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 05:우리는 복음의 신실한 동역자가 돼야 합니다(빌 2:19-30)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09-30 00:00
조회
993
빌립보서 강해 05우리는 복음의 신실한 동역자가 돼야 합니다(빌 2:19-30)2018. 9. 30. 프롤로그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래도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제도가 일하는 것이 아니다.
시스템이 일하는 것이 아니다.
여건이 일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사람이 일한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제도를 만들고 하나님은 사람을 만든다.”
하나님이 왜 사람을 만드실까?
사람을 통해서 일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주의 몸된 교회를 박해하는 바울을 부르셨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를 부르신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주를 따르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죽어라고 예수를 싫다고 하고,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바울을 부르셨다.
그를 불러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
동족을 위해서는 12사도면 족했지만 이방 선교에 최적화된 바울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바울과 함께 그의 동역자를 쓰셨다.
바울에게 신실한 동역자들이 있었다.
로마서 16장에 보면 수많은 바울의 동역자들이 소개되고 있다.
바울은 모든 것을 혼자의 힘으로 해결하는 슈퍼스타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동역자들과 함께 했다.
동역자들의 힘을 빌었다.

-지금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다.
몸이 갇혀 있는 신세다.
그가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동역자가 있었다.
지금 그 곁에는 신실한 동역자인 디모데와 에바브라디도가 있었다.

-바울은 이 중 디모데를 빌립보교회에 보내고 싶어한다. 2: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바울이 디모데를 그들에게 보내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사정을 좀 더 알고 싶어서였다.
빌립보교회는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바울을, 지금은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기억해줬다.
자기들 곁을 떠나 멀리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잊지 않았다.
바울의 어려움을 생각해서, 에바브로디도를 보내어 바울을 섬겼다.
참 좋은 교회요, 심성이 착한 교인들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빌립보교회가 완벽한 교회는 아니다.

-그들 안에 다툼과 허영이 있었다.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그들 사이에 원망과 시비가 있었다.2: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빌립보교회 역시 다른 교회들이 안고 있는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중에서도 자신을 생각해주니, 바울 입장에서 얼마나 고맙겠는가?

-빌립보교회는 기본적으로 바울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를 그냥 보내면 된다.
그럼에도 말씀을 보면 빌립보교회에 동의를 구하는 인상이 짙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바울이 그들을 존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빌립보교회 교우들이 바울을 존중하고 그의 필요를 채워줌 같이, 바울 역시 그들을 존중했다.

-존중은 상호주의 원칙에 입각한다. 삼상 2: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한쪽만 존중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서로 존중은 하나님께도 해당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바울이 디모데를 보내는 목적이 나온다.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바울 자신이 자신의 근황을 알림으로, 자기를 도와준 빌립보교회 교우들을 위로하고 싶었다.
또한 자신이 인편을 통해 빌립보교회 교우들 사정을 들음으로, 자신이 위로받고 싶기도 했다.

-여기 좋은 인간관계의 모형을 본다.
서로 존중할 때 좋은 인간관계가 된다.
서로 위로를 주고받을 때 좋은 인간관계가 된다.
교회와 목회자와의 관계도 그렇고, 교우와 교우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비난하고 비방하는 관계는 오래 가지 못한다.
교회 안에서는 물론이고, 교회 밖에서도 존중의 말을 하라.
자기를 존중해주는 사람을 멸시할 사람은 없다.
자기를 위로해주는 사람을 미워할 사람은 없다.

-바울이 왜 디모데를 보내고 싶어했을까?2: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왜 바울이 다른 사람이 아닌 디모데를 선택했을까?
디모데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동역자란 뜻을 같이하는 동지여야 한다.
평생 동역자는 뜻을 같이할 때만 가능하다.
같은 비전을 이루는 것도 뜻이 같을 때만 가능하다.

-로마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 곁에 사람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디모데가 지금 바울 곁에 있다는 말은, 그가 바울과 뜻을 같이한 사람임을 말해준다.
자기와 뜻을 같이하여 자기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는 사람이, 얼마라도 있으면 리더는 외롭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비록 감옥에 갇혀 있지만 외롭지 않았다.

-그렇다고 디모데가 자기와 뜻이 통해서만 보낸 것은 아니다.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들을 생각해서였다.
디모데가 빌립보교회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과 뜻이 통한 디모데가 가면, 빌립보교회를 잘 보살필 수 있을 거 같았다.
바울이 그만큼 디모데를 믿는다는 말이다.
이게 동역자이다.

-동역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단기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오랫동안 봐왔다.
그 결과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바울 주위에 디모데 같은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21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여기서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군지는 모른다.
그러나 바울이 불특정 다수를 지칭했을 거 같지는 않다.
적어도 바울이 아는 사람들이거나, 혹은 빌립보교회와 관련 있는 사람들로 보인다.
그들도 주의 일을 하겠다고 뛰어든 사람들이다.
아니 그들은 지금도 자신이 주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사실 자기 일을 구하는 자이다.
겉으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자기 일을 추구했다.

-자기 일을 하는 사람과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가?
그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희생이다.
희생하는 것을 보면 안다.
희생의 자리에서 그가 어떻게 하느냐를 보면 안다.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에서 그가 어떻게 나오느냐를 보면 안다.
자기 일을 구하는 사람은 조금도 손해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의 색깔이 보다 분명하던 그 시대도 그랬다.
복음에 미쳐 생명을 걸었던 바울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도 그랬다.
참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목회자에게도 분별력이 필요하고, 교인들에게도 분별력이 필요하다.
특히 직분자를 세울 때는 더 그렇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는 사람인줄 알고 세웠더니, 자기 일을 구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교회가 참 어려워진다.

-참된 믿음을 알아볼 수 있는 장치가 있다. 2: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연단이다
바울이 디모데를 믿었다.
그가 받은 연단 때문이다.
그가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면서 받은 연단 때문이다.
디모데는 자기의 일을 구했더라면 받지 않아도 됐을 연단을, 주의 일을 구함으로 기꺼이 받았다.
바울을 믿음의 아버지로 섬기며,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는 연단을 받았다.
디모데의 믿음은 그것을 검증됐다.

-연단은 참된 믿음을 분별할 수 있는 시금석이다.
연단이 왔을 때도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다.

-영국의 조지 왕이 도자기 공장을 방문했다.
순찰하는 길목에 2개의 꽃병이 놓여있었다.
하나의 도자기는 보기에도 도자기답게 윤기가 흘렀다.
생동감이 넘쳤고 예술품으로서 그 자태가 출중해 보였다.
그런데 또 하나의 도자기는 우선 외모가 볼품이 없을 뿐 아니라 빛깔조차도 흐릿하고 가치가 없어보였다.

-그래서 조지 왕이 안내자에게 물었다.
“이 도자기는 왜 이렇게 윤기가 나는데 저 도자기는 왜 저렇게 볼품이 없는가?”

-그 물음에 안내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이 윤기 나는 도자기는 불에 구워졌기 때문에 윤기가 나고, 저 도자기는 아직 불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윤기가 나질 않습니다.”

-이게 연단이다.
연단은 고통을 주지만, 믿음을 단단하게 만든다.

-디모데의 충성된 믿음은, 연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그의 믿음은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영향도 받았다.딤후 1: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그분들의 믿음이 디모데 믿음의 자산이 됐다.
하지만 그가 바울을 만나기 전에는 평범한 믿음이었다.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다가 겪은 연단이, 그의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단단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 때, 연단을 주시곤 한다.
어떤 사람은 연단을 피하는데 급급하다.
어떤 사람은 연단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된다.

-불행해 보이는 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종일 방직공장에서 일했다.
지긋지긋한 가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족들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큰오빠는 잔칫집에서 얻어온 상한 음식을 먹고 숨졌고, 둘째오빠는 굶주린 가족을 위해 피와 쌀을 바꾸었다.
그녀는 공장에 다니면서도 희망만은 잃지 않았다.
‘내게는 무한한 능력이 있다. 역경을 극복하면 반드시 희망의 날이 올 것이다.’

-소녀는 기업체 부설 학교에 다니며 꿈을 키웠다.
그녀는 국내 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한 후, 오스트리아로 유학, 빈의 음악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자신의 모교 교수로 금의환향했다.
그녀가 바로 창원대 이점자 교수이다.

-연단은 당할 때는 힘들지만 감당하면 복이 될 수 있다.
연단 없이 큰 사람이 된 사람은 없다.
연단 없이 믿음의 거장이 된 사람은 없다.
지금 연단 중에 있다면 조금만 더 버텨보기 바란다.
버티다보면 연단이 끝나는 날이 온다.

-바울은 디모데를 속히 보내고 싶었지만 사정이 있었다. 2:23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바울이 자기의 재판을 앞두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내 일”은 재판을 가리킨다.
재판의 결과가 나오면 보내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재판장은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재판 결과를 보면 납득하기 어려울 때가 가끔 있다.
특히 요즘엔 사법부 정의가 살아 있는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삼권이 분립된 오늘날에도 이러니, 바울 시대에는 어떠했겠는가?
그러니 바울의 재판 결과를 예단하기 어렵다.
그가 흉악범이 아니고, 또한 로마시민권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꼭 석방되란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그는 확신이 있었다. 2:24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래서 디모데 편에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빌립보교회 교우들에게 바울의 석방보다 더 좋은 소식이 있겠는가?

-그가 확신하는 근거가 있다.“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보면 전혀 객관적인 근거가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의 확신은 맞았다.
바울이 잠깐 석방된다.
그리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러 간다.
그러다 로마 대화재 때 다시 붙잡혀서, 네로에게 순교를 당했다.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려고 했지만, 그보다 에바브로디도를 먼저 보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2: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에바브라디도가 누구인가?“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빌립보교회에서 바울에게 보낸 사람이다.
교회에서 바울이 쓸 것을 에바브로디도의 편에 보낸 것이다.
에바브로디도가 지금은 바울 곁에 있지만, 본래는 빌립보교회 교인이다.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교회에서 큰 신임을 받는 자가 아니고서는, 교회가 그 일을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만에 하나 배달 사고라도 일어나면 큰일 아닌가?
에바브로디도는 교회의 기대대로 바울에게 도착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을 다했다.

-그런데 바울과 만나 교제를 하면서 그의 믿음이 성장했다.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바울이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런 자랑을 하는 바울의 얼굴 표정이 그려지는가?
바울이 아무에게나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 바울 입장에서는 이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서 자기를 도와주면 좋다.
돕는 손길이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를 붙잡으려고 하기 보다는 보내는 쪽으로 생각했다.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자신의 필요를 생각하기보다,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렇게 한데는 에바브로디도의 의지도 한 몫했다. 2: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에바브로디도는 바울 곁에 있으면서, 자신의 믿음이 자라는 것을 느꼈다.
바울에게서 배우는 시간들이, 자신에게 더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자기를 보낸 빌립보교회도 생각해야 했다.
에바브로디도 자신이 병든 소식이, 교회에 들어갔을 거 같아서였다.
그가 바울에게 가던 중에 병들었는지, 도착해서 병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게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

-확실한 것은, 그 병이 가벼운 질환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2:27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아주 중병이었다.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병세가 너무 위중했다는 말이다.
참 보통 문제가 아니다.
‘교회에서 사자로 보냈던 사람이 아파서 죽게 됐다...?’
이거 보통 골치 아픈 일이 아니다.
너무너무 속상하고 근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얼마나 기도했겠는가?
바울은 얼마나 기도했겠으며 자신은 또 얼마나 기도했겠는가?
“하나님, 긍휼이 여겨주세요.”
“하나님, 에바브로디도를 긍휼이 여겨주세요.”
“하나님, 에바브로디도를 보낸 빌립보교회를 긍휼히 여겨주세요.”

-기도하고 기도했다.
깊은 근심 가운데서 기도로 몸부림을 쳤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셨다
에바브로디도를 살려주셨다.
그래서 지금은 바울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정말 자기를 떠나보내기에 아까운 사람이다.
그러나 그를 더 필요로 하는 빌립보교회에 보내기로 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2: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그를 급히 보냈다.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할 교회 교우들을 떠올리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하면 자기 짐도 하나 덜게 된다.
사실 내 것 아닌 것을 가지고 있으면 짐이다.
어차피 가지고 있어도 내 것이 안 된다.
그럼 빨리 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맘 편하다.

-나는 십일조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내가 쓴다고 해도, 그것이 내 것이 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소득이 생기면 십일조를 우선적으로 구별한다.
그게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놓는 내 신앙고백인 것이다.
십일조는 보통 마음먹고는 못한다.
어릴 때부터 하든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해야 한다.
생활비 부족할 거 각오하고 해야 한다.
밥 굶을 생각하며 해야 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그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했기 때문이다.
아니 하나님이 그런 사람 책임져 주시지 누구 책임져 주시겠는가?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교회에 보내며, 잘 영접해주기를 부탁했다.2: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2: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그렇지 않아도 빌립보교회 교우들은 병들어 죽게 된 상황에서도, 자기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교회에서 위임한 것을 감당한 에바브로디도를 극진히 영접할 것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를 한 번 더 챙기고 있다.
그를 기쁨으로 영접해 줄 것을 바랐다.
그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부탁하고 있다.
에바브로디도를 향한 바울의 애틋한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는 대목이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며, 빌립보교회에 가서도 믿음 생활을 잘하기를 바랐다.
자기와 함께 있을 때처럼, 이제는 빌립보교회의 형제가 되고, 함께 수고한 자가 되고, 함께 군사된 자가 되기를 바랐다.

-우리가 다 바울 같을 수는 없다.
우리가 다 바울이 될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디모데 같은 동역자는 될 수 있다.
에바브로디도 같은 신실한 동역자는 될 수 있다.
우리의 남은 삶을 주의 몸된 교회와 목회자에게,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같은 복음의 신실한 동역자로 쓰임받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