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37:인생은 선택하는 것입니다.(마 13:44-58)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7-02-25 00:00
조회
1043
마태복음 강해 37인생은 선택하는 것입니다.(마 13:44-58)2017. 2. 19. 프롤로그

-‘세계 3대 테너로 손꼽히는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어릴 때부터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빵장수를 하던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키워주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청년기를 거치면서 파바로티의 관심은, 오히려 교육에 쏠려서 사범대학에 들어가서 교육을 전공하게 됐다.

-대학을 졸업할 때가 가까워지자, 파바로티는 진로 문제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내심 성악과 교육을 동시에 붙잡고 싶었던 것이다.

-?아들의 고민하는 모습을 본 아버지는, 파바로티 방에 들어가서, 방 안에 의자 두 개를 멀리 떼어놓은 뒤에, 이렇게 말했다.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의자 위에 동시에 앉으려면 너는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의자에 앉으려면 반드시 한 의자를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은 네 자신이 해야 한다.”

-파바로티는 깊은 고민 끝에 성악을 선택했다.
물론 그가 교육을 택했어도 훌륭한 교육자가 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 3대 테너와 같은 명성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두 가지를 겸했다면 이도저도 아닐 뻔했다.
그가 성악과 교육의 기로에 서서 성악을 선택한 것이, 결과적으로 인생 최고의 선택이 된 것이다.

-파바로티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음악을 위한 삶은 환상적이었고, 그로 인해 나는 음악에 바쳤다.”

-지난 2010년 7월 20일자 동아일보에 난 기사이다.
임신 뒤 암에 걸린 사실을 안 뉴질랜드의 30대 여성 변호사가, “아기를 포기하라”는 의사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은 뒤 세상을 떠나 주위 사람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고, 18일 뉴질랜드 일간지 <뉴질랜드 해럴드>가 전했다.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족 출신 여성 변호사 졸렌 파투아와 투이라베 씨(33)는, 아들 루이를 낳은 지 10주 만인 지난달 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2006년 30세 생일날에 유방암 진단을 받았지만 이겨냈다가, 지난해 여름 임신 사실을 안 직후 암이 재발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가 “암 치료를 하려면 아이를 포기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고 한다.
투이라베 씨는 4월 14일 몸무게 1.9kg의 루이를 얻었고, 10주 뒤인 지난달 26일 가족과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편의 팔에 안겨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투이라베 씨가 ‘옳은 선택을 했느냐’ ‘그른 선택을 했느냐’는 판단하기 어렵다.
확실한 것은 자녀의 생명을 얻기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는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그녀 역시 자기 생명에 대한 애착이 없었겠는가?

-살만큼 산 것 같은데도 더 살고 싶어 한다.
더 살아봤자 행복할 것 같지도 않은데 더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생명을 연명하고자, 배속의 아이 생명을 지을 수 없었다.
그녀는 숭고한 선택을 한 것이다.

-인생은 선택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밥을 먹을까 말까’, ‘커피를 마실까 말까’, ‘운동을 할까 쉴까’ 하는 단순한 선택이 있다.
반면 파바로티처럼 인생을 방향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결정적인 선택이 있다.
심지어 투이라베 씨처럼 타인의 생명을 위해 자기 생명을 포기하는 선택도 있다.

-그런 선택들이 모여서 우리 인생을 이룬다.
순간의 선택들이 모여서 우리 인생 여정을 이룬다.
물론 선택 자체는 순간이지만, 순간의 선택을 위해서 오랜 숙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의 감을 믿고 즉흥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혹 있을 수 있지만, 그게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앙도 선택이다.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다.
우리 편에서도 선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게 믿음이다.
하나님의 초청을 받지 않는 인생은 없다.
하나님의 초청에서 제외된 사람은 없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마다”
선택은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우리에게는 자율성과 책임성이 주어졌다.
자율성은 선택과 관련되고, 책임성은 결과와 관련된다.
예수를 믿고 안 믿고는 자율성에 속하고, 영생을 얻느냐 멸망하느냐는 책임성에 속한다.

-우리나라도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의 기구들이 통합되었다.
쉽게 말하면 엘리트 체육은 운동으로 밥 먹고 사는 거고, 생활체육은 운동을 취미로 하는 것이다.
사실 운동으로 밥 먹고 사는 것은 전쟁이다.
프로팀에 들어가는 것도 전쟁이지만 들어가서도 생존 전쟁이다.
또한 팀 성적을 내기 위해서, 기혼자들도 거의 합숙을 시켰다.

-그런데 요즘엔 선수들에게 자율성이 많이 부여된다.
시즌이 시작되면, 프로선수쯤 되면 컨디션관리를 자기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훈련 때는 입에 단내가 나도록 하지만, 훈련 시간이 끝나면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그 때 쉴 수도 있고, 게임을 할 수도 있고, 음악을 들을 수도 있고, 보충 훈련을 할 수도 있다.
이게 다 자율성과 책임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사람을 보라.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그는 보통 때처럼 밭을 갈았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다.
밭갈이는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자율적으로 했다.
그것이 자기의 천직이었기에 꾀부리지 않고 밭을 일구었다.

-물론 그 밭은 자기 밭이 아니었다.
그는 남의 밭을 빌어서 농사를 짓고, 소출의 일부를 지주에게 세로 바치는 소작농인 것으로 보인다.
한 해 동안 열심히 농사지어도 큰 벌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성실하게 농사지으면 처자식이랑 먹고 살 수는 있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밭갈이를 나갔다.

-한 참 땀을 닦아가며 밭을 갈고 있는데, 뭔가 쟁기에 받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싶어, 밭갈이를 멈추고 쟁기가 받쳤던 곳을 살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감추인 보화였다.

-당시는 은행이 없었다.
그래서 값진 보물을 맡길 곳이 없었다.
더구나 팔레스틴 지역은 침략을 많이 받았기에, 그나마 보화를 감출 곳은 땅속밖에 없었다.
집에 묻어두면 금방 발각이 되기에, 집에서 떨어진 밭을 파고 감추었다.

-시간이 오래되면 묻어둔 사람도 잊어버릴 수 있고, 묻은 사람이 죽거나 행방불명될 수도 있다.
그러면 밑도 끝도 없이 밭에 묻혀 있는 것이다.
그러다 이 사람처럼 보화를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건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가 그 감추인 보화를 캐내었다면 원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절도에 해당한다.
그는 보화를 그대로 묻어두고 주인을 찾아갔다.
그리고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

-물론 여기서 윤리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가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한 게 아닌가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그건 비유의 초점을 흐리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결정적인 선택에 대한 것이다.
그가 보화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그런 결정적인 선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보화가 가짜라면, 그것을 사려고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았으니, 꼼짝없이 길거리에 나앉아야 된다.
이런 리더십을 결단의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최선이 없으면 차선이라도 선택하고, 차선이 없으면 차차선이라도 선택하는 리더십인데, 그 결단을 신속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양비론적 리더십은, 가장 나쁜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최선을 놔두고 차선을 선택한다면, 아무리 결단을 신속하게 해도 결단의 리더십으로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다.

-과감한 선택 이전에, 가치를 알아보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우리 목숨이 서너 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 번 뿐인 인생을 살아간다.
아무 종교에나 내 영혼을 맡길 수 없는 이유다.
아무 신에게나 내 인생을 던질 수 없는 까닭이다.

-원래 예수님이 감추인 보화였다. 골 1: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예수님은 만대로부터 감추어져 있던 비밀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감추어졌던 비밀을 열어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우리가 비밀을 풀어낸 것이 아니다.
우리가 비밀을 밝혀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드러내주셨기에 우리가 알게 됐다.엡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셨다고 했다.
성령을 가리킨다.
누구도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님을 알 수 없다.
누구도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 없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을 귀히 여겨야 한다.
예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야 한다.
무엇인가를 가치 있게 여기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한다.
헌 옷 가게에서 1만원 주고 산 옷과, 백화점에서 수백만원을 주고 산 옷을 똑같이 대우할 수 없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면, 예수님을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게 돼 있다.-------------------------------------------------------

-오늘 상고하는 두 번째 비유도 내용은 흡사하다.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그런데 첫 번째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은 밭갈이를 하는 농부이다.
보통 때처럼 일하다가, 감추인 보화를 우연찮게 발견한 것이다.
보화를 꿈꿔본 적도 없고, 횡재를 생각해 본적이 없다.
단지 생업에 충실했을 뿐인데, 보화를 발견한 것이다.
그가 잘 한 점은, 보화를 발견한 후에 지혜롭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은 진주를 취급하는 장사다.
그는 일찍부터 보석에 눈을 떴다.
고생하는 것에 비해 이익이 별로 안 남는 농부로 살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그는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보석상이 되었다.
그는 좋은 진주를 찾아서 안 다니는 곳이 없다.
유대는 물론이고 사마리아도 가고 다른 나라에도 갔다.

-그렇게 해서 모은 진주가 꽤 되었다.
그 진주만 가지고도 밥은 먹고 살 정도는 된다.
그러나 그는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극히 값진 진주를 찾고자 발걸음을 옮겼다.

-그 열정에 하늘이 감동했던지, 어느 날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그 진주를 발견한 순간 발이 부르트도록 찾아 다녔던, 고생과 수고가 헛되지 않았음에 감사와 희열을 느꼈다.
그 기쁨은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는 당장에 그 극히 값진 진주를 가진 주인과 협상을 했다.
밀고 당기는 기나긴 협상이었다.
드디어 협상이 끝남으로 그 진주를 자기 품에 안을 수 있게 됐다.
대신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야 했다.
보석장사니 수중에 상당한 현금이 있었을 것이고, 다른 진주도 있었지만, 그것으로 그 진주를 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극히 값진 진주를 사겠다며, 계약금을 걸어놓고 집으로 달려갔다.
예상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온 것에 대해 가족들이 놀랐다.
그리고 집에 앉아보지도 않고, 집안의 진주와 돈만 챙겨서, 다시 나가는 거였다.
아내가 따라와 말렸지만, “여보 미안해 갔다 와서 말해줄 게” 하며 서둘러 집을 떠났다.

-그는 흥분하여 가슴이 방망이질한다.
그 극히 값진 진주를 제 손에 넣을 걸 생각하니 여간 행복하다.
그 극히 값진 진주에게 달려가는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볍기만 하다.
그렇게 해서 진주 장사는 그 꿈에 그리던 좋은 진주를 손에 넣게 되었다.
대신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았지만 후회 없는 선택을 한 것이다.

-사람은 가치 있는 일에 대가를 지불하면 후회하지 않는다.
자기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인생을 잘 살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라면 몰라도, 타인에게 떠밀려서 선택하거나, 분위기에 휩쓸려서 선택을 하면, 얼마가지 않아서 후회할 수 있다.
그래서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구도자로 살다가 예수를 믿은 사람은 절실한 마음이다.
진리를 찾아 해매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나 부모의 강요나 타인의 부탁에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런 마음이 부족하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께 대가지불하는 것을 꺼려한다.

-극히 값진 진주를 알아보지 못한 사람이 보기에, 그 진주 장사가 미친 것이다.
그러나 그 진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보기에, 그 진주 장사는 좋은 선택을 한 것이다.
예수님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자기 수입의 십일조로 드리는 것을 이상하게 볼 수 있다.
그 돈으로 저금할 수 있는데... 그 돈으로 빚 갚는 게 우선인데...

-그러나 예수님의 가치를 제대로 알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막 14: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한 여인이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것을, 사람들이 같은 시간에 같이 봤으나 반응은 달랐다.
예수님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어찌하여 향유를 허비하는가”
그리고 그 여인을 책망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말씀을 하셨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게 여러분의 신앙이다.
그 자리에 여러분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 거 같은가?
여러분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 누가 가장 행복했을 거 같은가?
향유를 부은 여인을 책망하는 사람들일까?
자기 머리에 향유가 부어진 예수님일까?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일까?
나는 향유를 부은 여인이라고 생각한다.

-헌금은 허비가 아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헌신은 허비가 아니다.
주님과 그의 몸된 교회에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건 강요의 문제가 아니다.
선택의 문제이다.
곧 자율성과 책임성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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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살펴볼 세 번째 비유도 내용이 흡사하다.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도 다양하다.
농부와 장사에 이어 어부가 나온다.
예수님은 다양한 사람과 접촉하셨고, 다양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여러 부류였다.
농사하는 사람도 있고, 장사하는 사람도 있고, 고기잡는 사람도 있었다.
여러 부류가 섞여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등장시켜 말씀하셨다.
아무래도 자기와 관련이 있을 때, 사람은 공감을 하게 된다.
자기에게 찾아온 영혼들을, 다 아버지께로 인도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한 어부가 있었다.
얼굴은 갯바람에 그을려 있고, 손은 뱃일로 거칠었다.
그는 배에 올랐다.
배 안은 자기가 가장 안정감을 느끼는 곳이다.
그 배는 호구책이다.
자기와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보배다.

-그는 수선해 놓았던 그물을 바다에 쳤다.
그물을 치면서도 다시 확인해봤다.
그물이 잘 수선되었는지 꼼꼼히 살폈다.
아무리 그물을 쳐도, 그물에 문제가 있으면 소용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그물을 재차 확인했다.
이제 그렇게 하는 것은, 그에게는 일종의 습관이 되었다.

-그는 바다에 그물을 치면서 기대를 했다.
고기가 가득한 그물을 끌어올리는 기대를 했다.
풍어의 기쁨을 가득 안고 집으로 향하는 기대를 했다.
오늘따라 그 기대는 왠지 꼭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시간이 좀 지난 후, 그물을 확인했는데 그물이 묵직했다.
고기가 그물에 가득했다는 것을, 어부는 직감으로 알았다.
어부는 상기된 얼굴로 그물을 물가로 끌어냈다.
그물을 확인했더니, 좋은 것들도 있고 못된 것들도 있었다.
어부는 빠른 손놀림으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들은 내버렸다.

-그건 너무나 당연했다.
누가 좋은 것들을 내버리겠는가?
누가 못된 것들을 내버리지 않고 그릇에 담겠는가?

-주님은 바로 비유를 적용하셨다.
누구나 잘 알고 동의하는 바를 비유로 든 후에, 영적 진리를 적용하셨다.
고기잡는 어부의 비유는 세상 끝을 상징한다.
어부는 천사요, 좋은 것은 의인을, 못된 것은 악인을 상징한다.
세상 끝에는 의인과 악인의 분리가 있다.
의인과 악인을 가려내고 분리하여 조치한다.

-세상에서는 악인이 의인 사이에 있다.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의인 같은 악인이 있을 수 있다.
의인의 흉내를 내는 악인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에는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다.
안타깝지만 교회 안에도 의인과 악인이 혼재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날에는 엄격한 선별작업을 통해 가려내진다.

-그 날 선별 작업을 누가 하는가?
천사가 한다.
그렇다면 인정이 통하지 않는다.
당연히 사정이 통할 리가 없다.
오직 의인과 악인으로 분류될 뿐이다.
의인이 잘못하여 악인의 무리에 들 수가 없고, 악인이 운 좋게 의인의 무리에 속할 수 없다.

-세상 끝이 이르기 전에는 자신에게 선택의 기회가 있다.
의인으로 살 수도 있고 악인으로 살 수도 있고 기회가 주어진다.
‘배고파도 의인으로 살 건가’, ‘고달파도 의인으로 살 건가’, ‘고통스러워도 의인으로 살 건가’, ‘고생스러워도 의인으로 살 건가...’
이걸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다.

-대신 세상 끝 날에 천사를 원망할 수 없다.
나를 왜 악인으로 분류하는지 반론을 제기할 수 없다.
풀무 불에 던져진 악인이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고 했는데, 이건 천사를 향한 원망이 아닌 자신을 향한 원망임에 틀림없다.

-예수님은 비유를 듣고 있는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그들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그러하오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대답하는 제자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향하셨다.
고향에 가서도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런데 그 가르침의 권세가 대단했다.
나사렛에서 난 랍비를 구경나온 고향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그리고는 그들은 이런 결론을 냈다.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고향에서 랍비가 나왔다는 것은 자랑거리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나다나엘의 말처럼, 나사렛은 랍비를 배출할만한 동네가 못된다.
그런데 그 나사렛 출신 예수가, 온 이스라엘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랍비가 됐다.
그리고 고향을 찾은 것이다.

-그러면 환영해야 정상이다.
실패하고 와도 받아주는 곳이 고향이다.
빚지고 도망와도 받아주는 곳이 고향이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

-제자들 앞에서 면이 안 선 예수님은 혼잣말처럼 말씀하셨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예수님 낯도 있다.
누구보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 낯이 서게 해야 한다.

-하나님이 욥 자랑을 하셨다.
그러자 사탄이 믿지 않았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정 믿지 못하겠거든 테스트해보라고 했다.
사탄의 가혹한 테스트 앞에서도, 욥은 거뜬히 이겨냈다. 욥 1: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이 하나님의 낯을 세워드린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돌린다’는 말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하나님 낯 세워드리는 것이다.
효도도 다르지 않다.
부모님 낯 세워드리는 것이다.
교회 생활도 그렇다.
목사도 교인 낯 세워줘야 하고, 교인도 목사 낯 세워줘야 한다.
나도 어디 가서 교인들 욕하고 다니지는 않지만, 자기 교인 자랑하는 목사들을 만나면, 살짝 부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수님이 고향을 자주 찾기는 힘들다. 58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그렇다면 그들에게 좋은 기회였다.
나사렛이라고 문제 있는 사람이 없었겠는가?
예수님 고향이라고 병든 사람, 귀신 들린 사람, 고통 받는 사람이 없었겠는가?
그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예수님이 고향에 찾아오셨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을 믿는 선택을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많은 능력을 행하시지 않았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 6장에 보면,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셨다고 했다.
그래도 예수님을 믿는 소수가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척하는 다수를 보며 돌아서지 않고, 자신을 믿는 소수에게 능력을 행하셨다.

-오늘날 교회의 힘도, 믿음 없는 다수가 아닌 믿음 있는 소수에서 나온다.
오늘도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 없는 다수가 아닌 믿음 있는 소수를 통해서 일어난다.

-인생 최고의 선택은, 예수 믿기로 한 것이다.
예수 더 잘 믿기로 선택하라.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살기로 선택하라.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가기로 선택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