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인물(야곱) 강해 23:야곱의 계속되는 아픔들(창 35:16-29)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21-08-15 12:39
조회
592


구약인물(야곱) 강해 23
야곱의 계속되는 아픔들(창 35:16-29)
2021. 8. 15.


프롤로그

-야곱이 벧엘에서 에브랏을 거쳐 기럇아르바로 옮겨가면서, 여러 가지의 일들을 겪게 된다.
↳16-20절 아내 라헬의 죽음
↳21-22절 장자 르우벤의 서모 통간
↳27-29절 아버지 이삭의 죽음
↳보면... 하나 같이 아픈 이야기들이다.

-먼저 라헬이 해산하다가 죽는 장면이 나온다.
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라헬은 야곱이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아내이다.
↳야곱은 그녀에게 첫 눈에 반했다.
↳그래서 그녀를 위해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기며, 고된 머슴살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라반의 계교에 의해, 칠 년을 더 수고해야만 했다.
↳그토록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사랑하는 여자와 꿈에 그리던 결혼을 했지만, 그의 결혼 생활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비록 한 주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언니인 레아가 먼저 아내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마음이 라헬에게 있어도, 그렇다고 라헬만 일방적으로 가까이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레아는 아이를 순풍 순풍 출산하는데, 라헬에게는 태기 소식도 없었다.
↳한 동안 없는 것이 아니라, 상당 기간 동안 없었다.
↳그러다가 어렵게 아들을 하나 낳았다.
↳그 아들이 요셉이다.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떠나기 몇 년 전에, 요셉이 태어났다.
↳라헬은 요셉을 낳은 후, 또 아들을 낳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그런데 그 소망이 이뤄지기는 하는데, 자기 목숨과 그 아들을 맞바꾸었다.
↳기막힌 삶의 아이러니다.

-라헬의 죽음과 베냐민의 출생이 의미하는 바를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이렇다.

1. 인생에 있어서 삶과 죽음은 상존한다는 것이다.
↳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다.
↳새 생명이 태어나는가 하면, 또 다른 생명은 유명(幽明)을 달리하기도 한다.
↳이것은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한편인 삶만을 인정하고, 다른 한편인 죽음은 부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죽음을 부정한다고 해서, 죽음이 오지 않는 건 아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소리 없이 다가와서, 갑자기 임하게 된다.
↳사실 인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죽음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죽음에 대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죽음이 닥쳤을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생명보험에 들어야 하는가?
↳연금에 가입해야 하는가?

-들을 수 있다면... 드는 게 좋다.
↳형편이 닿으면... 가입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생명보험에 드는 것이, 또 연금에 가입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도움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대처는 못 된다.
↳이 땅의 삶이 전부라면, 생명보험이나, 연금이 좋은 대처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죽은 후에는, 다 그리스도 앞에 서야 한다.
↳그곳에서 인생의 결산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우리는 회계를 해야 한다.
↳플러스 인생을 살았는지, 마이너스 인생을 살았는지를, 주님께 결과 보고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진짜 준비해야 할 것은, 생명보험이나 연금이 아닌 것이다.

-그럼 진짜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주님 앞에 내놓을 인생의 열매이다.
↳믿음의 열매, 소망의 열매, 사랑의 열매, 감사의 열매, 화평의 열매, 전도의 열매, 기도의 열매…등이다.
↳이런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한 마디로 예수 잘 믿어야 한다.
↳그럼 어떻게 믿는 것이, 예수 잘 믿는 것일까?
↳말씀대로 믿는 것이 잘 믿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대로 믿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한다.
↳말씀대로 믿기를 원하면서, 성경을 멀리한다면 말이 안 된다.
↳바빠서 성경 읽을 시간도 없다면, 그건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분주하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경을 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도록 하시지 않았다.
↳그렇게 바쁘게 사는 사람이, 혹 죄를 지었을 때, 회개할 시간이라도 있겠는가?
↳우리는 너무 바빠서, 조용히 자신을 성찰해 볼 시간도 없다.
↳그래서 가끔 하나님이 강제로 휴식을 부여하실 때가 있다.

둘째 선포된 말씀인 설교를 들어야 한다.
↳설교를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설교를 반복하여 들으면 더 좋다.
↳주일예배가 끝나자말자, 예배 때 전했던 설교 전문을, 교회 홈페이지에 올린다.
↳그리고 그 주간 목요일 오후 2시 30분 포항극동방송을 통하여 다시 들을 수 있다.
↳주일예배설교를 문자로 다시 볼 수 있고, 음성으로 다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설교는 한 번 들어서는 다 소화할 수 없다.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실제로 예배를 마치고 교회당 문을 나서기 전에, 설교 내용을 거의 까먹어버린다.
↳그러다보니 예수 믿는 모양은 있는데, 말씀과는 무관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믿은 지 오래 돼도, 늘 그 모습이고,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다.

-그날 주님 앞에 내놓을 열매가 준비되어 있는가?
↳아직 준비가 더 되었는가?
↳그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얼마나 더 기다려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무한대로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은 이 자리에 있지만, 다음 주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당장 내일 주님 앞에 서야 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주님 앞에 내놓을 열매를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라헬의 죽음과 베냐민의 출생이 의미하는 바가 또 있다.
2. 우리는 자녀들에게 물려줄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라헬은 난산 끝에, 야곱의 열두 번째 아들인 베냐민을 낳았다.
↳그러나 산고를 견디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라헬은 그토록 염원하던 둘째 아들을 낳았지만, 정작 그 아들을 품에 안아보지도 못한 것이다.

-그녀는 죽어가면서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다.
↳베노니는 ‘슬픔의 아들’이란 뜻이다.
↳라헬 입장에서는 그렇게 부를만했다.
↳너무나 고통스럽게 낳은 아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자신의 운명이 슬프게 여겨졌을 것이다.
↳아직은 어린 요셉과, 막 태어난 핏덩이를 놔두고, 눈을 감아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한스러웠을 것이다.

-그녀가 난산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아마 나이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늦게 낳은 요셉의 나이를 십대 중반으로 볼 때, 라합은 이미 50이 넘었을 것이다.
↳더구나 만삭의 몸으로 여행 중이었다.
↳야곱도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으니까, 슬픔에 처하기는 마찬가지다.
↳가장 사랑하는 아내가, 그것도 막내를 낳자마자 죽었으니, 그 슬픔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슬픔이 아들에게 대물림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가 죽으면서 지은 이름, 어찌 보면 유언과도 같은 이름을 바꾼다.

-그가 바꾼 이름이 ‘베냐민’이다.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이라 뜻이다.
↳오른쪽은 탁월함을 상징한다. 권능을 상징한다.
↳여기 야곱이 그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담겨있다.
↳엄마를 일찍 여윈 아픔을 이겨내고, 탁월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있다.
↳그 점에 있어서 야곱은 지혜로웠다.
↳이제 막 출발한 아이에게, ‘슬픔의 아들’이란 이름은 너무나 가혹하다.
↳특히 이름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할 때, ‘베노니’는 정말 맥 빠지는 이름이다.

-라헬처럼 슬픔을 대물림해서는 안 된다.
↳슬픔은 자기 대에서 끊어야 한다.
↳자녀에게 고통의 짐을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
↳재물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자녀에게 빚을 잔뜩 물려주고 죽는 사람이 있다.
↳극단적인 죽음을 선택하여, 자녀의 가슴에 평생 고통을 묻어두고 죽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어떻게든 자녀들에게 좋은 유산을 남겨야 한다.
↳우리의 죽는 모습이 좋아야 한다.
↳자녀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자랑할 수 있도록 깨끗하게 죽어야 한다.
↳그다음에 많은 것은 물려주지 않아도, 자식이 부모님에 대해 긍지를 갖도록 죽어야 한다.
↳‘우리 아버지는 일생을 올곧게 사셨다.’
↳‘그분은 신앙양심을 따라 치우치지 않고 용기 있게 사셨다.’
↳‘우리 어머니는 일생을 아름답게 사셨다.’
↳‘그분은 어려운 이웃과 아픔을 함께 했고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로 사셨다.’
↳뭐 우리가 훗날 자녀들에게, 이런 말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헬의 죽음과 베냐민의 출생이 의미하는 바가 또 있다.
3. 한 알의 밀알에 대한 교훈이다.
↳라헬은 비록 슬픔 가운데 죽었지만, 그녀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그녀로 인하여,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녀가 베냐민을 낳음으로써,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근간이 마련된다.
↳그녀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한 알의 밀알 같은 죽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느냐에 따라, 특별한 것이 될 수도 있고, 평범한 것이 될 수도 있으며, 치욕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한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치욕적인 죽음을 맞기도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특별한 죽음이란, 한 알의 밀알 같은 죽음이다.
↳밀알의 죽음이 특별한 것은, 자기가 죽음으로 새 생명이 태어나게 하고, 나아가 더 많은 생명을 있게 하기 때문이다.

-밀알의 죽음을 맞이한 이가 있다.
↳다름 아닌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라는 밭에 한 알의 밀알이 되셨다.
↳죽음으로 부활의 생명으로 태어나셨고, 더 많은 생명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하셨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한 알의 밀알을 예로 드셨다.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우리더러 세상에서 한 알의 밀알로 살라는 요구이다.
↳죽지 않고 한 알 그대로 있을 것인지,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하신다.
↳우리가 좋든 싫든, 한 번은 죽음과 맞닥트려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해나 끼치다가 결국 치욕스런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고, 그저 그런 삶을 살다가 평범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고, 한 알의 밀알로서 특별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죽음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죽음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라헬의 죽음과 베냐민의 출생이 의미하는 바가 또 있다.
4. 우리는 순례자라는 사실이다.
↳야곱은 라헬이 죽자 베들레헴 길에 장사지냈다.
↳야곱은 지금 이삭이 살고 있는 본향,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향해 가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베들레헴 길에 장사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곳에다 초막을 짓고, 3년 상을 치르고 있지 않았다.
↳라헬의 무덤을 뒤로하고, 자기가 가던 길을 떠났다.
↳그게 야곱의 매정함을 보여주는 것일까?
↳아니다. 순례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순례자는 정착하지 않는다.
↳순례자는 본향을 향해서, 끊임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이다.

-성경은 우리를 순례자에 비유한다.
↳본향을 향해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본향이 있다.
↳우리에게는 하늘의 처소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원한 본향을 향하여, 하늘의 처소를 향하여, 오늘도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이 세상은 우리가 영원히 머무를 장막이 아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잠시 머무르는 곳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지나친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야곱처럼... 붙들고 있어봤자 소용없는 것을 붙들지 말고, 빨리 떨쳐버리고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사실 야곱은 지금 라헬을 잃고, 주저앉아 있어야 정상이다.
↳털썩 주저앉아,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워 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그는 일어나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야곱이 묘비를 붙들지 않고, 하나님을 붙들었기에 가능했다.

-힘든 상황에서, 야곱을 다시 일어서게 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기 바란다.

-내가 철썩 같이 믿었던 사람이, 갑자기 떠날 수 있다.
↳백년가약을 맺었던 사람도, 어느 날 훌쩍 떠날 수 있다.
↳평생 함께 하겠다고 맹약했던 사람이, 등 돌리고 떠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기 바란다.

-라헬을 잃은 충격이 아직도 선한데, 또 한 차례 충격이 야곱에게 닥쳤다.
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한 것이다.
↳도저히 있을 수 없고, 아니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집안에서 일어나고 만 것이다.
↳이건 율법에서 명백하게 금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아버지의 권위를 훼손시키고, 그 명예를 더럽힌 패륜이다.

-율법은 이런 사람을 엄벌에 처하도록 했다.
레 18:8 너는 네 아버지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아버지의 하체니라
레 20:11 누구든지 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런데 르우벤이 그 일을 저지른 것이다.
↳야곱이 자기 귀로 듣지 않았으면 차라리 나을 뻔했는데, 그걸 어떻게 듣게 되었다.
↳르우벤이 야곱에게 어떤 아들인가?
↳장남이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옛날에 장남에게 거는 기대는 대단했다.
↳그런데 르우벤은 그 기대를 한 순간에 저버리고 말았다.

-야곱은 속으로 분노했을 것이다.
↳‘네 놈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그 분노는 차츰 속앓이로 바뀌어 갔을 것이다.
↳이런 부끄러운 일을, 누구에게 말하겠는가?
↳이런 집안의 수치를, 누구를 붙잡고 하소연하겠는가?
↳시간이 지날수록, 야곱 자신의 속만 썩어 문드러져야 했다.

-만약 우리가 야곱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부자지간을 의절하고, 르우벤을 관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야곱은 어떻게 했는가?
↳모른 척하고 넘어갔다.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인데, 야곱은 르우벤에 대해 끝까지 참았다.

-대신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다.
↳결국 하나님께서 르우벤을 심판하신다.
↳그렇다고 르우벤이 당장에 벼락을 맞은 것은 아니다.

-야곱이 죽기 전에 하는 유언을 통해 심판하셨다.
창 49:3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4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르우벤은 자기 일을 아무도 모르는 줄 알았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 앞에서도, 태연하게 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걸 똑똑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빛 앞에 어두움이 드러나듯, 모든 사람 앞에서 그의 부끄러움을 드러내셨다.

-당장에 들키지 않았다고, 안심할 일이 아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어림없다.
↳오늘 징계가 임하지 않았다면, 그건 매가 쌓여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심하게 아니라, 오히려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르우벤은 순간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일생을 망치고 만 것이다.
↳순간의 욕망은, 항상 아름다움으로 포장되어 다가온다.
↳그러나 그 포장을 뜯는 순간, 너무나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르우벤은 자기는 물론이고, 자기 자손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르우벤의 후손 중에는, 사사 한 사람, 예언자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 아닌가?

-우리는 자손들에게 믿음을 계승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 믿는 것처럼 믿어도 괜찮을 것 같은가?
↳자녀들에게 ‘너는 이 아빠처럼 믿어라.’ ‘너는 이 엄마처럼만 믿으면 좋겠다.’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보다 더 잘 믿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야곱의 열두 아들의 명단이 나온다.
23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24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25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26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여기에 이 명단이 나오는 것은, 라헬이 베냐민을 낳음으로써, 이스라엘 12지파의 근간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함이다.
↳열둘은 꽉 찬 수이다.
↳그러니까 베냐민이 없으면 안 되었다.
↳산모를 살리려고 베냐민을 낙태했으면, 어쩔 뻔했는가?
↳또 르우벤이 계모를 범했다고, 그를 돌로 쳐죽였으면, 어쩔 뻔했는가?
↳하나님의 계획이 틀어지게 된다.

-택한 백성에게도 혹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죄를 범할 수도 있고, 이런저런 실수를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한 번 택한 백성은 끝까지 책임져주신다.

-존 브렌츠는 마틴 루터의 친구이자, 용감한 종교개혁자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는 종교개혁에 반대하여, 수많은 성직자들을 죽이고자 했던 스페인 왕 찰스 5세의 미움을 받게 되어 쫓기게 되었다.
↳어느 날, 스페인의 수색대 기병들이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때 구원의 음성이 들려왔다.
↳“존, 빨리 빵 한 조각을 가지고 아랫마을로 내려가거라. 거기서 문이 열려진 집을 발견하면, 그 집 지붕 밑으로 숨어라.”

-존은 그 음성대로 마을에 내려가, 문이 열려진 집을 발견하고, 그 집 다락에 몸을 숨겼다.
↳이후 수색이 계속되는 동안, 존은 빵 한 조각만을 가지고, 그 다락방에서 약 14년간 숨어 지냈다.
↳빵 한 조각이 14년간의 양식이 될 수 있겠는가?
↳이성으로 납득할 수 없다.
↳그러나 존은 그 곳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을 지낼 수 있었다.
↳거기에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기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존이 다락에 숨어 지내는 동안, 날마다 암탉이 한 마리씩 다락방에 올라왔다.
↳그러고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달걀을 하나씩 낳고 가는 것이었다.
↳이 일은 14년간 한 번도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 달걀을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이다.

-14년이 지난 어느 날, 닭이 올라오지 않았다.
↳기이하게 여긴 그는 바깥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병사들이 마침내 모두 떠나갔다고 했다.
↳그리하여 존은 아무 탈 없이, 14년 만에 그 다락방에서 나오게 되었다.

-루터의 친구 존 브렌츠를 지켜주신 하나님이, 코로나19 상황을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도 지켜주실 줄 믿는다.

-야곱은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가 살고 있는 기럇아르바의 마므레에 도착할 수 있었다.
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만났다.
↳야곱은 눈먼 아버지를 정성껏 봉양했을 것이다.
↳그 동안 맘 고생시켰던 것에 대해, 참회하는 심정으로 잘 돌봐드렸을 것이다.
↳잃어버린 둘째 아들에게 효도를 받은 이삭은,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이삭은 노년에 무능한 면을 보이기도 했으나, 죽음 직전에 잃어버린 아들의 품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삭은 잘 죽은 것이다.
↳그는 온유한 성격대로 죽었다.
↳그는 온유하게 살아온 삶처럼,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아버지 이삭이 죽자,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이 연합했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형제는 사이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두 사람이 언제 불편한 사이였느냐 싶을 정도다.
↳이것도 이삭의 복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살 때도 잘 살아야 하지만, 죽을 때도 잘 죽어야 한다.
↳분명한 사실은, 잘 죽는 것을 통해 내가 잘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 살기 위한 기도도 해야 하지만, 잘 죽기 위한 기도도 해야 한다.
↳우리가 끝까지 예수 잘 믿어야, 그게 가능하다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