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13:누구를 위한 혼인이어야 합니까?(고전 7:25-40)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9-03-03 00:00
조회
885



고린도전서 강해 13
누구를 위한 혼인이어야 합니까?(고전 7:25-40)
2019. 3. 3.


프롤로그

-결혼은 행복의 시작인가? 불행의 시작인가?
결혼은 불행의 끝인가? 행복의 끝인가?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지인의 딸에게 보낸 결혼식 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도 한 번밖에 결혼한 적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별로 좋지 않을 때 나는 늘 뭔가 딴생각을 떠올리려 합니다. 그렇지만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좋을 때가 많기를 기원합니다.”

-서양 격언인데 특히 미혼 청년들은 귀담아 들으라.
“여자는 남자가 나아질 것이란 기대를 품고 결혼하지만, 남자는 나아지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가 변하지 않을 것이란 기대를 품고 결혼하지만, 여자는 변한다.”

-프랑스 극작가 아르망 살라크루는 말했다.
“사람은 판단력의 결여에 의해 결혼하고, 인내력의 결여에 의해 이혼하고, 기억력의 결여에 의해 재혼한다.”

-당시 처녀는 무조건 결혼해야 했다.

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26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무조건 결혼하는 것을 당연시 했다.
결혼하지 않을 자유가 없었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모님에 의해 결혼해야 했다.
사회 분위기에 의해 결혼해야 했다.
결혼하지 않으면 무슨 장애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부모에게도 불효하는 것이었다.

-그런 시대에 처녀에게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는 말은 보통 말이 아니다.
그리고 그냥 지내는 것이 좋은 이유를 댔다.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임박한 환난”은 세상 종말로 생각할 수 있다.
아니면 앞으로 고린도에 임할 환난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임박한 환난이 닥치면 혼자가 낫다는 판단에서다.
그러함에도 결혼해야겠다면 임박한 환난을 함께 헤쳐 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해도 된다.

-제임스 돕슨의 말이다.

“함께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과 결혼하지 마라. 없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과 결혼하라.”

-그런 사람이라면 임박한 환난을 함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결혼해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기혼 남성에게 주는 권면이다.

27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남자의 결혼을 아내에게 매인 것으로 표현했다.
결혼해 보니 매인 것이 아니다.
매일 줄 알면서 결혼하는 것이다.
누구의 강요가 아닌 자발적으로 매이는 것이다.
설사 모르고 결혼하여 매였다고 해도 놓이기를 구하지 말라고 한다.
자기가 선택한 것에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100년 전만 해도 부모에 의해 짝이 정해지곤 했다.
자기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아내에게 매이게 된 셈이다.
그럼 자기가 선택하지 않았으니까 아내에게 놓이기를 구해도 될까?
그런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아내에게 놓였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아내에게 놓였는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
사별로 놓일 수 있고 이혼으로 놓일 수 있다.
아무튼 결혼했다가 혼자가 된 남자를 일컫는다.
그런 사람을 ‘돌싱’이라고 한다. 돌아온 싱글...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는 결혼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결혼은 새장과 같다. 밖에 있는 새들은 부질없이 들어가려고 한다. 안의 새들은 부질없이 나가려고 한다.”
인간의 심리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남편은 아내 없이 며칠 정도는 자유를 만끽한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그 동안 아내 눈치 보느라 못했던 것 실컷 하고, 못 먹었던 것 실컷 먹는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면 빈자리가 느껴진다.
자기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아내의 손길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남편 없는 여자는 별 표가 나지 않아도, 아내 없는 남자는 금방 표가 난다.

-그럼에도 바울은 아내에게서 놓였으면, 굳이 다시 구하여 매이지 말라고 한다.
혼자인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 신기하다.
하긴 스님도 신부님도 결혼식 주례를 잘 한다.

-바울은 결혼하는 것을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한다.

28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장가가도 죄 짓는 게 아니고 시집가도 죄 짓는 게 아니다”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결혼을 그다지 적극적으로 권하지 않는다.
결혼을 축복이라고 하지 않고, “죄 짓는 것이 아니요”라고 표현했다.
결혼생활이 육신에 고난이 따르는 것은, 예나 오늘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결혼한 사람의 육신에 고난이 따르니,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뭘 해도... 감당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한다.

-출산이 대표적이다.
저출산이 사회적 문제가 된지 오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다산이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양육할 경제적 능력이 없는데, 무조건 많이 낳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

-요즘 출산에서 대학교육까지 드는 비용이 4억이 된다고 한다.
경제적인 논리로만 보면, 한 명을 낳아 키우는 것도 큰 부담이다.
한 명을 키우는데 4억 드니까, 3명이면 12억이 든다는 논리다.
물론 자녀는 경제적인 논리로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고 자녀를 양육하는데 경제력을 무시할 수도 없다.

-우리 집엔 3명의 자녀가 있다.
우리 집 자녀들도 결혼하면, 3명씩 자녀를 낳으면 좋겠다.
그건 어디까지나 내 바람일 뿐이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낳으면 된다.

-집도 그렇다.
결혼하자말자 집부터 장만하려고 한다.
집을 장만하여 그곳에 신혼집살림을 꾸미면 좋다.
부모님이 재벌이면 문제가 없다.
아니면 자신이 그만한 재력이 있다면 역시 문제없다.

-평범한 직장인이면서 집을 장만하여 신혼집살림을 꾸민다면, 폼은 날지 몰라도 처음부터 상당한 부채를 안고 출발한다.
애써 일하여 돈을 벌지만, 대출 이자 갚느라 고스란히 들어간다.
빛 좋은 개살구 처지가 된다.
감당할 수 있을 때 집을 사면 된다.

-왜 바울이 결혼에 신중을 기하라고 하는가?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고린도교회 교우들을 아끼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바울은 오해받을 수 있다.
독신이면서 결혼을 부정하는 사람으로 비난받을 수도 있다.
그런 중에서도 바울이 결혼에 신중을 기할 것을 권면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들을 아끼기 때문이다.
이게 영적 아비된 목회자의 마음이다.

-비단 결혼 문제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생활 전반에 대해서다.
목회자가 모든 분야에 전문가적 식견을 가지고 있을 수 없겠지만, 성경적인 가치관과 원리에 입각하여 권면할 수는 있다.

-그래서 성경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갈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우리가 왜 성경적인 가치관을 따라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왜 결혼생활이든 직장생활이든, 성경적인 원리에 따라 살아야 하는가?
그 때가 오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때를 의식하며 살았다.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러이러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때는 주님의 재림 전의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졌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즉 혼자였을 때처럼 하라는 것이다.

-그 말이 아내 눈치 보지 말고 살라는 말이 아니다.
아내가 뭐라고 하든 말든, 자기 맘대로 살라는 말이 아니다.
결혼하기 전의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말이다.

-결혼하기 전에는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다.
예배와 기도회에도 빠지지 않았다.
사역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그런데 결혼하고부터 하나씩 빠지고 놓기 시작한다.

-부부가 함께 기도하면 좋다.
부부가 함께 사역 현장을 뛰면 환영이다.
그건 부부의 신앙수준이 비슷할 때 가능하다.

-그런데 한쪽은 은혜를 사모하지만, 다른 한쪽은 은혜에 무관심하다.
한쪽은 기도의 중요성을 알지만, 다른 한쪽은 기도에 대해 관심이 없다.
한쪽은 예배는 물론이고 기도회 빠지면 큰일 나는 줄 아는데, 다른 한쪽은 많은 예배와 기도회에 꼭 다 참석해야 하냐, 한 번쯤 빠지면 어떠냐 하는 식이다.

-그러면 부부 간의 갈등이 생긴다.
교회를 가지 말라고 하기 어려우면, 집 가까운 교회 가라고 한다.
우리교회에도 불신 자매와의 결혼과 동시에, 주님과 굿바이한 청년이 있다.
불신자와 결혼하는 그날부터 선교사로 살아야 한다.
문제는 내 믿음이 선교사만큼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혼생활이 삐거덕 거릴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결혼하면 아내 때문에 울어야 할 때가 있고, 남편 때문에 울어야 할 때가 있다.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부부가 행복할 때는 그걸 모른다.
누가 그런 말을 하면, 자기와는 상관없는 말이라고 흘려듣는다.
막상 그런 일이 자기에게 닥치면, ‘왜 우리 부부에게 이런 일이...’ 하면서 당혹스러워한다.

-물론 우는 일이 계속 되지는 않는다.
끝없이 우는 일만 지속 된다면 어떻게 살겠는가?
남편의 신앙 문제로 울고 있다면, 울음이 끝날 날이 올 것을 믿으라.
눈물 병이 차게 되면, 눈물을 닦고 환한 웃음을 되찾을 날이 온다.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라고 했다.
기쁜 표정관리 하라는 말이다.
표정관리는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다.
부부가 행복하면 아무리 표정관리해도 새나온다.
하지만 사람으로 인해 얻은 기쁨은, 사실 오래가지 못 한다.
그 사람 때문에 아파할 수 있고, 그 사람 때문에 슬퍼할 수 있다.
기쁜 일이 있으면, 그 순간만 기뻐하면 된다.
이미 과거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뭐 좀 가졌다고 뽐내지 말아야 한다.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가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영원하지 않다.
언제까지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다 쓰지 못하고 갈 수도 있다.
쌓아놓다가 어리석은 부자 꼴 날 수 있다.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
영원을 위해 투자하는 것이 지혜다.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 진정한 지혜다.

-우리가 진짜 해야 할 염려가 있다.

32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주의 일을 염려하는 것이다.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를 염려하는 것이다.
혹시 그런 염려를 해봤는가?
한 번이라도 그런 염려에 붙들려 잠을 설쳐본 적이 있는가?

-진짜 해야 할 염려는 하지 않고, 세상 염려를 하지 않는가?

33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세상 염려를 대표하는 것으로,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를 들고 있다.
34절에서는 세상 염려로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를 들고 있다.

-퇴근시간이 되면, 가정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확연히 다르다.
가정이 있는 사람은 일단 돌아갈 곳이 있다.
그러나 독신은 그 때부터 방황이 시작된다.
‘어디로 갈까?’ ‘어디 가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그러다 가정이 있는 사람을 못 가게 붙잡는다.
무슨 건수를 대서라도 붙잡아두려고 한다.

-그 때 가정이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이면 힘들다.
예전보다는 많이 개선됐다고는 하나,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말을 거스르는 게 쉽지 않다.
집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윗사람한테 붙잡혀 있으면, 너무 힘들 것이다.
그래서 중간에라도 어떻게든지 도망친다.

-정상적인 가정이라면, 아내는 남편의 퇴근을 기다린다.
남편이 정상적으로 퇴근하는 것을, 아내가 기뻐한다.
동료들과 어울려 한 잔 하고 싶지만, 유혹을 뿌리치고 집으로 달려가는 것은, 기다리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라서다.
오면서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아내가 좋아하는 먹거리를 산다.
그 순간에는 죄송스럽게도 주님이 생각나지 않는다.

-마음이 갈라져서 그렇다.

34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그런 뜻에서 그냥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어설픈 독신 사역자는 위험할 수 있다.
일단 이성을 상대하기가 어렵다.
조금만 관심을 가져주면, 자기를 이성으로 사랑한다고 여길 수 있어서다.

-사역자가 가정을 가짐으로서 얻는 유익이 크다.
프로 선수들도 결혼을 한 후, 성적이 올라가는 경우가 많다.
심리적인 안정감 때문이다.
일과 후 돌아갈 곳이 있다는 데서 오는 정서적 안정감이다.
자기를 따뜻하게 반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데서 오는 심리적 안정감이다.

-아무래도 안정감이 있어야,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길 수 있다.

35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독신으로 살면서,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는 게 쉽지 않다.
우리가 다 죄인이다.
때로는 사람의 눈이 필요하다.
사람 눈치 봐서라도 흐트러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다음은 자기의 딸에 대한 말씀이다.

36 그러므로 만일 누가 자기의 약혼녀에 대한 행동이 합당하지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그 약혼녀의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원하는 대로 하라 그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그들로 결혼하게 하라

37 그러나 그가 마음을 정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약혼녀를 그대로 두기로 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38 그러므로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니라

-여기서 약혼녀는 성경 난외주에 보면 “처녀 또는 처녀 딸”로 나온다.
개역판에서는 “처녀 딸”로 번역했는데, 개정판에서는 “약혼녀”로 번역했다.
그런데 문맥을 보면, 처녀 딸로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결혼은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다.
본인이 결혼할 상대를 정했어도, 집안의 반대가 극심하면 쉽지 않다.
그게 드라마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되게 평범한 가정에서는 결혼적령기에 결혼 상대를 데려오면, “네가 좋다면 됐다” 하는 식으로 허락을 한다.
집안에서 보기에 아주 특별한 하자만 없다면 통과된다.
하지만 이름 있는 집안에서는, 집안에 한 사람을 들이는 것을 그렇게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예전에는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처녀 딸을 억지로 시집 보내놓고 속 끓이고 하지 말고, 신중하게 생각해서 하라는 권면이다.
처녀 딸을 무조건 시집보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인데, 시집 안 보내는 것도 생각해 보라고 했다.
참 보통 용기가 아닐 수 없다.

-36, 37절의 “약혼녀”를 “처녀 딸”로 보면, 38절 해석은 달라진다.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것도 잘하는 거지만,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것은 더 잘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당시 고린도사회의 가정이 얼마나 문제가 많았으면, 그렇게 말했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바울은 재혼을 막지 않았다.

39 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사별로 인해 혼자된 경우가 아니라면, 재혼을 금하셨다.

마 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마 19: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막 10: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과부의 재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없는 것을 볼 때, 그들의 재혼을 막았다고 보기 어렵다.
바울을 통해 재혼을 허락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대신 재혼의 단서가 붙었다.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믿는 자와만 하라는 것이다.
재혼해서까지 신앙적인 갈등을 겪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같은 신앙을 가져도, 재혼생활은 쉽지 않다.
정말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재혼생활이 초혼생활보다 어려우면 어렵지 쉽지 않다.
처음부터 간단치 않은 환경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재혼이 가능하지만 해보면 고생이라는 것을, 은근 슬쩍 비추고 있다.

40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신 불신을 막론하고 재혼한 사람들 중, 열의 아홉은 동의할 것이다.

-몽테뉴의 말을 다시 인용하겠다.
“결혼은 새장과 같다. 밖에 있는 새들은 부질없이 들어가려고 한다. 안의 새들은 부질없이 나가려고 한다.”

-그럼에도 가정의 가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정용철의 “이것 하나만으로도”란 글을 소개하면서 말씀을 맺겠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을 언제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하나가 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과

언제라도 전화를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가 나에게 얼마나 큰 즐거움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내가 우리 가족 중 한사람에게

편지를 보내면

곧 답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하나가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에게

언제라도 선물을 보낼 수 있습니다.

이 하나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족과 언제라도

같이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에게 나의 아픔을

낱낱이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