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57: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마 22:1-14)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7-09-03 00:00
조회
1161
마태복음 강해 57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마 22:1-14)2017. 9. 3. 프롤로그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을 원하신다.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구원받는 사람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더 많다.
우리나라 인구가 5천만이 조금 넘는데, 그리스도인의 수는 600만명, 좀 늘려 잡아서 800만명 정도다.
600만~800만명도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전체 인구로 볼 때, 600만이면 12%이고, 800만이면 16%에 지나지 않다.
600만~800만명도, 다 구원받는다는 보장은 없다.
실제로 구원받는 숫자는 상당히 줄 수 있다.

-구원은 은혜로 받는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결코 무엇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우리의 반응 곧 믿음으로 받는다.

-알렉산더 우턴이라는 전도자가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물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우턴은 “너무 늦었습니다” 하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구원을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당신은 구원을 위해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믿음은 단순한 것이다.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를 믿는데 무슨 단서가 붙지 않는다.
최소 몇 년은 믿어야 한다는 단서 조항이 없다.
어느 정도 깊이 믿어야 한다는 단서 조항 역시 없다.
얼마만큼 잘 믿어야 한다는 단서 조항도 붙지 않는다.
그냥 믿으면 된다.
참되게 믿으면 된다.
거짓 없는 믿음이면 된다.

-그렇다고 대충 믿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믿음에 있어 대충은 없기 때문이다.
취미생활은 대충 할 수 있다.
나는 취미생활이 운동이다.
축구와 탁구를 하는데, 각각 동호회에 소속되어 있다.
월 회비를 내고, 회원으로서 활동을 한다.
할 수만 있으면, 정기 모임 시간에 빠지지 않고 나간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기쁨으로 참석한다.
몸이 웬만큼 나쁘지 않은 상태에서는 참석하려고 힘쓴다.
장거리 운전을 하고 새벽에 도착하면, 2-3시간 자고도 운동하러 갈 때도 있다.

-하물며 신앙생활을 그것에 대겠는가?
주일예배 드리는 것을 취미생활 하는 것에 비하겠는가?
예수 믿는다는 말은, 예수만 믿는다는 말이다.
오직 예수인 것이다.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이게 너무나 당연함에도 실생활에서 쉽지 않다.
그게 쉽다면 주님이 좁은 문 얘기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앙생활의 기본이 주일성수와 십일조이다.
주일성수와 십일조가 기본인 것은, 소유권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주일성수는 시간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고, 십일조는 물질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시간 전부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신앙고백으로서 주일성수하는 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물질 전부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신앙고백으로서 십일조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청지기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신앙생활의 기본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교회에 다니는 것과 신앙생활하는 것은 다를 수 있다.
교회에 나오지만 신앙은 없을 수 있다.
교회에 몇 년을 다녀도, 정회원이 아닌 준회원, 그것도 아니면 게스트 수준에 머무를 수 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경계인으로 사는 것이다.
경계인은 결정적일 때, 어느 쪽에서도 받아주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신앙의 입문은 어렵지 않다.
입문을 하고 나면,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
달리 좁은 길이 아니다.
그 동안에는 내가 주인이었기 때문에, 내 뜻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인이 바뀌면, 내 뜻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뜻을 따르고, 내 뜻을 예수님의 뜻에다 맞춰야 한다.
대신 예수 믿는 순간부터, 그분이 나를 영원토록 책임져 주신다.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
그럼에도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왔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순교의 피가, 삼천리 반도강산을 적셨다.
지금은 민족 역사상 가장 긴 평화와 번영의 시기다.
예수 믿는데 외부적인 박해는 거의 없다.
그러나 갈수록 조금씩 크고 작은 제약이 따를 거 같다.
그러다 핍박과 박해가 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마 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이 예수님과 그 직후 시대만 해당될 거로 보지 않는다.
우리 시대에 예수 믿는다고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때, 과연 끝까지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지금 확실하게 믿어도, 그 때 돌아서는 사람이 있을텐데, 지금 시원찮게 믿으면 그 때는 불을 보듯 뻔하다.
신앙은 견디는 것이다.
견디되 끝까지 견뎌야 한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의 최종 관문을 통과한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자신만 구원받으면 끝인가?
이 한 몸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가족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는, 무관심해도 전혀 상관없는가? 딤후 4: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어떤 한 사람이 무덤가를 지나가다가 서서, 묘비를 보았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소!”

-그 사람은 픽하고 웃으며 두 번째 줄을 읽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그렇게 웃고 있었소!”

-그러자 이 사람이 뭔가 진지해져서 세 번째 줄을 읽었다.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나 하시오!”

-우리는 언젠가 죽음 앞에 서야 한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 엄숙히 서야할 때가 온다.
이건 예외가 없다.
죽음의 사자는 누구도 가리지 않는다.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남다르다.

-성 프랜시스는 임종할 때, 너무 기뻐서 크게 찬송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고 한 수도사가 말했다.
“선생님! 지금 창밖에 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 시간이 조금 더 엄숙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때 프랜시스가 말했다.
“주책을 떨어 미안하네. 주님 만날 생각을 하니까, 너무 기뻐서 그랬네.”

-하지만 미처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은 기겁을 한다.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 한 세기를 풍미한 한 지성인이 폐수종으로 입원했다.
그는 한 달 동안 문병 온 사람들에게, 고통스런 표정으로 미친 듯이 고함을 쳤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 자기 병명이 무엇인지 곁에 선 아내에게도 묻지 못했다.
그가 바로 ‘자유’란 주제로 수많은 글을 쓰고, “죽는 문제에서도 자유를 찾으라”고 외친 실존주의 철학자 '싸르트르'이다.

-결국 그는 1980년 4월 16일 입원한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프랑스 신문들이 글을 썼다.
“왜 싸르트르가 그렇게 수치스럽게 죽었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 외쳤던 그의 말로가, 왜 이렇게 비참했을까?”

-그리고 신문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임종 때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내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구나!”

-싸르트르는 하나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자였다.
그런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 있을 리 만무하다.
죽기 전에는 호기롭게 “죽는 문제에서도 자유를 찾으라”고 외쳤지만, 막상 자기에게 죽음의 문제가 닥쳤을 때, 그는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우리가 해야 할 죽을 준비 중에, 너무나 중요한 것이 있다.
다른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이다.
그 일은 한 순간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오는데, 수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암 캐리는, 인도에서 힌두교인 한 명을 전도해서 세례를 주는데 7년이 걸렸다고 한다.
서아프리카에서는 한 명을 전도하는데 14년이 걸렸다고 한다.
뉴질랜드에서는 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데 9년이 걸렸다고 한다.
또한 인도에 Ongole 선교회라는 기관이 있었는데, 15년 동안 10명밖에 구원을 시키지 못해 문을 닫으려고 하다가, 좀 더 기다린 결과 30년 후에는 15,000명을 전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영국의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는 죠지 뮬러에게,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한 기도 제목이 있었다.
그것은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삶을 나누었던, 다섯 명의 친구들을 구원시켜 달라는 기도였다.

-죠지 뮬러는 다섯 명의 친구를 위해서 계속 기도했다.
한 사람, 두 사람 믿기 시작했다.
그런데 끝까지 믿지 않는 친구가 두 사람이 있었다.
죠지 뮬러는 이 두 친구를 위해서, 무려 52년 간 기도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
죠지 뮬러는 이제 노년이 되어서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워 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어느 날 죠지 뮬러는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을 했다.
"오늘은 내가 사랑하는 교회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십시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간절하게 최후의 설교를 했다.
마지막 설교를 하던 그 날, 그의 한 친구가 거기에 참석했다가, 뮬러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 후 죠지 뮬러가 세상을 떠났다.
그때까지 믿지 않았던 한 친구가, 뮬러의 죽음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죠지 물러가 자기를 위해서, 52년간이나 기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죠지 뮬러가 죽은 그 해, 이 친구는 결국 예수를 믿게 되었다.

-예수를 믿은 후, 그는 전 영국을 순회하면서 간증했다.
”죠지 뮬러의 기도는 다 응답되었습니다. 저는 그 기도의 최후 응답입니다. 당신의 모든 기도도 다 응답됩니다.-영혼 구원을 위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
가족 구원을 위한 눈물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
전도대상자를 위한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
혹 시간이 걸릴 수는 있다.
아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혹시 이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면 구원의 열매가 맺힌다.

-가장 좋은 교회는 전도하는 교회다.
가장 필요한 교회는 전도하는 교회다.
가장 자랑할 만한 교회는 전도하는 교회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는, 역사와 함께 사라지고, 전통과 함께 묻힐 교회다.

-영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꼭 찾고 싶어 하는 곳이 있다.
바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다.
사람들이 이 교회를 방문할 때, 그들을 인도해주던 안내자가 있었다.
이 안내자는 사원에 대한 역사적인 내력과, 그리고 무덤에 묻혀 있는 지나간 세기의 찬란한 영웅들의 삶의 내용을 설명했다.
또 현재 그 교회가 어떤 프로그램을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가를 장황하게 설명해주었다.

-설명이 끝난 후에, 안내자는 방문객들을 향해서 “혹시 질문이 있어요?” 라고 물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안내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께서 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관한 여러 가지 내용과 내력에 관해서, 훌륭한 설명을 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한 가지만 질문하겠습니다. 최근에 이 사원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프로선수도 최근 성적이 중요하다.
전에 성적이 좋았어도, 최근 성적이 나쁘면 소용없다.
교회도 최근의 모습이 중요하다.
최근에 교회가 예배를 어떻게 드리고, 전도를 얼마나 하는지가 중요하다.
개인적으로도 최근의 상태가 중요하다.
최근에 내 영혼이 어떤 상태인지, 내 믿음이 어떤 상태인지가 중요하다.
그걸 매 주일예배 때마다, 말씀 앞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은, 살얼음을 걷는 것처럼 긴장이 된다.
예수님이 시편 118:22 이하의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을, 자신들에게 적용했을 때, 종교지도자들은 발끈했다.
하지만 무리가 무서워, 실제로 예수님을 잡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긴장감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이 또 하나의 비유를 들었다.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비유의 내용은,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 이야기다.
임금 곧 왕이니 며느리를 고르는데 애를 썼을 것이다.
자기 아들이 자기를 이어서 왕이 되면, 며느리가 왕비 곧 국모가 된다.
한 집안의 결혼식도 큰일인데, 왕세자의 결혼식이니, 국가적 경축행사다.
혼인 잔치의 규모도 엄청났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혼인 잔치를 준비했을 것이다.
드디어 결혼식 당일이 되었고,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래서 임금은 종들을 보냈다.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왕세자 결혼식이니, 아무나 올 수 없다.
결혼식 날짜가 정해지면, 미리 청첩장을 보낸다.
그래서 초청을 받은 사람만 당일에 올 수 있었다.
종들이 청첩장을 가져가면, 그것을 받은 사람은 참석 여부를 사전에 말해줘야 한다.
자리가 정해져 있어서다.
요즘 결혼식이야 자리가 있어도 앉지 않고 서 있고, 혹 축의금 전달만 하고 먼저 밥 먹으러 가곤 하지만, 왕세자 결혼식이 그럴 수는 없다.
신분사회였던 당시엔 좌석 지정제였을 것이다.
그러니 청첩장을 받을 때, 참석 여부를 알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결혼식 하루 전에 다시 종이 확인한다.
“내일이 왕세자 혼인잔치가 있습니다. 오셔서 축하해 주세요.” 하고 알린다.
그런데 청첩장을 받았던 사람들이 오기를 싫어한 것이다.
이런 황당한 경우가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세자 결혼식이다.
전에 청첩장 받을 때, 분명히 참석하겠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별다른 이유 없이 오기를 싫어하니 말이 되는가?

-종들은 어쩔 수 없어 돌아섰다.
임금에게 그 걸 사실대로 알려야 했다.
임금은 그 소식을 듣고는 무척 기분이 상했지만, 오늘은 좋은 날이다.
이 좋은 날 잔치에 재 뿌릴 수 없어, 이를 악물고 참기로 했다.

-그래서 다른 종을 보냈다.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역시 예전에 청했던 사람들이다.
좀 더 구체적인 초청을 하고 있다.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아주 정중하게 주인의 뜻을 전달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들은 자기들을 찾아온 종들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갔다.
다른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갔다.
남의 밭도 아니고 자기 밭인데, 뭐 가볼 수 있다.
사업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오래 전 약속이다.
당장에 불러도 사양하지 않고 가야할 자리이다.

-물론 임금도 봐줄 수 있는 상황은 있다.
아내가 출산을 한다거나, 가족 중에 누가 위독하거나, 아님 집안에 초상이라도 났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누가 봐도, 오래 전 약속을 깨고, 자기 밭으로, 자기 사업하러 가는 것은, 임금에 대한 무례한 행위다.

-그런데 더 고약한 일이 일어났다.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그 남은 자들이 종들을 못되게 대한 것이다.
잡아 모욕을 주기도 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했다.
이건 정말 임금을 향해, 어디 한 번 해 보자는 것이다.
자신들이 무엇을 믿고 그러는지, 자신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고 하는지 모르겠다.

-종이 그냥 종이 아니다.
종은 임금이 보낸 대사인 셈이다.
종을 그렇게 대한 것은, 곧 그 종을 보낸 임금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다.
왕세자의 혼인잔치에 참석하겠다고 약속을 해놓고도, 밭에 간다 사업에 간다는 핑계를 대며, 참석하지 않는 것도 큰 무례다.
그런데 그 남은 자들의 행위는, 임금의 노를 폭발시키고 말았다.

-임금도 참을 만큼 참았다.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임금도 좋은 날이니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참는 것도 한도가 있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한 것이다.
임금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결국 군대를 보냈다.
그 군대는 출동하여 임금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까지 불살라버렸다.
그들은 심판의 불을 자초한 것이다.

-비유에서 임금은 하나님이시다.
자기 아들은 예수님이시다.
종들은 선지자들, 전도자들이다.
하나님이 천국잔치를 베푸셨다.
그리고 선민인 유대인들을 부르셨다.
그러나 그들은 관심 없어 했다.
심지어 하나님이 보낸 종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다.

-하나님도 참을 만큼 참으셨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유대인들은 심판을 받았다.
군대로 무장한 로마의 심판을 받았고, 예루살렘은 불사름을 당했다.

-임금은 고민하다 결단을 내렸다.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초청하여 오라고 했다.
본래 이들은 초청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청한 사람들이 오지 않음으로 기회를 얻은 것이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던 게 아니다.
가는 곳마다 회당을 찾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자,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돌렸다.

-우리는 본래 이방인으로서, 네거리 길에서 만나 혼인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한사코 거절함으로, 우리에게까지 구원의 기회가 온 것이다.

-종들은 주인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그들도 주인 아들의 혼인 잔치를 보고 싶었을 것이다.
여태껏 준비하느라 고생했으니, 느긋하게 잔치를 즐기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청함 받았던 자들이, 별다른 이유없이 참석하지 않음으로, 안 해도 될 고생을 했다.
같은 동료였던 종들 중에 모욕을 당했고, 몇은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종들은 주인의 말을 따랐다.
길에 나가 만나는 대로 데려와, 잔치 자리를 채웠다.

-재미있는 표현이 있는데, “악한 자나 선한 자나”이다.
애초에 선한 자들을 초청했을 것이다.
특히 이름 있는 자들을 초청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리가 채워지지 않자, 초청 범위를 확대했다.
당일 네거리 길에서, 누구든지 만나는 대로 초청했다.
그래서 자리가 채워졌다.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비로소 잔뜩 굳어 있던 임금의 얼굴이 펴졌다.
웃음도 되찾았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던 중에 문제가 생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발견된 것이다.
궁중에서 벌어진 잔치에 참여한 사람에게는, 예복이 주어졌던 모양이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길에서 만나 당일 초청을 받은 사람에게도, 궁중에 도착해서는 예복으로 갈아입게 했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혹시 모를 왕의 신변보호를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임금이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이 사람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왕을 시해하기 위해, 혹은 왕세자를 시해할 목적으로 숨어든 자객으로, 충분히 의심받을 수 있다.

-그는 즉석에서 체포되었다.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분명히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초청받았다.
그 사람이 체포되어 심판을 받은 것이, 악한 자여서가 아니라, 예복을 입지 않은 자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도 예복을 입었다면, 혼인 잔치에 참석할 수 있었다.

-구원은 인간의 선악에 달려있지 않다.
그가 선한 자여서 구원을 받고, 그가 악한 자여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예복, 곧 의의 옷을 입지 않아서이다.
의의 옷은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진 성도의 옷이다.
누구도 자기 옷 입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
자기 선행의 옷, 자기 도덕의 옷, 자기 윤리의 옷 입고 있다가는, 천국 문앞에서 쫓겨남을 당한다.
자기 옷을 벗고 그리스도께서 입혀주신 의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

-주님은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맺었다.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유대인 모두 구원의 청함을 받았지만, 구원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었다.
유대인들이 소수만 구원에 이를 것을 말씀하셨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의 소수만 예수를 믿는다.

-지금도 14절 말씀은 유효하다.
주님은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 의하면, 모든 민족이 청함을 받은 것이다.
이 말씀에 순종하여 선교사들이 구원의 초청장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초청장을 받고, 다 예수 믿는 것은 아니다.
구원으로 택함을 입은 자는 적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포기할 수 없다.

-임금이 보낸 종들처럼, 우리는 구원의 초청장을 전해야 한다.
모욕을 당해도, 죽임을 당해도, 우리는 그 일을 해야 한다.
우리의 임금되신 예수님이, “이제 자리 다 찼으니 그만하려무나.” 할 때까지.
우리를 천국으로 부르시며, “그 동안 수고 많았다. 이제 푹 쉬려무나.” 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