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39:예수님은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마 14:13-36)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7-03-05 00:00
조회
934
마태복음 강해 39예수님은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마 14:13-36)2017. 3. 5. 프롤로그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존스홉킨스대학의 사이먼 쿠즈네츠 교수가, 오래 전에 한 말이 있다.
“중진국에서 선진국 문턱을 넘어가는 데는, 많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넘기 어려운 함정은, 국민의식의 전환이다. 많은 나라가 바로 선진국 문 앞에서 주저앉고 만 것은, 이 국민의식 전환의 실패 때문이다.”

-국민의식 중에서도 가장 시급하게 전환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책임지는 자세이다.
높은 사람들이 잘못하고, 불려 나와서 하는 말이 있다.
“모릅니다.”
“기억이 안 납니다.”
“나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의 책임을 피함으로써, 내일의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독일의 저명한 사회과학자이자 사상가인 막스 베버 (Max Weber)는, 이렇게 말했다.
“책임과 권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권위가 없는 책임이란 있을 수 없으며, 책임이 따르지 않는 권위도 있을 수 없다.”

-누군가는 우리 대한민국 사회를, 이렇게 지적했다.
“상층은 있는데 상류사회는 없고, 고위층은 있는데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는 사회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이다.
특혜받는 사람들의 당연한 의무이자 책임이다.
정당하게 대접받기 위해서는, 명예(노블레스)만큼 의무(오블리주)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고위층 자제가 다니던 이튼칼리지 출신 중에 2,000여 명이 전사했다.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붙은 포클랜드전쟁 때는, 영국 여왕의 둘째아들 앤드루가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하였다.

-우리나라 6·25전쟁 때에도, 미군 장성의 아들이 142명이나 참전하여,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당시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의 아들은 야간폭격 임무수행 중 전사했으며,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아들도 육군 소령으로 참전했다.
중국 지도자 마우쩌둥이 6·25전쟁에 참전한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시신 수습을 포기하도록 지시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권리만 주장하려고 하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천민성이다.
천민성은 일종의 사회의 병이다.
육신의 병이 아니라, 생각의 병이고, 행동의 병이다.
생각과 행동이 천해지는 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인격이 무너지고, 품격이 밑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인격이 있어서다.
품격이 있음으로 사람이 동물과 구별된다.

-나라를 제 맘대로 주물럭거리다, 조사를 받는 사람들을 보면, 그 안에 격이 없는 거 같다.
도대체 부끄러움을 모른다.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
자기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기 바쁘다.
인격의 천박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에서 퇴임한지 얼마 안 된 오바마의 말이, 깊은 울림을 준다.
“책임의 시대엔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 실수를 깨끗이 인정하고 다시는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미덕이며, 우리는 그렇게 할 것이다.”

-백성이 왕을 잘 만나는 게 복이다.
나쁜 왕 만나면 백성이 고생한다.
또한 종이 주인을 잘 만나는 게 복이다.
못된 주인 만나면 종은 평생 죽을 고생만 한다.

-어떤 왕이 나쁜 왕인가?
무책임한 왕이다.
어떤 주인이 못된 주인인가?
무책임한 주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복 있는 사람이다.
우리 주 예수님이 책임감이 뛰어나신 분이기 때문이다.
책임의 최고봉은 희생이다.
자기가 모든 책임을 지고 죽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은 말로만이 아닌 실제로도 그렇게 하셨다.
우리가 책임져야 할 죄 문제를, 주님이 대신 책임져주시려고, 십자가 제단에서 대속물이 되어 주셨다.
인생의 여러 문제 중에 죄 문제가 가장 큰 문제다.
다른 문제는 사람에 따라 극복하는 사람도 있다.
엄청난 문제인데도, 초인적인 인내와 능력으로, 혹 그걸 극복해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죄 문제는 아니다.
죄로 인해 사망이 왕노릇하게 되었고, 사망 앞에 이길 자가 없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죄 문제만 해결하신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죄에서의 구원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질병은 물론이고, 곤경이나 역경으로부터 건짐받는 것도 구원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미 죄로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 땅은 낙원이 아니다.
이 땅에는 그 어디에도 유토피아나 파라다이스가 존재하지 않다.
곳곳마다 곤경이요 역경이 기다리고 있다.
어쩌다 급작스럽게 사경이 찾아오기도 하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 삶을 책임져줄 주님이 필요하다.
오늘 말씀이 그걸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로부터 부담스러운 소식을 들었다.
바로 세례 요한이 헤롯에 의해 참수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막 장사를 지내고 왔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주에 앞 서 주의 길을 준비하던 사람이다.
구약에 예언된 엘리야처럼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물세례를 주었던 사람이다.
예수님이 흥하기를 위해, 자신은 쇠하기를 기뻐했던 사람이다.
더구나 예수님의 가까운 친척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의 죽음 소식은, 예수님을 무척이나 아프게 했다.
그렇다고 어찌할 방법도 없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사명을 마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천국에 간 세례 요한이다.

-예수님은 무거운 마음으로 배를 타셨다.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주시의 대상이었다.
배를 타고 빈들로 가셨는데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갔다.
물론 요즘처럼 동력으로 가는 배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배는 가로 질러서 간다.
그러나 사모함과 절실함으로 무장한 그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갈 참이었다.
예수님이 자기에게 오는 자를 물리치는 분도 아니지만, 그들을 따돌리려고 했어도 힘들었을 것 같다.

-사실 신앙의 자세도 이래야 한다.
은혜를 열렬히 사모해야 한다.
절실한 마음으로 주를 찾아야 한다.
“주님 알아서 해주세요.”
“주님 언제 한 번 편한 시간 내주세요.”
이런 자세로는 사실상 주님을 만나기 어렵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좇아가겠습니다.”
이런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주님과의 임팩트 있는 만남이 가능하다.

-우리는 주일에 주님 만나러 교회에 나온다.
그냥 스치는 만남으로는 안 된다.
만나서 안부 인사하는 정도의 만남으로는 안 된다.
임팩트 있는 만남, 곧 역사가 일어나는 만남이어야 한다.

-주님은 그토록 사모하는 마음으로,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온 무리들을 만나주셨다.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예수님이 무리에게로 나오셨다.
무리를 만나줄 의도를 가지고 다가오신 것이다.
무리가 여러 고을들로부터 예수님이 있는 빈들까지는, 제 발로 따라왔다.
그러나 예수님이 만나주시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예수님의 의도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다.
나는 맘이 없는데, 예수님은 맘에 있다면, 인격적인 만남이 아닌 것이다.
그런 만남에서는 서로 간의 인격적인 교류가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읽으셨다.
그들이 어떤 맘으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꿰뚫어 보셨다.
그들을 불쌍히 여겨주셨다.
이는 그들의 아픔을 느끼셨다는 말이다.
또한 그들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셨다.

-해 바뀌고 지인에게 “요즘 잘 지내고 있어요” 연락했더니, “좀 아파서 고생했어요” 하는 말을 듣고, “반백년을 넘게 썼으니 탈 날 때도 됐지요” 하고 웃었다.

-사실 남의 말 할 입장도 아니다.
몸 여기저기서 빨간불이 깜박거리는 신호를 보내온다.
아프면 서러워진다.
몸이 약해지면 맘도 약해진다.
몸이 부자연스러워지면, 삶 전체가 부자연스러워진다.
아프다는 말을 자주 하면, 가족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오늘 주님을 찾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주님이 그들의 아픈 속내를 아셨다.
그리고 한 사람 두 사람... 고쳐주셨다.
주님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병자들을 책임져 주셨다.
그렇다. 오늘도 예수님은 믿음으로 당신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책임져 주신다.
건강 문제만은 아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당된다. “예수님은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그런데 하루 시간이 너무 짧았다.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저녁이 된 것이다.
예수님이 병자들만 고친 것은 아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에 보면, 그렇게 나온다. 막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사실 병든 자를 고치는 치유 사역만으로, 하루를 보내셨을 거 같지 않다.
육신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천국말씀을 가르치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오천 명이었다.
한 사람 두 사람 병 고침을 받을 때, 나머지는 뭐하고 있었겠나?
예수님은 소수의 병자들을 고친 후에, 하늘의 진리를 가르치셨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무리들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예수님이 말씀을 끊었을 때에야, 날이 저물었음을 알았다.
그만큼 그들이 말씀을 듣는데 집중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밭이 옥토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눈에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이 보이니, 예수님이 씨 뿌리는 것을 중단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 중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는, 몇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제자들이었다.
그들도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마음밭이 가시떨기로 변해갔다.
재물의 염려에 말씀이 막히기 시작한 것이다.
제자들은 더 이상 기다렸다가는 낭패를 볼 거 같다고 판단하여, 예수님이 잠시 말씀을 멈추는 사이에 건의를 했다.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제자들은 책임감을 느꼈다.
자신들의 입장도 곤란해질 수 있지만, 더더욱 예수님이 곤란한 입장에 빠질까봐 걱정이 되어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건 제자들의 머리에서 나온 최선이다.
자신들로서는 그 이상의 능력을 생각해낼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건의를 가볍게 받아넘겼다.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은 심각한 상황으로 여겨, 너무 애가 닳아 심각하게 건의했는데, 예수님은 농담처럼 받아넘겼다.“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나는 예수님이 유쾌하신 분이라고 믿는다.
적당한 유머에 적정의 농담을 하실 줄 아는 분으로 생각한다.
곁에서 말 한 마디 거는 것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매사에 심각한 삶을 산 분으로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농담을 시도 때도 없이 남발하여, 어떤 말이 진담이고, 어떤 말이 농담인지 구분이 모호할 정도로, 실없는 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성향을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대답은 어찌 보면 농담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그냥 해 본 말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자기들을 시험해 본 말 같기도 해서, 통 가늠이 안 된다.

-상대의 말을 가늠하기 어려우면 당혹스럽다. 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기로 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의 전부를 내보였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건 제자들이 싸온 도시락이 아니었다.
한 어린 아이가 어떤 제자에게 건네준 것을, 그들이 예수님한테 가져온 것이다.
그것을 혹시나 해서 드린 것이다.
무슨 믿음이 있어 드린 것 같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니까, 제자들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라고 항변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자신에게 가져오게 하셨다.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드렸든, 믿음으로 드렸든, 항변으로 드렸든, 그건 문제되지 않았다.
그게 예수님의 손에 드려진 게 중요하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예수님의 손에 들려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역사는 주님이 일으키시기 때문이다.
오병이어 표적에서 제자들의 헌신과 믿음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보다 결정적인 것은 예수님이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생명의 말씀을 먹기에, 무리는 시간 가는 줄도 몰랐고, 저녁때가 된 줄도 몰랐다.
주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때론 우리의 믿음과 상관없이 일하실 수 있다.
대신 주님은 그냥은 일하시지 않는다.
우리의 헌신을 통해 일하신다.
주님은 돌로 떡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다.
마귀가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할 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돌로 떡을 만들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기에 하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내게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게 중요하다.
주님은 내가 가진 것으로, 내가 드린 것으로 역사하신다.

-요즘 시대는 보기 힘들지만, 내 어릴 때에는 땅속 깊은 곳에 있는 물을 끌어올릴 때, 펌프를 사용했다.
그런데 펌프질을 하기 위해서, 먼저 할 일이 있다.
그건 펌프에다 한 바가지 정도의 물을 붓는 일이다.
그 때 펌프에 붓는 한 바가지의 물을 마중물이라고 한다.
마중물은 낭비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펌프에 마중물을 붓는 것을 아까워하면 안 된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드린 오병이어는 마중물이었다.
오병이어는 한 아이의 도시락이기에, 어른 한 사람이 먹기에도 부족하다.
그러나 그게 주님 손에 들려졌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나는 신앙생활에서 십일조가 일종의 마중물이라고 생각한다.
십일조라는 마중물을 펌프에 붓고, 생업이라는 펌프질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마중물을 마시면 안 되듯이, 아무리 궁해도 하나님의 것을 급전해서 쓰면 안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서 받은 오병이어로 급식이적을 행하셨다.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제자들도 믿음이 대단했다.
주님이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믿음으로 순종했더니, 자기 손으로 떡을 나눠주면서도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떡을 나눠도 나눠도 그대로였다.
이 때 제자들의 표정이 상상이 되는가?
그 자리에서 떡을 먹은 사람들이 성인 남자만 해도 5천명이었다.
그것도 그들이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느라 배고픈 줄도 몰랐던 무리를 위해, 빈들에서 급식이적을 행하셨다.
광야에 식탁을 마련하여, 무리의 주린 배를 채워주셨다.
그들을 책임져 주신 것이다.
그들의 영육의 양식을 책임져 주신 것이다.

-미국 감리교의 치셤 목사님은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주님’을 이렇게 노래했다.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며일용할 모든 것 내려주시니 오 신실하신 주 나의 구주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다.“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주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신다고, 우리가 무위도식(無爲徒食)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주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시되, 우리가 할 일이 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다.
먼저 기도로 구해야 하고, 또한 일터에서 구해야 한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한 사람은, 생업에 충실 안 할 수 없다.
아침에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한 사람은, 일터에서 성실하게 일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셨다.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요한복음에 의하면, 무리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자기들 밥은 안 굶겠다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예나 오늘이나 최고의 정치는, 백성이 맘 편히 밥 먹고 살게 하는 것이다.
무리는 예수님이 왕이 되면,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제자들의 마음에 헛바람이 들어가려고 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재촉하여, 바다 건너편으로 가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급식했으니, 영광 받으실 만하다.
몇 분이라도 그걸 즐기면 좀 어떤가...
그러나 주님은 그게 시험인줄 알아차리고, 무릎 꿇을 자리를 찾아 떠나셨다.

-칭찬으로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 잠 27:21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
잘 한 일에 칭찬을 안 해보거나, 잘한 일에 칭찬을 해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그 자리를 얼른 피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의 무릎을 꿇었다.
그건 주님의 습관이었다.
주님은 울 일에나 웃을 일에나 기도하셨다.
주님은 슬퍼할 일에나 기뻐할 일에나 기도하셨다.
기도가 주님의 몸에 밴 까닭이었다.

-그 때 배를 탄 제자들은 육지에서 꽤 떨어져 있었는데, 물결로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지금 배안에 예수님이 안 계신다.
그래도 배안에는 어부로 잔뼈가 굵은 베드로 외에, 몇 명의 어부 출신의 제자들이 있다.
그들은 처음에 “걱정 붙들어 매” 하며 자신감을 보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부 출신 제자들이 바다에서 물결을 한 두번 만난 게 아니다.
그런데 이번 물결은 지금까지 겪어왔던 것과는 수준이 다르다.
배 멀미에 약한 제자들은, 아예 배 바닥에 드러누웠다.

-하지만 주님은 여전히 기도하고 계셨다.
제자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음을 알고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꽤 지나서야 주님이 일어나셨다.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밤 사경이었다.
이는 새벽 3시부터 6시까지를 가리킨다.
제자들이 바다에서 상당한 시간동안 고생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정도면 제자들이 한계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 때 주님이 움직이셨다.
그게 주님의 때였던 것이다.

-제자들은 처음에 베드로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을 물결에서 구원하지 못했다.
그 때서야 예수님을 찾았다.
이 자리에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지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제 배는 서서히 침몰하고 배 안의 사람들은 죽게 생겼다.

-바로 그 때 주님이 바다 위를 성큼성큼 걸어 제자들에게 오셨다.
주님은 기도하시면서 바람을 느끼셨다.
그 정도의 바람이면 제자들이 고난 당하실 것을 아셨다.
예수님은 기도하면서도 제자들의 상태를 체크하고 계셨다.
그리고 결정적인 타이밍에 주님이 개입하셨다.

-우리는 주님의 주목의 대상이시다.
주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지켜보고 계신다.
주님은 우리가 고난을 당하여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죽을 거 같은데, 주님은 가만히 계실 때가 있다.
아직 밤 사경이 되지 않아서이다.
밤 사경은 사실 새벽이다.
주님은 새벽에 그들을 구원하셨던 것이다.
아무리 밤이 깊어도 새벽은 온다.
아무리 인생의 밤이 깊어도, 주님의 시간 새벽은 오고 만다.
그러므로 주님의 시간 새벽까지는 어떻게든지 버텨야 한다.

-주님은 제자들을 어떤 경우에도 책임져 주신다.
책임지지도 못할 제자들을 부르실 정도로, 주님이 그렇게 무책임한 분이 아니다.
그런 주님이라면 우리가 믿을 필요가 있겠는가? “예수님은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이어서 베드로의 에피소드가 나온다.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역시 베드로답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물 위를 걸었지만, 바람을 보는 순간 물에 빠져갔다.
주님이 우리를 책임지신다고 해도, 우리가 주님이 아닌 환경을 바라보면, 실족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에피소드다.

-어쨌든 바람은 그쳤다.
이제 모든 것은 정상이 되었다.
그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람들이 예수님께 절을 했다.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그들의 고백대로다.
우리를 책임져주시는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실 수 있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일행이 게네사렛 땅에 이르자, 많은 병든 자들이 찾아왔다. 34 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35 그 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예수님 소문을 듣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했다.
그래서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다.

-그들은 병을 고치고자 하는 절실한 마음과 절박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다.36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책임져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