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 08:우리는 기뻐해야 할 사람입니다.(빌 4:1-9)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10-21 00:00
조회
972
빌립보서 강해 08우리는 기뻐해야 할 사람입니다.(빌 4:1-9)2018. 10. 21. 프롤로그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임금님은 날마다 행복했다.
어느 날 정원에 나간 임금님은 꽃들과 나무들이 모두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

-임금님은 근심에 쌓여 참나무에게 다가가 먼저 물었다.
“너는 왜 그렇게 죽어가고 있느냐?”
"나는 저기 멋진 전나무처럼 키도 늘씬하지 못한데 살아서 뭐하겠어요?"

-그래서 임금님은 다시 전나무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너는 왜 힘이 하나도 없느냐?"
"임금님, 난 포도나무처럼 맛있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답니다."

-임금님이 이번엔 포도나무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임금님이 아끼시는 장미나무처럼 아름다운 꽃을 저는 피울 수가 없답니다. 장미나무는 얼마나 행복할까요?"
포도나무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임금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발밑에 키가 작은 제비꽃이 동그란 봉오리를 맺고 싱글싱글 웃는 것이 보였다.

-임금님이 그 제비꽃을 보고 신기해서 물었다.
“왜 너는 그처럼 기쁘게 살고 있느냐?”
"네, 임금님이 나를 여기에 심어준 것은 제비꽃으로 잘 자라기를 바라신 거죠. 그래서 나는 키도 작고 예쁘지 않지만 열심히 꽃을 피워 임금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나도 기쁘게 살 거예요."

-제비꽃은 기쁨의 비결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기뻐하는 것이다.
현 상황을 기뻐하는 것이다.
지금의 나 자신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게 쉽지 않다.
보면 기쁘게 살고 있는 사람이 흔치 않다.
환경에 따라 상황에 따라 잠깐 기뻐할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외로움과 우울감이 찾아온다.

-세상이 주는 기쁨이 그렇다.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기쁨이 다 그렇다.

-그런 시각에서 바울의 기쁨은 이해할 수 없다.
그가 도무지 기뻐할 일이 없다.
그가 기뻐할 만한 별다른 일이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지금 옥에서 재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석방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썩어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바울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환경과 상관없이 기뻐하고 있다.
상황과는 무관하게 기뻐하고 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감옥에 가둬놔도 감당이 안 되고 풀어줘도 감당이 안 된다.
육체의 자유는 빼앗을 수 있어도 영혼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바울의 기쁨은 영혼에서 우러나왔다.
그의 영혼 그윽이 깊은 데서 우러나왔다.
그러니 그 기쁨을 누가 빼앗을 수 있겠는가?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우들을 향해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기쁨은 현재요 면류관은 미래다.
빌립보교회 교우들은 현재 바울의 기쁨이다.
또한 그들은 미래 바울의 기쁨이다.
면류관은 운동경기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진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우들을 자기가 훗날 주님 앞에 설 때 받게 될 면류관으로 이해했다.
미래의 기쁨인 것이다.

-내가 전도한 사람이 그날 내 면류관이 되고, 내가 양육한 사람이 그날 내 면류관이 된다는 말이다.
운동선수가 면류관을 쉽게 쓸 수 없듯이, 전도 쉽지 않다.
양육 역시 쉽지 않다.
그게 쉬운 일이라면 면류관을 주지 않을 것이다.
전도하다 지칠 때, 이 말씀을 기억하면 힘이 날 것이다.
양육하다 힘 빠질 때, 이 말씀을 기억하면 힘이 솟구칠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우들을 향해 이렇게 권했다.“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여기서 “서라”는 말의 원어 ‘스테케테’는, 원래 ‘병사가 전쟁 중에 적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초소에 굳게 계속 서 있는 모습’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이라고 한다.
빌립보교회 교우들의 환경이, 그리 평안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서라”는 단어가 영적 전쟁이 치열한 상황에 있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지상에 완벽한 교회가 없다는 말은, 갈등이 없는 교회가 없다는 말이다.
또한 절대적으로 평안을 유지하는 교회 역시 없다는 말이다.

-모든 지상교회는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병사가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고 떠나 있으면, 그 자리가 뚫리게 된다.
적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제자리에 서 있어야 승리할 수 있다.
자신의 의지만으로 안 된다.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가능하다.

-바울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주 안에 서라”고 했다.
교회가 아무리 전투함이라고 해도, 그냥 승리하는 게 아니다.
모든 교우들이 주 안에 설 때, 비로소 승리할 수 있다.

-그렇다. 주 안에 서면 승리한다.
우리가 주 안에 서지 않고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악으로, 깡으로 안 된다.
악쓰고, 떼써도 안 된다.
주 안에 서야 가능하다.

-우리는 주 안에 서는 연습을 해야 한다.
우리는 매일 주 안에 서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래야 결정적인 순간에, 주 앞에 흔들림 없이 설 수 있다.

-빌립보교회가 세워진 데는 자주장사 루디아의 헌신이 컸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여성의 비중이 크고,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큰 역할을 맡았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교회 안에서 갈등의 주역도 여성들이었다.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있었다.
그들은 믿는 데 아주 열심이었다.
교회 일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열심이 있었다.
교회 일을 두 사람이 다 하는 것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문제는 이 유집사와 순집사가 열심과 영향력이 비슷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유오디아를 따르고 편드는 유집사파와, 순두게를 따르고 편드는 순집사파가 생겼다.
교회 안에 분파가 생긴 것이다.
우리는 분파하면 고린도교회에만 있는 줄 아는데, 빌립보교회에도 있었다.

-사실 교회 안에서, 특정인의 이름을 거명하는 건 부담스럽다.
칭찬하는 것도 부담이 되는데, 권면은 더 부담이 된다.
더구나 유집사와 순집사는 공개적인 권면이다.
두 사람 사이가 얼마나 감정의 골이 깊었고, 분쟁이 심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들이 예수 믿기 전부터 경쟁 관계였는지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두 사람으로 인해, 지금 교회가 평화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유집사와 순집사가 초신자였다면 문제가 다르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지 않는다면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교회 안에 유집사파와 순집사파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워낙 열심이고 헌신적이다 보니,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교회 안에서 중직자나 사역리더는, 자기를 드러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주의 은혜를 앞세워야 한다.
다른 사람의 수고를 앞세우는 말을 해야 한다.
“주의 은혜입니다. 당신 덕분입니다.”
이게 모범 답이다.
그러면 주님이 알아주시고, 다른 사람도 인정해준다.
그러면 주님의 몸된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게 된다.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공개적으로 권면했다.
그렇게 권면하는 바울도 두 사람이 같은 마음을 품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음이 나뉘고, 다른 마음이 되는 것은 쉽다.
두 사람이 딴 마음을 품는 것은 어렵지 않다.
두 사람이 이미 틈이 갈라졌다.
마음의 골이 깊어져 메우는 게 쉽지 않다.

-그럼에도 바울은 두 사람을 향해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했다.
같은 마음이 되려면, 고집을 꺾어야 한다.
자기 자존심을 내려놔야 한다.
그런데 그들의 인격으로는 사실상 힘들다.
방법은 주 안에서이다.
2장에서 언급한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 가능하다.
겸손 곧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가능하다.

-바울의 권면에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모른다.
만일 그들이 바울의 공개적인 권면을 받고,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었다면, 자신들도 살고 교회도 살았을 것이다.
만일 그 권면을 받고 거부했거나, 교회를 떠났다면, 교회도 타격을 받고 자신들도 영적으로 죽고 말았을 것이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본래는 복음에 바울과 함께 힘쓰던 여인들이었다.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고까지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졌다.
서로에게 앙숙이 되었다.
교회를 유집사파와 순집사파, 두 파벌로 갈라놓았다.
바울은 두 사람이 그렇게 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어떻게든 화해를 시키고 싶어 했다.

-바울은 신뢰하는 동역자에게 두 사람을 도와주라고 했다.
화해하는데 다리를 좀 놓아주라는 말일 것이다.
사실 당사자가 화해를 시도하기 어렵다.
중간에서 다리를 놔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두 사람 때문에 시험에 든 사람이 있다는 것도 거론했다.
글레멘드와 그 외의 동역자들이다.
그들을 도와주라고 했다.
그들이 시험을 털고 일어서서 다시 달려가도록 도와주라고 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한다.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기쁨, 그리스도인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겠는가?
기쁨은 구원받은 자의 내적 외적 증거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다. 영생을 얻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
그런데 기쁨이 없다?
도무지 기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럼 그가 구원받았는지 의심해 봐야 한다.

-여기서 “기뻐하라”는 말씀은 명령형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라는 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라는 말이다.

-강준민 목사님의 [기쁨의 영성]이라는 책에서 본 글이다.

-유명한 코미디언 밥 호프란 사람이 있다.
월남전이 한창이던 시절, 월남에서 부상당하고 돌아온 군인들을 위한, 대대적인 위문 공연이 준비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프로그램을 총 책임진 감독이, 밥 호프를 이 공연에 초청했다.
그러나 밥 호프는 너무 바빠서 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밥 호프가 없는 위문 공연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감독은, 전쟁에서 돌아온 이들에게 위로를 해주려면, 이 중요한 자리에 당신이 꼭 필요하다며, 여러 번 간곡히 부탁을 했다.

-감독이 하도 부탁을 하니까, “그러면 제가 한 5분 정도만 얼굴을 보이고 내려와도 괜찮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주최측에서 “그렇게만 해주어도 고맙겠습니다”고 해서, 밥 호프는 위문 공연에 출연하게 됐다.

-5분 약속하고 올라간 밥 호프는 5분 동안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다.
그런데 5분이 지나도 밥 호프는 끝낼 생각을 안 한다.
10분, 15분, 25분, 30분이 넘었다.
거의 40분 동안 공연을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 때 놀랍게도 무대를 내려가는 밥 호프의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감독이 다가가 “아니 어떻게 된 겁니까?” 하고 물었다.
밥 호프가 눈물을 닦으면서, “저 앞줄에 있는 두 친구 때문에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앞줄에 있는 두 친구가 어떻기에 그럽니까?” 하니까, “나가서 보세요”라고 했다.

-나가서 보니까, 앞줄에 상이군인 두 사람이 열심히 박수치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오른팔을 잃어버렸고, 다른 한 사람은 왼팔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오른팔을 잃어버린 사람은 왼팔을 사용하고, 왼팔을 잃어버린 사람은 오른팔을 사용해서, 두 사람이 함께 박수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광경을 보면서 밥 호프는 유명한 얘기를 남겼다.
“저 두 사람은 나에게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한 팔을 잃어버린 두 사람이 힘을 합하여 함께 기뻐해 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참된 기쁨을 배웠습니다.”

-기쁨을 잃고 사는 우리 생각해봐야 한다.
누가 우리에게서 기쁨을 빼앗아간 것인지...
아님 스스로 기쁨을 포기하고 사는 건 아닌지...
우리의 삶에서 하늘의 가치보다 땅의 가치가 앞서고 있지 않는지...

-기쁨을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인가?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하는 것이다.
관용은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하는 것’이다.
남의 잘못을 사사건건 따지면 기뻐할 수 없다.
남의 잘못을 판단하면 참으로 기뻐할 수 없다.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관용이 나부터도 잘 안 된다.
그릇이 작아서 그렇다.
수양이 부족해서 그렇다.
마음이 조급해서 그렇다.
그럼 어느 순간 기쁨을 잃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어떻게 관용할 수 있는가?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믿음이다.

-왜 관용해야 하는가?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관용은 내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관용해야 내 기쁨을 유지할 수 있다.
관용해야 내 정신건강에 좋다.
관용해야 내 영혼이 평안할 수 있다.

-사람이 긴장하면 과민해진다.
긴장을 풀어야 한다.
옆에 있는 사람이 내 적이 아니다.
그들을 지나치게 의식하다보면 긴장이 된다.
관용을 잃게 된다.

-기쁨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건 염려다.
염려는 기쁨을 손상시킨다.
문제는 대부분의 염려가 쓸 데 없는 염려라는 사실이다.
‘염려 같은 염려’, ‘꼭 해야 할 염려’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어느 비행사가 경험한 일이다.
두 시간 가량 비행을 한 후, 그는 기체에서 나는 소음을 들었으며, 이 소음이 쥐가 무엇을 갉아 먹는 소리임을 알았다.
그의 비행기가 착륙한 사이에 쥐가 기체내로 들어 와서, 그의 비행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쥐의 날카로운 이빨이 정밀한 기체를 얼마나 갉아 먹을지를 몰라, 그는 몹시 두려운 생각에 잠겼다.

-그는 처음에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떠나온 지점으로 되돌아가는 데도 두 시간이 소요되고, 앞으로 착륙할 지점에 도착하는 데도 두 시간이 소요되는, 그런 위치에서 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쥐는 설치동물이기에, 높은 곳에서 적응력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비행사는 비상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1천 피트 상공으로, 또 1천 피트 상공으로, 이런 식으로 상공을 비상하여, 고공 2만 피트 높이로까지 올라갔다.
그러자 쥐가 갉아 먹는 소리가 멈추었다.
두 시간이 조금 지난 후, 그가 다음 착륙지에 안전하게 착륙하였을 때, 기체의 구멍에 쥐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염려는 마치 쥐처럼 우리 기쁨을 갉아 먹는다.
염려는 우리 기쁨을 갉아 먹을 뿐만 아니라, 기도를 방해하기도 한다.
염려로 충만해 있으면, 기도가 힘을 잃는다.
아무리 기도를 하려고 해도, 염려에 사로잡혀 있으면 기도가 안 된다.

-염려는 무시해야 한다.
아니 염려는 무시해버려야 한다.
염려는 주 예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한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를 사로잡고 있는 염려는 떠나갈지어다!”
염려가 떠나갈 때까지 반복하여 선포해야 한다.

-염려가 떠나가면 하나님의 평강이 찾아온다.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평강에 사로잡히게 된다.
염려와 하나님의 평강은 함께 할 수 없다.
염려가 크면 하나님의 평강은 작아진다.
하나님의 평강은 다른 말로 기쁨이다.
하나님의 평강과 기쁨은 함께 붙어 다니는 단짝 친구다.

-그리고 하나님의 평강은 기도의 결과로 주어진다.
하나님의 평강은 염려를 포기하고, 기도를 선택한 사람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하나님의 평강은 기쁨을 갉아먹는 염려를 포기하고, 기도를 선택한 사람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어차피 염려는 해봤자 소용없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염려 대신, 기도를 선택하는 것이 지혜다.
염려를 깊이 하면, 몸도 마음도 영혼도 상한다.
그러나 기도하면 몸은 피곤해도 마음과 영혼이 건강해진다.

-바울은 몇 가지 덕목을 제시하고 있다.4: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참됨’, ‘경건함’, ‘옳음’, ‘정결함’, ‘사랑 받을 만함’, ‘칭찬 받을 만함’, ‘덕 있음’, ‘기림이 있음’, 이상 8가지다.
말씀을 잘 보라.
이것들을 행하라고 했는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했는가?
물론 결국은 행해야 할 덕목이다.
하지만 행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한다.
어떤 일을 행하기에 앞서 깊이 생각부터 하라는 것이다.

-8가지 덕목 중 앞의 4가지, 참됨, 경건함, 옳음, 정결함은, 자기 자신과 관계된다.
뒤의 4가지, 사랑 받을 만함, 칭찬 받을 만함, 덕 있음, 기림이 있음은, 다른 사람과 관계된다.

-아무리 자신이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해도, 타인과의 관계가 나쁘면 안 된다.
정상적인 상황, 예컨대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 상황이 아니라면, 사랑 받을 만해야 하고, 칭찬 받을 만해야 하고, 덕이 있어야 하고, 기림이 있어야 한다.
물론 앞의 4가지 덕목이 우선한다.
앞의 4가지 덕목을 생략하고, 뒤의 4가지 덕목을 잘하면, 좋은 사람이란 말은 들을 수 있겠지만, 그건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가능하다.
그런 교인은 세상을 변혁시키지 못하고, 세상에 동화되고 만다.

-마지막으로 평강인데 평강이 어디서 오는가?4: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말씀에서 온다.
말씀을 배울 때 평강이 찾아온다.
말씀을 받을 때 평강이 찾아온다.
말씀을 듣고 볼 때 평강이 찾아온다.
말씀을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할 때, 평강이 찾아온다.

-8절과 9절에서 중요한 동사가 “생각하라”와 “행하라”이다.
8절과 9절을 이으면, “생각하라 그리고 행하라”이다.
생각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내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확실한 정체성을 가지고 사명자로 살라는 것이다.

-말씀을 맺겠다.
우리는 기뻐해야 할 사람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해야 할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했으면, 그렇게 살면 된다.
그렇게 살기 위해 관용하라. 관용...
염려를 포기하고 기도하라. 기도...
무엇보다 기쁨의 근원되시는 예수를 위해 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