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2022):우리가 다시 들어야 할 복음(롬 1:11-17)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22-04-10 12:28
조회
509


종려주일(2022)
우리가 다시 들어야 할 복음(롬 1:11-17)
2022. 4. 10.


프롤로그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자칫 타성에 젖기 쉽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아는데, 구원의 감격은 희미하다.
↳내가 복음을 믿긴 하는데, 복음의 열정은 식어 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긴 하는데, 첫사랑은 잃어버렸다.

-우리는 다시 구원의 감격에 겨워야 한다.
↳우리는 다시 복음의 열정에 타올라야 한다.
↳우리는 다시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가 그 동안 복음을 많이 들어왔다.
↳예배 때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런데도 왜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한다고 하는가?
↳우리가 복음을 잊고 살 때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음을 많이 접한 것과, 복음으로 사는 것은 다르다.
↳복음을 아는 것과, 복음대로 행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이다.

-복음을 받은 우리에게 할 일이 있다.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믿는 자를 만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은사를 나누게 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신령한 은사”란, 뭐 이상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말한다.
↳믿는 사람들과 만날 때, 신령한 은사를 나누곤 하는가?
↳나를 감격시킨, 나를 변화시킨 그 복음을 나눠본 적이 있는가?
↳혹 별 영양가도 없는 시답잖은 얘기로, 시간을 흘려보내지는 않는가?

-우리는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 교회에 대해, 목회자에 대해 말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일단 멀리하는 게 좋다.
↳혹 목회자에 대한 불만이 속에 있어도, 자녀들 앞에서는 침묵해야 한다.
↳교회와 목회자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하면서, 자녀들이 신앙생활 잘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믿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신령한 은사를 나눠야 한다.
↳내가 받은 은사로, 어떻게 저 사람을 세울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나는 ‘믿음의 식구’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나눈 ‘식구들’이기도 하다.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에까지 함께 갈 믿음의 형제자매들이다.
↳만약 그런 우리에게 반목과 불신이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께 혼날 일이다.

-바울은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한다고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준다는 말이다.
↳믿음의 식구들끼리 모이면, 그래서 좋은 것이다.
↳믿음의 가족끼리는, 서로 얼굴만 쳐다봐도 좋다.
↳내가 저 형제를 보면 기쁘고, 저 형제는 나를 보면 기쁘고, 목회자는 교인들을 보면 감사하고, 교인들은 목회자를 보면 감사하다.
↳이래야 되고, 이래야 정상적인 교회이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우들을 생각하며, 이런 고백의 편지를 썼다.
빌1: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바울은, 참으로 행복한 목회자이다.
↳아울러 빌립보교회 교우들 역시, 바울 못지않게 행복한 성도들이다.
↳그렇게 된 이유가 나온다.
↳서로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처음부터 복음 안에서 교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러 번에 걸쳐, 로마교회 교우들을 만나고 싶어 했다.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이런 바울의 의향은, 사도행전 19장에도 나온다.
↳바울의 일방적인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예수 믿은 후부터,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가보지 못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갔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에 관광하러 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성공을 위해 유학 가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로마에 가고 싶어 한다.

-바울은 자신의 전 생애를 복음을 위해 드렸다.

-보면 젊을 때 자기생활에 매여 아무것도 못하다가, 나이 들어서야 주를 위해 무엇을 해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혹 있다.
↳젊어서 자기 하고 싶은 거 다해보고, 하나님 앞에 갈 날이 가까워서야 주의 일을 해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혹 있다.
↳그렇게 된다는 보장이 있을까?
↳주어진 헌신의 기회를 미루지 말아야 한다.
↳자기에게 봉사할 기회가 언제까지 주어질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바울이 로마 교회를 방문하려고 한, 또 다른 목적이 있다.
13b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그것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복음을 들어야 하는 주된 이유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열매를 원하신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서 전도의 열매를 찾으실 수 있다.

-어떤 초등학생이 있었다.
↳예수를 얼마나 잘 믿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의 부모님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
↳그는 예수 믿고 구원의 감격을 벅차게 느꼈기 때문에, “이 예수님을 나만 믿어서는 안돼. 아빠도 믿어야 되고, 엄마도 믿어야 돼” 하는, 견딜 수 없는 열망에 사로잡혀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 안 믿는 아버지를 보고, 날마다 예수 믿자고 졸라댔다.
↳아빠는 단지 그 아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귀엽기만 했다.
↳“그래 그래. 너부터 먼저 믿어. 틈나는 대로 믿을 게.”
↳“그래, 네가 너무 그러면, 내가 오히려 부담스럽잖니?”
↳이렇게 해서 적당히 달래 넘어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통사고가 나서, 그 아이가 죽고 말았다.
↳부모의 슬픔을 무엇으로 달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죽은 아들이 사용하던 방에 들어가, 그 아이의 유품을 하나하나 만져 보았다.
↳옷도 만져보고, 읽던 책도 만져 보고, 그러다가 노트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일기장이었다.
↳그 일기장을 펴본 아빠는, 하마터면 까무러질 뻔했다.
↳죽기 며칠 전에 쓴 일기 내용인데, 이런 기도문이 적혀 있었다.
↳“하나님, 우리 아빠 꼭 꼭 예수 믿게 해 주세요. 하나님, 아빠가 예수 믿기 위해서, 내가 죽어야 한다면 나는 죽기를 원합니다. 내가 죽어서라도 아빠를 예수 믿게 해주세요.”

-그는 그 글을 읽으며, 많은 후회를 했고, 또한 감동을 했다.
↳“예수를 믿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생명을 내어놓고 내가 믿어야 할 일이었던가?”
↳드디어 그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다.
↳아들의 생명과, 자기 구원을 바꾼 셈이 되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 도처에서 수백만의 젊은이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데 큰 몫을 담당하였던 C.C.C.의 국제본부 부총재 이야기이다.

-한 초등학생의 전도에 대한 열정이 아버지를 전도했으며, 그 아버지를 통하여 많은 젊은이들을 그리스도 앞에 헌신시켰던 것이다.
↳영혼구원에 대한 열정이 차갑게 식은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한다.
↳복음을 들어야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박토가 되어버린 우리 마음 밭을, 두루 파고 거름을 주어야 한다.
↳화석처럼 굳어버린 고목나무와 같은 우리의 신앙에, 아프지만 전지작업을 해야 한다.
↳그 출발이 복음을 다시 듣는 것이다.

-그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인가?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바울은 스스로를 복음의 빚진 자로 인식하고 있다.
↳자기 인식이 중요하다.
↳자기가 자기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중요하다.

-파리에서 죄수 한 사람이 여자로 분장하여 탈옥했다.
↳목소리도, 몸짓도, 옷차림도, 누가 봐도 영락없이 여자였다.
↳그런데 도시 중심가에서 아주 쉽게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패션 의상이 걸려 있는 양장점 앞을, 이 사람이 그냥 지나쳤기 때문이다.
↳여자라면 그냥 지나갈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한국에서도 있었다고 한다.
↳정신병원에서 환자 한 명이 무단 탈출을 했다.
↳이 환자는 평소에 자기가 남자인데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유달리 옷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하다가, 아마도 명동에 갔을지도 모른다고 추측을 하고 가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패션 가게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그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 두 이야기에서 공통점이 있다.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인식하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죄수는 여장을 하기는 했으나, 자기가 여성이라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남성처럼 행동하고 말았다.
↳반대로 정신병원의 환자는, 자기가 남성이었지만 자기가 여성이라고 인식했기에, 여성처럼 행동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빚진 자라고 고백한다.
↳부채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빚진 자의 마음이, 어디 한 시인들 편안했겠는가?
↳빚진 자는 항상 죄인이다.
↳큰소리 한 번 못 친다.
↳빚진 것을 다 갚기 전까지는, 마음이 자유할 수 없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고서는, 전혀 자유할 수 없는 빚진 자로 자신을 인식했다.

-복음에 빚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처럼 생각이 다르고, 삶의 태도가 다르다.
↳빚진 자가 빚을 갚았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을 행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복음 전하는 것을 당연시 했다.
↳어떤 보상을 기대하지 않았다.
↳당연히 할 일을 한다는 태도를 가졌다.
↳누구한테도 “나 좀 알아달라”고 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은 복음의 빚을 갚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복음은 원래는 믿지 않는 사람에게 전하게 되어 있다.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그런데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당시 주위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그들을 제쳐두고, 굳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다시 복음을 전하는 것에,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예수를 알고 있는 자들에게, 이미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주변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 소문이 나 있는 사람들한테 복음전하기를 원한다고 하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자신의 원칙을 어겨가면서,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복음전하기를, 그처럼 원했는가?
↳로마서를 연구한 학자들도, 바울이 왜 그렇게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애를 썼을까 하는 데에, 다양한 이론이 있다.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은,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의도적으로 복음을 한 번 더 전하려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복음을 다시 전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무렵은, 로마에 교회가 세워진지 20년 정도 되었다.
↳로마 교회는 20년 전통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첫 믿음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꽤 많았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로마서 13장 13절 이하에 보면, 로마교회의 상황이 조금 나온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라고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다.
↳당시 로마 교회 안에, 방탕한 사람들이 있었고, 술 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더구나 교회 안에, 음란과 호색하는 사람들, 쟁투와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드나들고 있지만, 무엇인가 잘못된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이다.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할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만 필요한가 하는 질문은, 별 의미 없다고 본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해서, 복음을 다 알고 있고,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더 나아가, 복음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도 필요하다.
↳오늘날 한국 교회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로마서 13장 13절과 흡사하지 않겠나.
↳그렇다면 로마에 있는 교인들만,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한다.

-교회의 역사가 깊어질수록, 문제가 많이 쌓일 수 있다.
↳예수의 사랑은 식어버린 지 오래다.
↳십자가의 피가 말라 버린 지 옛날이다.
↳겉보기엔 규모가 있어도 복음이 힘을 잃고 있다.
↳복음에 대해 이상 반응을 보이곤 한다.
↳마음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자기 생각에 빠져있다.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초신자가 아니다.
↳거의 다가 예수를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이다.
↳예수를 처음 믿을 때는, 복음을 잘 듣는다.
↳복음을 생각하고, 주야로 묵상한다.
↳복음대로 살려고 어떻게든 애를 쓴다.

-그러나 믿은 지 오래될수록, 복음의 영향력이 미미해진다.
↳다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점점 교회 생활에, 종교 형식에 익숙해진다.
↳믿음이 성장하거나 인격이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술만 느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해, “나는 그런대로 예수를 잘 믿고 있다” 라고 생각한다.

-이 걸 남의 얘기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한다.
↳우리는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복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교회 밖에 보다 교회 안에 있다.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 번 깨어져야 할 사람이, 교회 안에 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 굳은 마음이 녹아져야 할 사람이, 교회 안에 있다.
↳예수의 이름 앞에서 자기가 죽고 다시 태어나는 은혜를 받아야할 사람이, 교회 안에 있다.

-복음을 듣는다는 말은, 말 그대로 듣는다는 말도 되고, 배운다는 말도 되고, 깨닫는다는 말도 되고, 묵상한다는 말도 된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구원, 죄사함, 영생, 하나님나라와 같은 기본적인 메시지를 들을 때마다, 귀가 번쩍번쩍 열리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일컬어서, 복음을 다시 듣는다고 말한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어떤 마음인가?
↳‘또 그 소리’하는 마음이 든 적은 없는가?
↳말씀이 마음문을 노크할 때, 슬쩍 마음문을 걸어 잠그지 않는가?
↳예수 십자가라는 말이 들릴 때, 어떤 감동이라도 밀려오는가?
↳구원에 대한 설교를 들을 때, 영혼 깊숙한 곳에서 감사가 나오는가?
↳천국에 대한 말씀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소망이 생기는가?

-우리는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한다.
↳그리고 복음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진정으로 복음을 들은 사람은, 복음을 자랑하게 된다.
↳복음을 들은 사람이라면, 복음을 자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무슨 말인가?
↳“나는 이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는 이 복음을 선포하겠다.”
↳“나는 이 복음을 위해서라면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

-바울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자기 삶의 가치를 복음에 두었기 때문이다.
↳복음의 가치를 자기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다.

-그에 반해, 우리는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
↳평생을 살면서, 나는 오로지 이 목적을 위해서 살겠다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그 목적이 하나님께 있는가? 내 자신에게 있는가?
↳그것도 아니면 내 자식들에게 있는가?

-바울이 그토록 자랑스러워 한 복음이 무엇인가?
↳그가 말한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영혼이 부패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정신적인 혼란과 육체적인 질병으로 고통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으면, 그것이 우리의 정신세계는 물론이고,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불안해하던 사람이 평안을 누리게 되고, 고독해 하던 사람이 주님과 더불어 동행함으로써 고독을 잊게 되는 것이다.
↳불평, 불만, 원한에 사무쳐 있던 사람을, 모두 용서해버리기 때문에 마음에 자유가 찾아온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기 때문에, 세상에서 여러 가지 마음 상하는 일들이 있어도, 그것으로 인해 병이 들거나 거꾸러지는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영혼의 구원이, 정신적인 안정을 가져오고, 더 나아가 육체의 고통까지 치료한다.
↳그뿐인 줄 아는가?
↳술 마시고 음행하고 도박하던 자가, 그 죄를 끊고 성실하게 일하니까, 가정이 행복해진다.

-물론 구원은 사람이 노력해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은 절대로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진정한 구원은 인간 밖에서 와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이 진짜이다.
↳의롭게 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단 한 가지 길을 열어 놓으셨다.
↳복음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또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렇다고 누구나 자동으로 구원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믿는 자에게만 구원을 주신다.
↳16절에 나오는, “모든 믿는 자”란 예수 믿는 사람을 가리킨다.
↳성경을 한 번도 못 읽었다거나, 먹고 사는 문제로 교회를 몇 주 빠졌다고, 구원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벤디에르라고 하는 사람이 쓴 『요새의 함락』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자신이 겪은 경험담 하나가 기록되어 있다.
↳B-17기를 몰고, 독일의 카셀이라고 하는 도시를 폭격하게 되었는데, 폭격을 하다가 그만 독일 나치군이 쏘아대는 대공포에 연료탱크가 맞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폭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지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연료탱크를 조사해 보았더니, 열한 발의 탄환이 연료탱크에 박혀 있었다.
↳그런데도 연료탱크가 폭발을 하지 않았으니, 이게 얼마나 큰 기적인가?

-탄환을 전부 수거해서 병기고에 보내어 분해해 보았더니, 열 개가 전부 텅텅 비어있는 탄환이었다.
↳탈환에 화약이 들어 있지 않으니, 폭발이 안 되는 것은 당연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탄환 하나에는, 돌돌 말아서 넣어놓은 메모지가 들어 있었다.
↳종이를 펴보니까, 짤막하게 “이것이 지금 당신에게 할 수 있는 전부요.”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마도 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이 너무 경제적으로 어려우니까, 화약이 떨어져 탄알을 제대로 못 만드는 상태에서, 위협이라도 할 양으로 빈 탄환을 쏘아대었던 것이다.

-어쩌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비행기를 향해 쏘아댄 불발탄과 흡사할 수 있다.
↳주일이면 예배에 나오는 신자들은 여전한데,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라.
↳장관 중에, 국회의원 중에, 어디 기독교인들이 한두 사람일까?
↳조찬기도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기업마다 신우회원이 적은 수가 아니다.
↳신학교를 졸업해도 갈 곳이 없고 안수 받아도 사역지가 없을 정도이다.
↳목회자 수는 해를 거듭할수록 많아지지만, 교회는 점점 세속화 되고 있다.

-이렇게 답답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다시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령의 능력이 활활 타오르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구원의 감격을 다시 회복하고, 풍성한 은혜의 세계에 파져들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을 다시 듣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하고 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가 이신칭의(以信稱義) 혹은 이신득의(以信得義)라는 말을 쓰는데, 이 뜻은 의로워진다는 말도 아니고, 의인이 된다는 말도 아니며, 의인으로 만든다는 말도 아니다.
↳의인으로 간주한다는 말이다.
↳의인의 자격으로 받아준다는 말이다.
↳살을 붙여보면, 자기가 행함으로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도달하는 의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여서 의인이 된 것을 말한다.

-우리가 왜 복음을 들어야 하는가?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하는가?
↳거기에 우리의 살 길이 있고, 우리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복음을 들음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감격이 회복되고, 생활의 활력이 넘쳐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