는데, 그전 세꿈교회에서는 저렇게 했는데 하면 안 된다.

-논쟁하면 교회가 힘 빠진다.
교회가 힘을 모아야 영적 전투를 치를 수 있다.
그런데 자체 논쟁하다 힘을 빼버리면, 정작 영적 전투에서 힘을 쓰지 못한다.
마귀는 그걸 노린다.
그래서 하나 되지 못하게 한다.
교우들끼리 서로 분리하고 분쟁하게 만든다.
그럼 아군 적군 구별이 모호해진다.
우리의 대적이 마귀라는 것을 순간 잊게 만든다.
그러니까 논쟁은 적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인 셈이다.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다.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어떤 사람이 성령의 사람인가?
하나 되게 하는 사람이다.
분리하고 나누고 쪼개고 찢는 사람은,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도 성령의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예수님과 사두개인들 간의 부활 논쟁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특히 바리새인들의 관심은 더 깊었다.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숙적이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헤롯당원들과 공동 작전을 펴서, 세금 문제로 예수님을 공격했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을 때, 사두개인들은 쾌재를 불렀다.
사두개인들은 자신 있게 부활 카드를 꺼내, 예수님을 공격했으나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자신들의 성경에 대한 무지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무지만 드러내고 말았다.

-그것을 지켜보던 바리새인들 역시 쾌재를 불렀다.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재미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바리새인들은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무식한 사두개인들 같으니라고...” 속이 다 후련했다.
이번에는 바리새인들 중, 보다 전문성을 가진 율법사가 나섰다.
율법사는 율법을 필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율법에 대해 능통한 율법 박사들이다.
율법학교에서 율법을 전공한 사람들이다.

-이에 반해 예수님은 율법학교 근처에도 못 가봤다.
정식 학교에서 율법을 배운 적이 없다.
그러니 이번에도 쉽지 않은 싸움이다.

-율법사는 정중하게 물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그러나 정중한 겉모습과는 달리, 속으로는 예수님을 시험했다.
‘내가 좀 배운 사람인데...’ 하는 거만함이 깔려 있다.
사람이 배웠을수록 겸손해야 한다.
좀 안다고 가르치려들고, 공부 좀 했다고 가방끈 자랑하면, 내색은 하지 않아도 속으론 싫어한다.
겸손하고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사람은 모두가 좋아한다.
하나님도 인격적인 분이기에, 그런 사람을 좋아하실 거 같다.

-논쟁과 무관한 사람이 있다.
겸손하고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다.

-율법에 대해 능통했던 율법사들은, 예수님을 한 수 아래로 여기며 물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사실 이런 질문이 답하기 어렵다.
학자들에 따르면 율법에 613개의 계명이 있다고 한다.
“하지 말라~”는 부정형 계명이 365개이고, “하라~”는 긍정형 계명이 248개라는 것이다.
이 613개 중에 10가지는 말할 수 있다.
이 10가지가 십계명이다.
십계명에서 613가지가 나왔다.
문제는 십계명에서 가장 큰 계명을 뽑는 것이다.
제1계명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제 10계명이라고 하기도 그렇다.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셨는가?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십계명을 둘로 요약하셨다.
누가 봐도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유대인들은 누구나 쉐마를 알고 있다.
어려서부터 쉐마를 배우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쉐마의 앞부분이 이렇다. 신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크고 첫째 되는 계명과 일치한다.
예수님이 나름대로 요약 정리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쉐마에 없는 내용도 말씀하셨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님이 단순히 쉐마를 앵무새처럼 읊으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둘째에 대해 명백하게 밝히셨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이웃 사랑을, 순서상 하나님 사랑에 이은 둘째라고 하셨지만, 그건 경중의 문제가 아니다.
서로 연결된 것이다.
하나님 사랑이 이웃사랑으로 나타나야 하고, 이웃사랑은 하나님 사랑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물었다.
예수님이 잘못 답을 하셨다면, 논쟁을 걸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너무나 완벽한 답을 듣고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의 권위는 다분히 실력에서 나왔다.
그들은 예수님의 빼어난 율법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답에 더 이상 논쟁을 걸지 못했다.

-우리도 실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
세상에서 실력이 형편없다는 말을 들으면 안 된다.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실력이 뒤처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종교가 달라도 인정해 줄 수밖에 없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
그래서 논쟁을 없애야 한다.
할 수만 있으면, 논쟁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아야 한다.
실력으로 논쟁을 잠재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최선을 다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쉬운데, 그보다 최선을 다해 최고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께 예배할 때도 최선을 다해 최고를, 생업 활동을 할 때도 최선을 다해 최고를, 학교에서 공부할 때도 최선을 다해 최고를 추구해야 한다.

-예수님의 대답에 바리새인들은 아무 말을 못했고, 이번에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물으셨다. 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예수님이 질문한 내용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그건 너무 뻔한 질문이다.
애들도 다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다.
바리새인들은 너무나 뻔한 질문이지만 대답을 했다.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는 듯이, 그것에 문제 제기를 하셨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는데, 어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지금까지 누구도 그렇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니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 주위에 모여 있는 바리새인들은, 그래도 한 실력 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과 논쟁하려고 찾아온 사람들인데, 보통 실력자들이겠는가?
그럼에도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고, 더 이상 질문도 하지 못했다.

-문제는 그 후이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했는가?
그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맞습니다. 우리를 거둬주십시오” 했는가?
그랬을 것 같지 않다.

-논쟁은 별로 유익이 없다.
논쟁은 전도에 별로 유익이 없다.
논쟁은 신앙생활에 별로 유익이 없다.
논쟁은 가정생활에도 별로 유익이 없다.
논쟁은 직장생활에도 학교생활에도 별로 유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