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2017):십자가 위에서의 세 번째 말씀(요 19:25-27)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7-04-11 00:00
조회
778
종려주일(2017)십자가 위에서의 세 번째 말씀(요 19:25-27)2017. 4. 9. 프롤로그

-우리는 매년 종려주일마다,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일곱 마디 말씀을 차례로 살펴보고 있다.
십자가 위에서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십자가 위에서 두 번째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오늘은 세 번째 하신 말씀을 살펴보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세 번째 하신 말씀은, 다분히 개인적인 유언 같아 보인다.
어머니에게 하신 말씀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향하여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주신 말씀은 무엇인가?“보라 네 어머니라”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개인적인 유언을 하셨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 말엔 분명히 다른 어떤 뜻이 담겨있을 거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어떤 뜻으로 그 말씀을 하셨을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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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세 번째 말씀을 하시기 전의 상황을 함께 살펴보자.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지금 십자가 곁에는, 예수님을 낳아준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이렇게 네 사람이 서 있다.
그럼 이들이 어떻게 십자가 곁에 있게 되었을까?

-누가복음을 참조하는 게 좋겠다.눅 23: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23: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가실 때, 두 무리가 나온다.
첫 번째 무리는 백성이다.

-이 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무엇인가? 눅 23:48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그들은 십자가를 구경하러 나왔던 것이다.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것을 구경하려고 골고다까지 따라온 것이다.
그런데 그들 중의 대부분은, 예수님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예수님께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벳새다 광야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자들이고, 그곳에서 오병이어 급식 기적을 보았던 자들이고, 그 기적의 수혜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실 때에, 환호성을 질렀던 사람들이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크게 외치던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십자가를 지고 힘겹게 골고다 언덕을 오르고 계시는 주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그저 구경꾼일 뿐이었다.

-그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다.
여러분은 그 이유가 무엇일 것 같은가?
그들이 예수님께 가졌던 기대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커다란 기대를 품었다.
그들은 예수님께 떡을 얻어먹으면서 엄청난 기대를 걸었다.

-그 게 요한복음에 잘 나온다.요 6: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여기서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란 곧 메시야를 말한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메시야의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또 그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추대하려고까지 했다.
메시야가 영적인 주림을 해결해 줄 분이라면, 임금은 육적인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자기들 앞에 선 예수님이, 이 둘을 단번에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특별히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이 로마의 압제 아래 있음을 감안할 때, 예수님이 모세처럼 자신들을 해방시켜주실 것으로 믿었을 게다.
다윗처럼 모든 대적을 몰아내고, 위대한 제국을 건설할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전격적으로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고, 지금 형장으로 끌려가고 있다.
그러니까 자기들의 기대를 저버린 예수님이 미워진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전에 예수님께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잊어버렸다.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쏟았던 애정마저도 잊어버렸다.
떡 얻어먹은 것, 병 고침받은 것, 귀신에서 놓임 받은 것, 그 어느 것 하나 기억하지 않았다.

-물론 예수님과 친분이 전혀 없었다면, 골고다까지 따라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래도 자기들의 아픔과 애환을 함께 느껴준 예수님의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지켜봐주는 것이, 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객관적으로 볼 때, 그들은 구경꾼에 불과했다.
속마음은 어떠했는지 몰라도, 십자가를 지고 가다 넘어지면 여지없이 채찍이 가해지고, 또 일어나서 몇 발자국 가다가 또 쓰러지고, 이번에 군화발에 짓이겨지고, 다시 일어나서 몇 걸음 걸어가다가 또 쓰러지는 예수님을, 그저 구경하는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또 다른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이다.
그녀들은 앞의 백성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골고다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그녀들은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통을 자기 가슴으로 당하고 있다.
십자가에 짓눌리는 고통을, 채찍에 맞아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아픔을, 자신들의 가슴으로 겪고 있다.
그녀들은 정말 심장이 멎을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숨쉬기조차 힘들어, 가슴을 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슬피 울었다.
보는 이들을 애처롭게 할 만큼 슬피 울었다.
그녀들의 울음소리가 예수님의 귀에까지 들렸나보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와 중에서도 그녀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눅 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많은 백성들이 구경하며 걸어가던 길을, 왜 이 여인들은 가슴을 치지 않고는 따라갈 수 없었을까?
많은 백성들이 그냥 따라갈 수 있었던 길을, 이 여인들은 어찌하여 슬피 울며 따라갔을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분은 그 이유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여인들은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면서 그 길을 따라갔던 것이다.
예수님의 일을 남의 일로 여겼었다면, 그 여인들도 백성들과 다를 바 없이 한낱 구경꾼의 자리에 머무르고 말았을 것이다.

-십자가형이 집행될 때는, 누구도 죄수에게 가까이 할 수 없도록, 군인들이 통제했을 것이다.
그 여인들 역시 그랬을 것이다.
여자라고 봐주는 법은 없었을 것이다. 눅 23:49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그러니까 그들은 멀리 서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양손과 발에 못을 박는 망치소리를 들을 때,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못질이 다 끝나고 십자가가 세워졌을 때, 발가벗겨진 채 매달려있는 예수님을, 그들이 과연 눈 뜨고 볼 수 있었을까?
그들은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너무나 충격적인 광경 앞에, 몸이 굳어버렸을 것이다.

-십자가 곁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한 사람씩 흩어져 돌아갔다.
병사들은 십자가에 달린 자들이 어서 죽기만을 바라고, 심심풀이로 예수님의 옷을 두고 제비뽑기를 하고 있었다.

-이 때 그 여인들이 십자가에 매달려있는 예수님 곁에 갔다.
아마 이 무렵엔 병사들이 외부인의 접근을 통제하지 않았나 보다.
그녀들은 겁도 없이 피비린내가 나는 곳으로 갔다.
그렇게 해서 그녀들은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곳에 있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것을...
혼절했다 다시 깨고 혼절했다 다시 깨기를 반복하는 것을...
숨을 한번 쉬기 위해 죽을힘을 다 쓰는 모습을...
그녀들은 십자가 아래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들을 그곳에 붙잡아 둔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 무엇이 그녀들로 하여금 골고다 언덕을 내려가지 못하고, 십자가 주위를 맴돌며 슬피 울게 만들었을까?
도대체 그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그 연약한 여인들을 그토록 강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죽음보다 강한 그 사랑이, 그 여인들을 십자가 아래 머물게 한 것이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뭘 어떻게 하셨길래, 그녀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사랑했을까?
어머니 마리아는 논외로 치고, 이모도 그렇다고 쳐도, 글로바의 아내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그렇게 사랑한 이유가 무엇일까?
성경에 글로바의 아내는 본문 외에 나오지 않는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그녀는 과거에 일곱 귀신에 들려서,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하였으나,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 주심으로 온전하게 된 여자이다.
그녀는 예수님 때문에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럼 우리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보다 은혜를 적게 받은 사람들인가?
우리가 받은 은혜는 그녀가 받은 것에 비해 질이 낮은가?
그래도 그녀는 일곱 귀신들렸다가 고침받지 않았냐고?
그럼 여러분은 예수 믿기 전까지 마귀에게 사로잡혀 종노릇하던 자들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 전까지는, 진노의 자식들이었고, 어둠의 자녀들이었지 않는가?
예수님을 내 맘에 모시기 전까지는, 약속에 대해 외인이요, 그리스도 밖에 거하던 자들이지 않았는가?
도무지 소망이라고는 찾아보려고 해도 찾아볼 수 없는, 죄와 허물로 인해 죽은 자들 아니었는가?

-그런 우리가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우리는 영생을 선물로 받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우리는 하늘나라를 상속받게 되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인가?

-우리가 막달라 마리아보다, 주님을 덜 사랑해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사실 그녀보다 더 큰 은혜를 입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을 치유해주고 인간답게 살게 해주신 것에, 그토록 감격하며 평생을 헌신했다면,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구해주신 그 거룩한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는가?
그분 앞에서, 우리가 무슨 내 생명을 주장할 수 있으며, 내 소유를 주장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그분께 우리 생명의 통치권과, 우리 소유의 통치권을 위임해야 하지 않을까?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내 생명이든 내 소유든, 그분께 드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누구나 떡을 나누는 벳새다 들녘에는,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
병든 자가 고침 받는 기적의 현장에는, 아무나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말씀을 풀어 설명해주는 자리에는, 다들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자기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필요를 따라 예수님 주위를 기웃거렸던 사람은 늘 많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필요로 할 때, 그분 곁에 있어줄 사람은 많지 않다.
호언장담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설사 죽는 한이 있어도 나는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이 가장 외롭고 고독한 순간을 맞이하셨을 때, 주님 곁에는 극히 소수뿐이었다.

-지금도 예수님 때문에 덕 볼 때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할 때는, 언제나 소수만 남는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덕 보려고 하는 다수에 속하는 것 같은가?
고난 받으려고 하는 소수에 속하는 것 같은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는, 주님을 끝까지 따라갈 수 없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고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 살 수 없다.
주님을 사랑하자.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자.
주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자.
그럴 때 우리가 주님의 필요에 반응할 수 있는 제자로 살 수 있다.
그래야 그리스도가 가신 고난의 길을 기쁨으로 따라갈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개인적인 말씀을 하셨다.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도 자신과 친밀한 교제를 하는 성도에게 말씀하신다.
자신의 속마음을 보여주신다.
성령님을 통해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신다.
성경을 묵상하는 중에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 계시되어 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나게 해준다.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십자가를 바라보면 느낄 수 있다.
아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여러분 앞에 있는 십자가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보이기를 바란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키신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느끼는 종려주일이 되기 바란다.

-예수님은 저 멀리서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통곡하는 여인들을 내내 지켜보고 계셨다.
자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로마 군병들의 눈치를 살피며 십자가 아래로 오고 있는 여인들을 주목하고 계셨다.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운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예수님은 가시관에 긁혀 난 피와, 작렬하는 태양으로 인해 흘러내리는 땀방울과,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로 인해,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마리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물론 예수님이 인류의 구세주이지만, 육신적으로 치면 그래도 아들인데, 그녀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마리아에게 임한 그 아픔은, 이미 예고된 아픔이긴 하다. 눅 2: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현재의 마리아의 아픔을, 이보다 잘 표현하기도 힘들 것이다.
마리아의 마음은 칼에 찔리는 듯한 고통을 겪고 있다.
만약 여러분이 마리아라면 어떠했겠는가?
스스로 몸을 지탱할 수나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마리아는 잘 버티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녀의 의지가 다른 사람에 비해서 특별히 강해서일까?
아니면 그녀가 아주 냉혹해서일까?

-주의 사자를 통해 주신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말씀이 그녀의 가녀린 몸을 지탱해 주었던 것이다.
만약에 그녀가 이 말씀을 잊고 있다면, 지금쯤은 아마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예수님보다 먼저 세상을 떴을지도 모른다.

-여러분이 힘들 때, 여러분을 지탱해주는 것이 무엇인가?
말씀 아닌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말씀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기를 기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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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예수님이 육신의 어머니에게 하신 말씀을 살펴보겠다. 19: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에게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예수님은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여자여”라고 호칭했다.
예수님이 육신의 모친에게 아들로서, 마지막으로 부르는 호칭치고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그렇잖아도 슬픔에 겨워있는 그녀에게 예수님이 “여자여” 라고 하지 않고, 만약에 “어머니”라고 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보면 납득이 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더 이상 슬픔의 자리로 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상한 심령을 헤아리는 주님을 볼 수 있다.
그분은 공생애 기간 내내 상처받은 영혼들을 치유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지고 신음하는 자들을, 열린 가슴으로 초대하셨다.
그랬기에 예수님의 주위에는, 항상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주님은 몸에서 피가 빠져나감으로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뜨거운 태양열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져가며, 숨 한 번 쉬는 것이 죽기보다 더 힘든 고통 중에서도, 상처입은 영혼으로 울고 계시는 어머니 마리아를 배려하고 있다.
그 주님의 사랑이 오늘 우리에게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
그 주님의 사랑이 오늘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우리가 그분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을 갖추어서 받았다고 생각하지 말자.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받을 조건을 가졌기에 받았다고 여기지 말자.
그건 주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십자가의 사랑 아래로 나아가기 바란다.
아직도 예수를 모르는 가족들을, 아직도 예수믿기를 거부하는 이웃들을, 이 십자가의 사랑 아래로 인도하고픈 마음이, 이 시간 우리에게 가득하기를 바란다.

-예수님이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호칭한데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예수님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탄생하셨지만, 지금은 마리아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인류의 죄를 담당한 구세주로서, 십자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신 것이다.

-가정은 중요하다.
부모님의 뜻 또한 중요하다.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그분들의 의사를 존중해드려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나라가 더 중요하다.
하늘 아버지의 뜻이 더 중요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슬피 우는 육신의 어머니를 뒤로 하시고, 십자가를 지셨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우리는 가정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가정을 건강하게 세우는데 시간을 내야 한다.
가정은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기관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오는 가정의 분쟁을, 각오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가 찾아오는 분쟁을,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작은 천국이어야 할 가정을, 마귀가 교묘히 이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가정이 우선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선이다.
우리에게는 가정이 목적이 될 수 없다.
우리에겐 하나의 목적만 있는데, 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사람들이 어떤 가정을 꿈꿀까?
물론 행복한 가정일 것이다.
넉넉하고 풍성한 가정일 것이다.
또 모든 식구들이 건강한 가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정이 우리가 꿈꾸는 가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주인되는 가정을 꿈꿔야 한다.
우리 교회 모든 가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인됨을 인정하는 가정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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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요한에게 하신 말씀을 살펴보겠다.19: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요한에게 마리아를 “네 어머니”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요한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요한은 누구보다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제자다.
그러나 그 역시도 베드로와 다를 바 없었다.
요한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자임에 틀림없다. 마 26: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그런데 요한이 어떻게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일까?
그가 다른 제자들보다 빨리 회개한 까닭이다.
그도 똑같이 실패했지만, 가장 먼저 회개하고 골고다 언덕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 숨어있는 자리에서 생각했을 것이다.
‘그 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데, 내가 이렇게 하고 있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나는 예수님한테 가야한다.’
그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뛰어왔다.
그런데 이미 몇몇 여인들이 와 있다.
그는 예수님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만 떨구고 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때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보라 네 어머니라”
이건 전혀 뜻밖의 말씀이다.
제 살겠다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 같지도 않은 제자에게, 예수님은 책망대신에, 꾸지람 대신에,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셨다.
요한에게 어머니의 생계를 부탁하려고 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요한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이 실패자로 남아있길 원하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아셨다.
요한도 실패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자신에게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았던 요한조차 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 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사람도,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다.
얼마든지 넘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실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실패를 뒤로하고, 골고다 언덕으로 뛰어올라와, 그분 앞에 서는 것이 중요하다.
그분 앞에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새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은 지금 어떤 자리에 서 있는가?
혹시 주님과의 관계에서 실패하고 있지 않는가?
주님을 향해 뜨겁던 사랑이, 근래에 와서는 차갑게 식어 있지 않는가?
신앙생활의 활력을 잃어버린 채, 겨우 주일날 교회 나오는 정도는 아닌가?
기도는 하지만 중언부언할 때가 많고, 말씀은 듣지만 여전히 공허한 가슴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가?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 앞에, 다시 서기 바란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기 바란다.
십자가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하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마음을 열고 듣기 바란다.

-주님은 실패한 요한을 용납해 주시듯 우리를 용납해 주신다.
우리가 그분 앞에 서기만 하면, 과거를 묻지 않고 용납해 주신다.
주님은 우리를 용납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회복시켜 주기를 원하신다.
문제는 우리가 그분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피 묻은 그의 손을 붙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소유인 사람을 일컫는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을 말한다.
여러분은 백성들처럼 구경꾼으로 따르고 있는가?
여인들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따르고 있는가?
여러분은 자신의 필요를 위해 따르고 있는가?
예수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따르고 있는가?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상처입은 자를 위로하셨다.
그 주님은 이 순간에도 상처입은 우리를 위로하길 원하신다.

-예수님은 실패한 요한을 회복시키셨다.
그 주님은 실패한 우리를 회복시켜 주길 원하신다.
단 조건이 있다.
그분께 나아가는 것이다.
십자가 아래로 나아가기 바란다.
거기서 우리를 향해 내민 주님의 피 묻은 손을 붙잡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