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42:주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입니다.(마 15:29-39)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7-03-26 00:00
조회
1074
마태복음 강해 42주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입니다.(마 15:29-39)2017. 3. 26. 프롤로그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 피도 눈물도 없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가 나온다.
그 사람은 재판에서 빚을 갚지 못한 사람에게, 계약대로 “심장 부근의 살점을 1파운드만큼 베게 해주세요.” 했다.
재판을 맡은 판사는 “그렇게 하세요.”라고 판결했다.
다들 어리둥절해 하고, 심지어 그 유대인마저 당황할 때, 판사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대신 살점에 피가 섞여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판사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를 향해 훈시를 했다.
“긍휼의 성격은 부자연스럽지 않고, 하늘의 단비처럼 떨어지는 것이다. 아래로 떨어진 긍휼은 두 배로 복된 것이다. 베푸는 자에게 복되며, 받는 자에게 복된 것이다. 긍휼은 최고의 권력자에게 가장 강력한 것이고, 번쩍이는 왕관보다 옥좌에 앉은 왕에게 더 어울리는 것이다. 긍휼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이다. 긍휼로 정의를 누그러뜨릴 때, 현세의 권력은 하나님 권세에 가장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게 셰익스피어가 긍휼을 잃어버린 사회에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그 오래 전 셰익스피어의 말이 공감이 가는 이유는 뭘까?
이 사회가 그만큼 타인에게 무정하고, 이웃에게 무관심해서일 것이다.

-2016년 10월 21일자 국민일보에 서울신대 강병오 교수의 <사회적 죽임과 긍휼>이란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짧지 않지만 좀 인용을 해보겠다.

-우리 사회는 최근 일련의 사회적 죽임을 목도했다.
가정, 학교, 불특정 대상, 국가 폭력으로 편만해진 죽임이다.
개인의 죽음도 슬프지만, 사회적 죽임은 더욱 슬프고 고통스럽다.
‘사회적 죽임’ 신드롬은 한순간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 전반에 지속적으로 스며들어서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공포와 불안을 가중시킨다.
사회적 죽임의 현장에서는 사랑, 배려, 용서, 긍휼 등 따뜻한 사회적 가치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 5월 17일, 한 20대 여성이 서울 강남역 인근의 건물 화장실에서 흉기에 찔려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10월 14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살인혐의로 기소된 30대 김모 씨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가해자의 범행을 사회공동체 전체에 대한 범행으로 규정해 중형을 내렸다.
이 경우 가해자의 살인은 단순히 개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건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묻지마’ 살해인 사회적 죽임이라고 본 것이다.
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가해자가 단 한 번도 피해자의 명복을 빌었다거나, 유족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해자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예의조차도 거부했다.
생명 경시 현상의 민낯이 여실히 드러난 긍휼 없는 자의 모습이다.

-지난해 11월 14일 민중총궐기 집회 때, 경찰의 폭력적 진압으로 물대포에 맞아 중태에 빠졌던 백남기 농민이, 9월 25일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 선한 얼굴을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고인의 죽음 역시 국가폭력에 의한 사회적 죽임이라 할 수 있다.
법원과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미 경찰이 저지른 잘못으로 명백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병원 측은 고인의 사인을 놓고 외인사가 아닌 병사란 엉뚱한 결론을 내렸다.
고인의 죽음에 대해서 지금껏 정부 책임자 어느 누구도 경찰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일은 정부가 진상을 솔직하게 밝히기는커녕 사과 한마디조차 없고, 단 한 차례도 조문하지 않는 비정한 모습을 보였다.
국가폭력으로 인한 죽음 앞에서, 국가는 긍휼히 여기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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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의 긍(矜)은 괴로워한다는 뜻이 있고, 휼(恤)은 마음에 피가 통한다는 뜻이다.
마음으로 괴로워 견딜 수 없어 행동하고 마는 것이다.

-[그 청년 바보의사]에 나오는 일화 한 토막이다.
흉부외과 인턴 때 일이다.
밤 11시가 넘었는데 주치의 선생님으로부터 삐삐 호출이 왔다.
착한 선배 주치의는 나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까마득한 후배인 내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 송구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분이다.

-게다가 쓸데없는 잡일을 시키는 일도 거의 없다.
‘무슨 일이지? 새로운 환자가 왔나?’ 얼른 전화를 드렸다.
“아, 인턴 선생님, 부탁이 있는데요. 미안하지만 의국에서 사발면 하나만 뜨거운 물 부어서 응급실로 갖고 내려올래요?”

-이건 웬 뚱딴지 같은 오더일까...?
어안이 벙벙해서 이유를 물었다.
만취상태로 누군가에게 얻어맞아 기흉이 생겨 입원한 새로운 환자가 있는데, 환자병력을 청취하다 보니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쫄쫄 굶은 데다 마땅한 보호자도 없더라는 것이다.
딱한 사정을 들은 우리 착한 주치의 선생님. 가만있지 못 하시고 내게 사발면 한 그릇 처방을 내리신 것이다.

-그런데 의국에 있는 사발면은 작은 컵라면뿐이었다.
우선 물을 붓지 않고 응급실로 들고 내려갔다.
응급실 간호사에게 사정을 말하고, 마침 응급실에 있던 큰 사발면과 맞바꾸는 데 성공했다.

-이제 뜨거운 물만 부어 환자에게 갖다 주면, ‘착한 그 주치의에 착한 그 인턴’, 뭐 이런 구도가 되는 것였다.
그런데 속에서 이런 생각이 꼼지락댔다.
‘이왕이면 찬밥이라도 한 그릇 얹어 주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결국 나는 지하 1층 직원식당 문을 두드렸다.

-‘자정이 다 된 시간에 멀쩡한 의사선생이 웬 찬밥 타령인가’ 하고, 의아해하던 식당 아주머니는 이야기를 듣더니 참 안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필 밥이 다 떡어졌는데 이를 어쩌나?”
“할 수 없죠. 고맙습니다.”
나는 큰 사발면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에 만족하고 돌아섰다.
“선생님, 잠깐 기다리세요!”
잠시 후 식당 아주머니가 내놓으신 것은, 식판에 담긴 죽 한 그릇이었다.

-아주머니는 내친 김에 김치와 한두 가지 반찬을 얹어주셨다.
‘오, 이런! 이 식판을 들고 지하 1층에서 2층 응급실까지 들고 가야한단 말인가?’
식판을 들고 식당을 나섰다.
식당에서 응급실까지 길이 그렇게 멀어 보인 적도 없었다. ‘술 취해서 얻어맞고 입원한 환자에게 밤 12시 넘어 의사가 직접 식판을 들고 가서 주린 배를 채워 줄 이유가 뭘까? 이미 큰 사발면 하나로도 충분히 친절한 의사일 텐데...’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왔다.
‘야, 그래도 얼마나 배가 고프겠니? 그리고 사발면 먹다 보면 양도 부족할 거고, 밥이랑 김치랑 당연히 생각나지. 창피해도 좀 참아봐.’
결국 응급실로 식판을 들고 들어갔다.

-신기해하는 환자와 간호사들을 뒤로 하고, 술 취한 환자 앞에 식판을 갖다 주었다.
사발면에 뜨거운 물까지 부어 옆에 놔준 건 물론이다.
며칠 후, 수중에 돈이 없었던 그 환자는 치료를 받다 말고, 병원을 몰래 빠져나갔다.
그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그때 그 환자에게 전해준 사발면과 죽 한 그릇이, 그에게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길 바란다.

-냄새 중에 가장 좋은 냄새가 어떤 냄새인가?
샤갈 향수 냄새? 강단에 올려진 꽃 긴기하난 냄새?
인간냄새이다.
위선 가식이 왜 나오는가?
인간 냄새를 감추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또 한 사람의 부끄러운 전직 대통령을 갖게 되었다.
그가 국회로부터 탄핵소추를 당하여 헌재의 심리를 받는 내내, 생각나는 사람이 노무현이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는 본인의 말대로 대통령으로서 성공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문득 생각날 때가 있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한 방송국의 설특집 아침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역대 대통령과 달랐던 점은 진솔함 곧 인간 냄새였다.
상고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어려운 시절의 이야기를 하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 후에도 자기와 정치 인생을 함께한 사람들 얘기를 하면서, 종종 눈물을 보이곤 했다.
대통령으로 포장된 노무현이 아닌, 인간 노무현을 보여준 것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진정한 프로는 프로 냄새를 풍기지 않고, 인간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나 역시 목사 류현철과 인간 류현철 사이에 서 있다.
어쩔 수 없이 그 간격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간격을 좁혀보려고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한계가 있다.
나도 한 때는 목사로서 프로 냄새를 풍겨보려고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인간 냄새나는 목사가 되고 싶다.
설교도 신학적이고 교리적이고 지적인 설교보다, 사람냄새를 풍기는 그런 설교를 하고 싶다.

-어떤 분이 사정이 생겨 다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난 후, ‘이곳 성도들은 교회에 올 때 모두 방패를 가지고 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목사님은 옳은 이야기, 성도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성도들의 마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도들이 두른 방패에 맞아 튕겨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는 것이다.
설교자로서 씁쓸하게 들린다.
우리교회 교우들 이야기가 아니면 좋겠다.

-사실 옳은 이야기가 사람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자꾸 옳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옳은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 보니 자기 안에 긍휼이 사라진다.
긍휼만 사라지는가? 자기 곁에서 사람이 사라진다.
긍휼이 없는 사람 곁에 있으면 부담스럽다.
판단을 받는 것 같아서다.
꼭 심문대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예수님은 간혹 분노하기도 책망하기도 했다.
그분의 말씀은 엄정하셨으나 냉정하지 않았다.
그분의 말씀에 따뜻함이 느껴졌다.
주님이 긍휼의 심장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전 코카콜라 사장 로버트 우드러프의 혈관 속에 코카콜라가 흐른다면, 예수님의 혈관 속에는 긍휼이 흐르고 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혈액형이 C형이라고 했다.
여기서 C는 연민, 동정심, 긍휼을 뜻하는 영어 compassion의 첫 글자이다.

-오늘 우리가 만나볼 분이 긍휼의 예수님이다. 2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예수님이 시돈과 두로 지방에서 믿음 좋은 여자를 만나셨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믿음이 큰 것을 확인하고는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우리는 소원에 관심이 있지만, 예수님은 믿음에 관심이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만 확인하신다.
그럼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그에 따른 결과로 따라온다.

-예수님은 이방 지역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예수님이 그 여인 때문에 특별히 가신 것이다.
예수님이 그 여인을 긍휼히 여기셔서 일부러 그곳에 다녀오신 것이다.
아직 예수님은 이방 지역에 머물고 계신다.
그곳에서 큰 무리를 고쳐주셨고 이어서 4천명의 급식 이적을 행하셨다.

-가나안 여인의 말을 듣고는 예수님이 너무 마음이 아프셨던 모양이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사실 그렇지 않겠는가?
부스러기 은혜라도 받고 싶어 하는 이방인들을 보며 예수님 안에 긍휼이 불붙었다.

-그 때 큰 무리가 다가왔다.30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메시야를 기다리는 유대인들도 아닌 이방인들이라면, 성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았겠는가?
다리 저는 사람, 장애인, 맹인, 말 못하는 사람, 등 각색 질병 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예수님은 긍휼에 차서 그들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의 발 앞에 앉은 모든 이들을 고쳐 주셨다.

-예수님의 발 앞에 누구나 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부스러기라도 먹겠다는 은혜에 목마른 자들이 앉을 수 있다.
‘내가 누군데... 차라리 안 먹으면 안 먹지, 어떻게 부스러기를....’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 발 앞에 앉아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의 기적은 예수님의 긍휼과 나의 믿음의 합작품이다.
그 때의 믿음은 몸으로 보이는 간절함이요 절실함이다.
행동으로 드러나는 사모함과 적극성이다.

-“나는 예수 믿어도 예수님께 아쉬운 소리 같은 건 안 하겠다.”는 사람에게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 믿는 것은, 사람한테 아쉬운 소리하지 않고 예수님께 하겠다는 결단이다.
사람은 아쉬운 소리를 듣고 다 들어주지 못한다.
설령 마음은 있어도 들어줄 능력이 없어서 못 들어주기도 하다.

-사람은 아쉬운 소리하러 몇 번 찾아가면 귀찮아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
천 번을 만 번을 찾아가도, 밤이고 낮이고 심야고 새벽이고 간에, 시도 때도 없이 찾아가도 귀찮아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안 찾아와서 서운해 하신다.
도리어 더 찾아오지 않은 것에 안타까워하신다.

-예수님을 찾은 사람에게는 역사가 일어난다.31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이게 복음의 능력이다.
오늘도 이런 복음의 절대적 능력이, 우리 안에서 교회 안에서 나타나야 한다.
우리에게는 이게 기적이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기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는 일상에 속한다.

-기적이 일상인 교회가 초대교회였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사도행전에 보면 기적 행전이다.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부가 아니라 복음의 능력이다.

-교황 이노센트 4세가 금과 은 그릇을 만지며 미소를 띤 채,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어.” 했다.
그 말은 곁에서 듣고 있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말씀의 능력도 사라졌습니다.”라고 했다.
경제적 불황으로 교회 재정이 주는 것은 걱정하지만, 교회에서 복음의 능력이 사라져 가는 것은 걱정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
자기가 기도 많이 해서 된 줄 안다.
자기 믿음이 좋아서 그렇게 된 줄 안다.
그러면 이방인보다 못한 것이다.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하나님이 민감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는 것이다. 행 12: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정말이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구체적 행위가 감사이다.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라.
표현되지 않는 감사는 감사가 아니다.
마음에만 담고 있지 말고, 말로 표현하고 헌금으로도 표현하라.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감사를 표현하지 않으면 모른다.
부부 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그렇다.
목회자와 교우들 간에도 서로 감사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서로를 향해 감사를 표현하는 공동체는 행복해진다.

-사람 사는 것이 별 건가?
신앙생활하는 것이 별다른 건가?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돌리고, 이래저래 감사를 표현하며 사는 것 아닌가?
이방 땅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지는 장면에, 예수님도 흐뭇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예배 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도망하는 현대인들이 있는 데 말이다.
우리교회는 오후예배가 없다.
대신 오전예배가 다른 교회에 비해 긴 편이다.
처음 우리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12시 조금 넘으면 중간에 도망간다.
예배가 12시쯤 끝날 줄 알고, 예배 후에 약속을 잡아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예배를 1시간 동안 드려야 하는가?
아님 조금 더 인심 써서 1시간 10분이면 충분한가?
예배 끝나면 후련한가?
충분히 은혜를 받은 거 같고, 영의 양식으로 포만감을 느끼는가?
그럼 예배 잘 드린 것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예배의 자리에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주님과 더 오래 있고 싶어서 발걸음을 쉽게 옮기지 못한다.
그 사람이 행복한 예배자이다.

-32절에 나온 무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은 지 3시간이 아닌 사흘이었다.
장소가 시설이 좋은 실내체육관도 아니다.
광야이다.
광야에서 예수님과 사흘이나 함께 있었던 것이다.
말씀에서 풍기는 것을 보면, 영의 양식을 육의 양식보다 우선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살 수도 없다.
육체를 입고 있는 한 밥을 먹어야 산다.
주님도 육체를 입고 있다.
끼니때가 돌아오면 배꼽시계가 신호를 보내온다.
무리는 듣고만 있어도 배고픈데, 예수님은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신다.
말씀 사역에 치유 사역을 겸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 자신보다 무리들 생각을 하셨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이게 예수님의 마음이었다.
예수님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는 긍휼의 피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된 삶을 살아온 이방인들이, 자신을 만나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배고픈 줄도 모르고, 은혜의 자리에 있는 그들을 향해 긍휼을 베푸셨다.“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주님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느껴진다.
차마 굶겨 보내지 못하는 긍휼의 마음에서, 또 한 번 급식이적을 행하신다.

-오병이어 급식이적을 행하신지, 얼마 되지 않았다.
성경에서만 보면, 바로 전 장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방 땅에서 급식이적이 행해졌다.
전 장의 오병이어 급식이적과, 이방 땅에서의 급식이적에 공통점이 있다.
급식이적을 행하신 주님의 동기이다.
바로 불쌍히 여기심이다.
예수님의 긍휼의 심장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와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하는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신다.
그런데 유독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있다.
배고픈 자이다.

-예준이가 대학 간다고, 처음으로 집을 떠났다.
다른 것은 걱정이 안 되는데, 편식이 심한지라 밥 먹는 게 제일 걱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톡이 왔다.
그와 카톡한 것을 거의 그대로 옮겨본다.
“나 내일 밥먹을 돈 없는데...”
<ㅎㅎ 아무렴 아들 밥 굶기겠나?>
“근데 차라리 나중엔 자취하는 게 나을 같은데...하루에 만원씩만 써도 한 달에 밥값만 30만원이야.”
<자취는 군대 갔다 와서 해도 늦지 않다.>
“지금 밥 먹기가 너무 힘들다.”
<학교급식이 그렇다는 얘기나 밖에서 사먹는 게 힘들다는 얘기나?>
“밖에서 라면 먹는 거 아니면, 다 6천원씩 하는데...”
<6천원 해도 먹어야 공부를 하지 임마...
“밥값으로 그렇게 쓰면, 다른 데 쓸 돈이 하나도 없잖아?
<그렇다고 굶을래?>
“아침 정도는 굶어야 될 판인데...”
<학교 내 식당에서 먹으면 한 끼에 얼마나?>
“학교 식당도 3천 얼마인데...”
<그래도 학교에서 아침 점심 먹고, 저녁은 밖에 나가서 먹으렴. 너 아침 굶으면 안 된다.>

-<너 아침 굶으면 안 된다>는 문자를 보내는데, 까마득한 옛날 내 자취하던 생각이 나면서, 애비로서 긍휼의 마음이 몰려와 코끝이 시큰거렸다.

-주님은 우리 밥 굶기지 않는다.
그분의 긍휼이 그걸 용납할 수 없어서다.

-하지만 제자들은 걱정이 되었다. 33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제자들의 푸념이 이해되기는 한다.
내가 그곳에 제자로 있었다면,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돈도 돈이지만 어디서 4천명을 먹일 음식을 구하겠는가?
물론 오병이어 급식이적을 체험하긴 했다.
그리 오래 전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건 오래 가지 못한다.

-우리가 어떤 문제 앞에서 ‘아이쿠야, 큰 일 났네!’ 하는 것이, 은혜 체험이 없어서인가?
기도 응답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가?
제자들이 잘 한 것은 아니지만, 제자들 너무 몰아세우지 말자.
그런 제자들도 포기하지 않고, 긍휼의 심정으로 양육하신 주님이다.

-제자들의 믿음없는 반응에 주님이 어떻게 하셨는가?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다.“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그들에게 가진 것을 물으셨다.
주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이다.

-주님은 얼마든지 무에서 유를 만드실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가진 것이 무엇인지, 얼마나 되는지를 물으셨다.
현재 내가 가진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뭔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도전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가진 것 중에 묵혀두고 썩히고 있는 것은 없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것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이 역사하시도록 해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물음에 대답했다.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떡이 일곱 개가 있다고 했다.
물어보지도 않은 생선 두어 마리도 있다고 했다.
제자들에게 예전 오병이어 급식 이적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뭔가 돌아가는 상황이 유사해 보였다.
걱정으로 눌려 있던 믿음이 고개를 든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얼굴에 살포시 미소가 지어졌다. 35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36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무리를 앉힌 후에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나눠주게 했다.
뱃세다 광야에서의 오병이어 급식 이적이, 이방 땅에서도 재현된 것이다.
예수님의 손에 들려진 떡과 생선은 달라도, 예수님의 손을 바라보는 무리는 달라도, 예수님의 역사는 동일했다.

-제자들의 걱정은 한낱 기우였다.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다.37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38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39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시니라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였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생명을 주신 주님은, 또한 우리가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하신다. 요 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긍휼을 입은 우리에게 주님이 바라시는 게 있다.
긍휼히 여기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이다.
이걸 선순환구조라고 한다.

-우리로 다시금 긴장하게 만드는 말씀이 있다. 약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란 노래를 묵상하며 말씀을 마무리하겠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 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