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41: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마 15:21-28)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7-03-25 00:00
조회
1141
마태복음 강해 41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마 15:21-28)2017. 3. 19. 프롤로그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 중심에 섰던 마르틴 루터의 이야기다.
그의 학창시절에 독일 고학생들은, 노래를 잘하면 남의 집 창문 밖에서 노래를 부르고, 돈을 받아 학비를 마련하곤 했다.
물론 노래가 너무 엉망일 경우나, 창문 안 주인의 성품이 곱지 못하면, 무안을 당하고 빈손으로 쫓겨날 수도 있었다.

-한 번은 루터가 어느 부잣집 창문 아래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던 적이 있다.
그런데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체격이 크고 무섭게 생긴 사나이가 창문을 척 열고 바라보더니, 냅다 뛰어나오는 것이었다.
루터는 그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자기 노랫소리가 듣기 싫어서, 주먹질이라도 할 줄 알고 무작정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나이는 계속 쫓아왔다.
결국 발이 빠르지 못한 루터는 붙잡혔는데, 공포에 벌벌 떨고 있는 루터에게, 그 사람은 돈 뭉치를 내밀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루터에게 장학금을 주려고 했던 거였다.

-루터는 그때를 회고하길, '나는 목소리가 별로 좋지 않다' 라는 열등의식 속에서 노래를 하다 보니, 그 사나이가 뛰어나오는 것도 자기를 해치기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두려움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만사가 다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고, 믿음이라는 안경으로 갈아 끼면, 세상이 다 감사하고 좋게 보이며,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

-인생에서 안경이 중요하다.
환경이 중요하지만 안경이 더 중요하다.
똑같은 환경이라도 어떤 안경을 쓰고 보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해석이 더 중요하다.
분명한 사실이라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결론은 다르게 내릴 수 있다.

-한 신발회사에서, 두 사원을 아프리카에 시장조사 차 보냈다.
그 중 한 사원은 이렇게 보고했다.
"이곳은 모든 사람이 신발을 신지 않으므로 판매 불가능."
다른 한 사원은 다르게 보고했다.
"이곳은 아직 아무도 신을 신지 않았으므로 판매가능 무진장."
전자의 “판매 불가능” 사원은 평생을 말단 사원으로 마쳤지만, 후자의 “판매가능 무진장” 사원은 그 신발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두 사원은 같은 신발회사에서 같은 목적으로, 아프리카에 보내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전혀 상반된 보고를 했다.
같은 아프리카 사람들의 맨발을 봤지만, 다른 안경으로 봤다.
다른 안경으로 봤으니, 해석이 달라졌다.
다른 해석을 하니,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그 반응이 그들의 미래를 결정했다.

-데니어(Danyer) 란 신학교 교수가 있었다.
한번은 그가 자기가 속한 교단신문에, 이런 간증문을 기고했다.
“하나님은 기쁨 중에서는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일 중에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고통 중에서는 우리에게 소리치신다.”

-그분은 1980년 1월 1일 아침 7시 30분에, 미국 뉴욕 인근의 나약(Nyack)에 있는 심슨 기념교회에서 철야를 끝낸 아들을 차에 태우고 집에 돌아오는 중에, 다른 차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의사 선생님은 도로시 사모님에게 말했다.
“당신 남편이 살아나도 평생 휠체어에서 살아야 합니다. 최소한 3년 동안은 아무 일도 못하고, 오른손을 쓰지 못하고, 왼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고, 엉덩이뼈를 다른 것으로 대치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의사 선생님의 말은 하나도 그대로 되지 않았다.
그분은 몇 개월 후에 다시 걸었고, 오른 손도 쓸 수 있고, 왼쪽의 눈의 시력도 회복했고, 엉덩이뼈 보강수술도 하지 않았다.

-그 교수가 편지 말미에 이런 글을 썼다.
“고통 중에 무신론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하나님이 없다.’
그때 비관론자는 말합니다.
‘보라, 이제 희망이 없다.’
그때 편집증환자는 말합니다.
‘보라, 이제까지 내게 좋은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때 성도는 ‘왜 하나님이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을까?’라고 잠시 생각하다가, ‘하나님은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믿고 고난 중에도 감사한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인생의 짐이 무거운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쓰러지다’를 반복하셨던 주님을 보라.
사방팔방이 막혀있고 전후좌우가 닫혀있는가?
위에서 지켜보며 열렬하게 응원하고 계신 하나님을 보라.
그분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 믿으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함께, 장로들의 전통 문제로 논쟁이 있었다.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며 특파원의 지적을 받자, 주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며 되받았다.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마음관리 잘해야 한다는 말이다.
매일 마음 손질이 필요하다.
순간순간 마음 가꾸기가 필요하다.

-교회사에 보면 4, 5세기에 수도원주의가 확산되었다.
문명의 유혹에서 벗어나 거룩한 삶을 살아보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자기 스스로에게서 도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카이사리우스(Caesarius)는 한동안 수도원에서 살아본 뒤에, 이렇게 말했다.
“형제 여러분, 아무리 우리 육체를 금식과 주의로 괴롭힐지라도 마음에 변화가 없다면, 수도 생활이란 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조각상을 겉만 번쩍이도록 금을 입혀 만들었으나, 속에는 뱀과 전갈이 득실거리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이 개선되지 않고서야 육체를 괴롭히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앞에서 안경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안경은 마음에서 나온다.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안경이다.
안경을 바꾸자는 말은, 곧 마음을 바꾸자는 말이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네 마음먹은 대로 살라’고 한다.
‘한 번 뿐인 세상 당신 마음 내키는 대로 살라’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네 ‘마음을 손질하라’고 한다.
왜? 우리 마음이 쉽게 헝클어지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네 마음을 부단히 가꾸라’고 한다.
왜? 우리 마음에 잡초가 올라오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환경과의 싸움 이전에 자기와의 싸움이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패한 자가,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는 법이다.

-마귀는 환경을 통해서 우리를 흔들려고 한다.
급작스런 환경의 변화가 생기면, 마음관리가 잘 안 되기도 한다.
한 동안 자기 마음이 안 다스려진다.
속에서 천불이 나서 마음의 진정이 안 된다.
그러다 차츰 환경을 받아들이고, 마음에 질서가 잡힌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떠나셨다.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어차피 그들과 입씨름 해봤자 승부가 안 난다.
그들 안에 있는 신앙지식이, 예수님의 말씀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특별한 임무를 띠고 파송된 특파원들이다.
예수님께 논쟁을 걸어올 정도로, 장로들의 전통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예수님이, 그들과 긴 논쟁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발길을 옮기셨다.

-두로와 시돈은 이방지역이다.
하나님의 백성, 아브라함의 자손으로부터 환영은커녕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이, 복음의 광채가 가려진 그늘진 땅 이방으로 가셨다.

-바울도 다르지 않았다.
그가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다.
이방 땅에 가서도 회당을 선교센타로 하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유대인들의 방해와 핍박으로, 어쩔 수 없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래서 유대 땅 예루살렘교회에서 이방 땅 안디옥교회로, 복음의 무게 중심이 넘어가게 됐다.

-교회사를 보면, 교회가 계속하여 선교에 열심을 품었던 것만은 아니다.
교회가 선교에 주춤하고 있을 때, 선교의 무게중심이 선교단체로 넘어갔다.
아마 지금도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보다, 선교단체가 파송한 선교사가 더 많을 것이다.
물론 교회에서 선교단체를 통해, 선교사를 파송한 경우도 있다.
내가 첫 담임목회지인 오천남부교회에서 파송했고, 현재 우리 한꿈교회에서 협력하고 있는 김온유 이보배 선교사도, OMF란 선교단체를 통해서였다.

-한국교회가 실제로는 급격한 내리막길이다.
전체 교인 숫자는 크게 표가 안 나지만, 교회학교를 보면 심각한 수준이다.
하나님은 한국교회에 외적 내적으로 엄청난 복을 주셨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유일한 희망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자, 복음의 촛대를 옮겨가신다.
중국으로, 인도로, 중앙아시아로....

-왜 주님이 게네사렛 땅을 떠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는가?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종교지도자들과의 입씨름에 지쳐서만은 아니다.
자신들의 종교지식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이 꼴 보기 싫어서만도 아니다.
한 영혼을 찾아서였다.
자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한 영혼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건 드문 경우이다.
대개는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예수님이 찾아와서 그들을 만나주셨다.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오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나아왔다.
예수님이 찾아오셨어도, 무관심하거나, 피해 도망하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나사렛 사람들처럼, 찾아오신 예수님을 배척하면, 어쩔 도리가 없다.
예수님이 매달려 애걸복걸할 수는 없지 않는가?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이 오신 소식을, 어떻게 들을 수 있었을까?
남달리 귀가 밝아서였을까?
평소에도 소문을 잘 들어서였을까?
자기 딸을 고치고자 하는 불타는 소원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자기 딸이 다른 병도 아닌 흉악한 귀신이 들렸다.
몸은 이상이 없다.
겉보기에는 멀쩡하게 생겼다.
그러다가 가끔씩 귀신이 역사한다.
그러면 엄마로서 미칠 지경이다.
집안이 말이 아니다.
집안에서 웃음이 떠난 지 오래다.

-이런 저런 안 해본 노력이 없다.
딸을 고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어디든지 찾아갔다.
그걸 지켜보는 지인들은 “안타깝지만 이제 관두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엄마는 포기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딸을 향한 엄마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러다 두로와 시돈에 찾아오신,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것이다.

-포기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
믿음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포기를 포기하는 것이 믿음이다.
분명히 포기할 상황이다.
누구 봐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포기를 모른다.
그게 믿음이다.

-그런 사람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그런 사람에게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온다.
그런 사람은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어떻게든지 붙잡고야 만다.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여인의 적극성이 느껴진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싫어한다는 것을, 그 여인이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고 지나가는 기회를 뒷짐 지고, “그저 바라만보고 있지” 할 수는 없었다.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예수님을 한 번 부르고 말지는 않았을 거 같다.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한 번 불렀는데 예수님이 그냥 지나가셨다면,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한테 청하지 않았을 거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뒤따라오며 몇 번이고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그 여인의 소리를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이상한 일이다.
평소 예수님과는 다르다.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해서, 제자들이 예수님한테 청했다.“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가나안 여인의 입장에서는 무시를 당했다.
그렇게 애타게 부르는데, 아무 대답이 없다.
그렇게 절박하게 부르는데, 한 말씀도 대답이 없다.
한 번 불렀는데 대답이 없으면, 혹 못 들었을 수도 있다.
두 번 세 번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으면, ‘아, 이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른다.

-지난해 5월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비행기를 안 타봤다고 손님에게 무시당했다'는 제목의 게시글이 올라왔다.

-국내의 한 대형마트에서 근무하는 A씨는, 중년의 여성 손님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비행기에서 주는 과자 팔아요?"
직원은 잠시 망설이며..."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손님은 과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없이, 계속 "비행기에서 주는 과자를 주세요" 재촉했다.

-결국 여성 손님은 자기가 애타게 찾던 과자를 발견했고, 직원에게 다가와 내밀며 "여기 있는데 왜 말 안 했냐"고 따졌다.
이에 직원은 "죄송합니다. 제가 비행기를 안타봐서 몰랐네요"라고 사과했다.
그러자 손님은 "비행기 안타본 게 뭔 자랑이라고 변명을 해. 고객응대 그렇게 하지 마요"라고 화를 내며 돌아갔다.

-직원은 자신이 겪은 이 황당한 경험을 털어놓았고, 손님이 찾던 해당 과자 사진을 올렸다.
문제의 과자는, 커피와 함께 즐겨먹는 수입과자인, '로투스 비스켓'인 것으로 밝혀졌다.

-마트 직원은 자기를 무시한 손님하고 싸울 수 있다.
“이봐요. 내가 마트에서 직원한다고, 당신 눈에는 내가 종으로 보여? 당신 그렇게 똑똑하면서 비행기에서 주는 과자 이름도 몰라?”
그리고 사표 집어던지고 나오면 그만이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그럴 수도 없다.
예수님을 향해 “네가 나를 무시해? 더러워서 아쉬운 소리 안 한다” 하고 돌아설 수 있는가?
그럴 수가 없다.
여인은 속으로 다짐했다.
‘내 딸을 고칠 수 있다면, 내가 무시당하는 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잠시 후 들려온 예수님의 대답은 안 듣느니만 못했다.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차별을 당한 것이다.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인종차별을 당한 것이다.
앞에서 무시를 당했다.
이제 차별을 당한다.
그럼 막막하다.
지금까지 근근이 버텨왔는데 힘이 빠진다.

-가나안 여인에게 예수님은 마지막 희망이다.
기댈 수 있는 최후의 소망이다.
그러니 포기할 수 없다.
고지가 눈앞이다.
지금은 9부 능선을 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물러날 수 없다.

-여인은 멈춰선 예수님 앞에 넙죽 절했다.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여인의 얼굴에 간절함이 서려 있다.
그 간절함이 예수님을 멈춰 세웠다.
정말 무시할 작정이었고, 차별한 생각이었다면, 예수님은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여인은 예수님 앞에 절하며 애원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지체하지 않고 애원했다.
자신을 무시하는 예수님한테 절했다.
자신을 차별하는 예수님한테 절하며 애원했다.“주여 저를 도우소서”
감히 예수님 얼굴도 못 쳐다본다.
엎드린 채 자신을 도와달라며 흐느낀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나올지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
이 정도면 예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래왔다.
그보다 간절함이 덜한 사람의 병도 고쳐주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이상하다.
평소의 예수님답지 않게 굴었다.
뭐가 기분 나쁜 일이 있는 사람 같았다.
제자들도 그런 예수님이 적응이 안 된다.
제자들은 여인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주님한테 ‘뭔가 깊은 뜻이 있겠지’ 하고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든 이의 귀를 의심케하기에 충분했다.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건 인격 모독이다.
아무리 이방인이지만 사람을 개 취급하는 것은 심하다.
고쳐주기 싫으면, 고쳐주지 않으면 된다.
고쳐줄 능력이 없으면, 능력 안 된다고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무시를 했다.
그보다 더한 차별을 했다.
거기에 더해 인격모독을 했다.
아니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물론 보면 개만도 못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아니다.
귀신 들린 자기 딸을 고치려고, 예수님께 나아온 여인이다.
예수님한테 무시를 당하면서도, 예수님한테 차별을 당하면서도, 오직 하나 자기 딸을 고치려는 모성애 하나로 버틴 여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 그런 험한 말을 들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 정도면 무너져야 한다.
아니 그런 말을 듣고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 여인은 강했다.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여인은 자신이 개 취급을 당하고도 물러나지 않았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혹 이렇게 나올 수도 있다고 기대했다.
“내가 지금까지 참았는데, 더 이상은 못 참겠습니다.”
“당신이 진짜 다윗의 자손이 맞습니까?”
“좋게 능력이 안 되면 안 된다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벌떡 일어나 분노의 걸음으로 사라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님의 얼굴에 급격한 표정변화가 있었다.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여인의 말에 제자들만 놀란 것이 아니다.
예수님조차 놀라게 했다.
예수님이 굳어 있던 얼굴 표정이 환해졌다.
맘에도 없던 말을 해야 했으니, 예수님도 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시험을 이겨낸 여인의 믿음을 확인한 순간, 예수님은 너무 기뻐 탄성을 질렀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확인하시고, 한 맺힌 소원을 이루어주셨다.

-믿음을 확인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소원은 바로 이루어졌다.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그것이다.
우리는 믿음보다는 소원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우리의 소원보다 우리의 믿음에 관심이 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믿음을 더해달라고 기도하자.
“주여, 나에게 믿음을 더해주소서.”
무엇보다 믿음을 구하자.
그래서 주님께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자.
“네 믿음이 크도다”하는 인정을 받자.

-믿음의 기도는 역사가 일어난다.
믿음의 기도에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

-아일랜드의 한 청년이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사랑하는 약혼녀가 익사하는 아픔을 당했다.
그는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깊은 절망의 늪에 빠졌다.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이 청년은 아픔의 장소를 피하여, 도망치듯 캐나다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 안주하기도 전에,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중병으로 쓰러져,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정말이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한꺼번에 자기를 향하여 토네이도처럼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 청년은 힘없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흐느끼며 부르짖었다.
“예수님! 어머니의 병을 고쳐주세요. 응답해주세요. 평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하며 결단의 기도를 드렸다.
그 순간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와 평화가, 그의 가슴속 깊이 스며들었다.

-이 때 떠오른 영감은 뒤에 유명한 찬송가가 됐다.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드려 아뢰세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 자 누군가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그는 고향에 전화해서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그는 중병을 앓던 어머니가, 거짓말처럼 완전히 치료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이 청년이 바로 조지프 스크리븐(J. Scriven)이다.
스크리븐이 믿음으로 울부짖으며 드린 기도는, 어머니를 살려내는 기적을 일으켰다.

-믿음의 기도에는 실패가 없다.
기도 응답이 지연된다고, 기도에 실패한 것이 아니다.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기도에 실패한 것이 아니다.
믿음의 기도에는 실패가 없다.

-하나님이 믿음을 테스트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말씀 앞에서 믿음의 반응을 보이라.
말씀 앞에서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인가?
“아멘”이다.

-환경 앞에서 믿음의 말을 하기 바란다.
처해진 상황에서 믿음의 행동을 보이기 바란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