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 03:우리에게는 겸손의 롤모델이 있습니다.(빌 2:1-11)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09-16 00:00
조회
823
빌립보서 강해 03우리에게는 겸손의 롤모델이 있습니다.(빌 2:1-11)2018. 9. 16. 프롤로그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우들에게 몇 가지 바람이 있었다.
믿음이 진보하기를 바랐다.
믿음이 점진적으로 자라기를 바랐다.
믿음이 퇴보하지 않고 점점 성장하기를 바랐다.
또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기를 바랐다.
복음을 받고 복음을 가진 자답게 생활하기를 바랐다.
복음과 생활이 걸맞은 자로 살기를 바랐다.
또한 은혜를 받은 자로서 고난도 받기를 바랐다.
받은 은혜로 고난을 이겨내기를 바랐다.
고난의 보자기에 싸인 은혜를 알아보기를 바랐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사가 나오고 기쁨의 간구가 나오는 교회였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교회였던 것은 아니다.
사실 지상에 있는 교회 치고 완벽한 교회는 없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인 것은 분명하지만 또한 교회의 구성원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 사람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는 항상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는 셈이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평안하여 든든히 서갈 수 있다.

-마귀는 어떻게든 교회 공동체를 흔들려고 한다.
예수 믿는 것과 교회 다니는 것을 분리시키려고 한다.
교회생활이 행복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한다.
교회 다녀봤자 특별한 거 없다는 생각을 불어넣는다.
교회 안 다닌 것보다야 조금 낫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교회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지 않는다.
예배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저 교회가 내 삶의 일부일 뿐이다.
교회가 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내 주변을 차지하고 있다.

-교회는 놀이터가 아니다.
교회는 훈련장이다.
교회는 유람선이 아니다.
교회는 전투선이다.
늘 웃음만 있을 수 없는 곳이다.
늘 재잘거리는 노랫소리만 있을 수 없다.

-교회 안에 꼭 필요한 게 있다. 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교회 안에 권면이 필요하다.
권면의 사전적 정의는 ‘알아듣도록 권하고 격려하여 힘쓰게 함’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한다.
다음은 목회자의 권면이 있다.
또한 리더의 권면이 있다.
알아듣도록 권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알아듣기만 하면 격려하여 힘쓰게 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때론 알아듣기는 한데 고집을 부리는 경우가 있긴 하다.
그러면 권면하다가 화가 치민다.
그럼 친근하면 뭐라도 한 소리하고 덜 친근하면 조용히 돌아선다.
권면하다가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

-또한 교회 안에 위로가 필요하다.
위로의 사전적 정의는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줌’이다.
교회에는 유독 상처 받은 사람이 많다.
그건 상처 때문에 교회를 찾게 된 사람이 많아서일 것이다.

-나는 “상처 받았다”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 받았다는 말을 쓰지 못하게 한다.
세상의 상처를 혼자 다 받은 것처럼, 입만 열었다하면 “나 상처 받았다”는 말을 한다.
그럼 곁에 있는 사람들 마음이 불편해진다.

-분명한 것은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에게 위로가 필요하다.
치유 사역자에게도 위로가 필요하다.
목회자에게도 위로가 필요하다.

-위로라고 해서 별다른 게 아니다.
따뜻한 말이다.
가슴 따뜻한 말이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말이 위로다.

-또한 교회 안에 교제가 필요하다.
일반 교제가 아니다.
성령의 교제, 영적인 교제이다.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는 교제이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일반 교제를 함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곤 한다.
그럼 교회가 라이온스 같은 클럽이 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 계가 있는 경우도 봤다.
같은 계원이라고 서로 챙겨주고 그러지 않았겠나?
지금은 없어졌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교회 안의 분파다.
그들의 교제는 성령의 교제와 무관하다.

-또한 교회 안에 긍휼이나 자비가 필요하다.
둘의 의미가 비슷하다.

-마틴의 견해에 따르면, 긍휼은 사랑에서 비롯된 동정이나 애정을 가리키고, 자비는 긍휼에서 비롯된 외부적 표현이다.

-긍휼과 자비는 약자에게 필요하다.
그것은 어려움에 빠진 사람에게 필요하다.
특히 초대교회 때는 교회 안에 사회적 약자들이 많았다.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첫 교회인 예루살렘교회가 긍휼사역인 구제를 열심히 했다.
무슨 말인가?
그만큼 교회 안에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곧 3만불 시대에 도달하지만, 빈부격차는 점점 심해지고 있다.
정부가 복지정책을 펴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교회가 긍휼사역을 멈추면 안 되는 이유이다.

-교회에 필요한 것이 또 있다.2: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그건 일치이다.
일치는 마음을 같이하는 것이다.
일치는 같은 사랑을 가지는 것이다.
일치는 뜻을 합하는 것이다.
일치는 한마음을 품는 것이다.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우리교회에서는 고린도전서 1:10을 강조한다.고전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줄여서 같은말, 같은마음, 같은뜻이다.
고린도교회는 분파가 있었고 분쟁이 있었다.
고린도교회는 여러 가지 장점이 많았음에도, 분쟁 때문에 장점이 묻히고 말았다.

-교회에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게 싸움이다.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
하지만 교회는 아니다.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싸우지 않아야 한다.
교회가 싸우다가 싸우다가 해결이 안 돼, 결국 사회 법정에 가기도 한다.
사회 법정에서도 교회 재판을 가장 골치 아파한다고 한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 일치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툼과 허영을 버리는 것이다.
다툼은 의견이나 이해의 대립으로 서로 따지며 싸우는 일이다.
허영은 자기 분수에 넘치고 실속이 없이 겉모습뿐인 영화 또는 필요 이상의 겉치레를 말한다.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이해의 대립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서로 따지며 싸우는 데까지 가면 안 된다.

-겉모습 중요하다.
어느 정도의 겉치레 필요하다.
하지만 자기 분수에 맞아야 한다.

-다툼이나 허영은 공통점이 있다.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다툼은 자기 의견을 주장하여 자기를 드러낸다.
허영은 필요 이상의 겉치레를 통하여 자기를 드러낸다.
그러니 다툼과 허영은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교회 일치를 깨뜨리는 것은, 교만에서 비롯된 다툼과 허영 때문인 것이다.

-일치를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이 다툼과 허영이라면, 가져야 할 것이 있다.
겸손이다.
오늘날은 겸손을 미덕으로 쳐준다.
하지만 당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노예 근성에서 비롯된 굴욕과 비굴함을 의미하였다.
그런데 주님이 겸손의 의미를 바꿔놓으셨다.

-겸손이 뭔가?
겸손의 사전적인 정의는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이다.
3절의 표현으로 하면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다.
일치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때 가능하다.
일치는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을 때 가능하다.

-우리교회에서 평화의 인사할 때 뭐라고 하는가?
“주의 은혜입니다. 당신 덕분입니다.”
여기 내가 있는가?
모든 것을 주의 은혜로 여기고, 당신 덕분으로 돌린다.
여기에 평화가 있다.

-“이게 다 내 덕인 줄 아시오.”
이런 말 듣고 기분 좋아질 사람 없다.
농담이라도 이런 주장을 자주하는 사람이 있으면 일치가 깨진다.
일치는 겸손의 결과물이다.
겸손한 사람이 모인 곳에는 일치가 자연스럽다.

-하지만 겸손이 쉬운 건 아니다.
미국 흑인들의 애환을 그린 [뿌리]라는 책을 쓴 작가 알렉산더 헤일리는, 자신의 사무실에 이상한 그림을 걸어 두었다.
거북이가 높은 담장 위에 올라가 있는 그림이었다.

-사람들이 궁금해서 물었다.
“왜 저런 그림을 걸어 두었나요?”

-헤일리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가끔 난 나 자신을 보며 스스로 교만에 빠집니다. 이렇게 위대한 글을 쓴 것이 마치 내가 한 것인 양... 그럴 때마다 나는 저 그림을 보며 ‘저 거북이가 스스로 저 높은 담장에 올라간 것이 아니지. 누군가의 도움으로 저기 올라갔지’란 생각을 하며, 내가 여기까지 올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생각합니다.”

-작가 헤일리 같이, 자신이 겸손을 잃지 않도록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지혜다.
그럼에도 순간 방심하면 겸손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리스도인의 최고 덕목을 겸손이라고 거듭 거듭 강조했던 어거스틴이다.
그런 그에게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거스틴이 제자인 레라를 찾았다.
“레라~”, “레라~”,
아무리 불러도 나타나지 않으니까, 홧김에 제자의 방을 찾아갔다.
노크도 안 하고, 방문을 확 잡아 당겼다.

-순간 깊은 기도에 잠겨 있는 레라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자기의 경솔함과 오만스러움을 통회하면서, 제자 앞에 엎드려 목을 내밀었다.
“제자여, ‘이 교만한 어거스틴아’ 하면서 목을 세 번만 밟고 넘어가게” 라고 소리쳤다.
잠시 실수한 것이지만, 겸손과 통회함으로 제자에게 용서를 철저히 빌었던 것이다.

-이 일화를 통해, ‘그를 괜히 성 어거스틴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타인에 비해 자신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면이 있다.
타인이 교만한 꼴은 죽어도 못 보면서, 자신은 교만하게 굴기 쉽다.
겸손은 우리가 평생 수련해야 할 과정이다.

-교회 일치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또 있다. 2: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각각 자기 일을 하는 것이다.
자기 일을 하지 않아서 문제가 생긴다.
자기가 맡은 일을 타인에게 떠넘겨서 문제가 생긴다.
자기 직분을 잘 감당해야 한다.
자기 사역을 잘 감당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손이 안 가게 해야 한다.
리더가 믿고 맡길 수 있게 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자기 일을 돌보되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라는 것이다.
자기 일도 돌보지 못한 사람들이 없지 않다.
자기 나름대로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지만, 잘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 그 사람의 일을 돌보아 주는 것이다.

-대신 해주는 것은 아니다.
돌보아 주는 것이다.
엄마가 아이 숙제를 대신해 주는 게 아니지 않는가?
돌보아 주는 것이다.
자기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곁에서 조금 거들어 주는 것이다.

-이 때도 주의할 점이 있다.
겸손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처럼 가르치려고 들면 안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반드시 예수님의 마음으로 해야 한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려고 하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교회 교우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한 것이다.

-겸손은 예수님의 마음이다.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겸손은 예수님의 심성이다.
겸손은 예수님의 품성이다.
겸손은 예수님의 인품이다.
예수님의 삶은 겸손 그 자체이셨다.

-이어지는 말씀이 그걸 말해준다.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부분을 그리스도의 비하라고 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성육신이 있다.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사람의 아들로 탄생하셨다.

-율법에 대한 복종이 있다.
율법의 제정자가 율법의 제한을 받으셨다.

-수난이 있다.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셨고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고초를 겪으셨고 인류의 죄를 뒤집어쓰고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셨다.

-죽으심이 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저주의 죽임을 당하셨다.

-장사됨이 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어 타인의 무덤을 빌려 그곳에서 3일간 계셨다.

-지옥에 내려가심이 있다.
가톨릭에서는 장사된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 구약의 성도들을 구속하셨다고 한다.
루터교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 흑암 권세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셨다고 한다.
물론 예수님의 지옥에 내려가심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을,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성경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하나님과 동등 된 분이신데, 성육신을 통해 낮아져서 지옥까지 낮아지신 것이다.
이런 주님을 가만히 보고만 계실 하나님이 아니다.
주님을 높여주셨다.
이걸 그리스도의 승귀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승귀의 내용을 살펴보면...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부활이 있다.
무덤에 갇힌 지 제 삼일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셨다.

-승천이 있다.
부활하신 후 40여일을 지내신 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에 오르셨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이 있다.
주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예배를 받으시며, 우리를 위해 늘 기도하고 계신다.

-재림이 있다.
주님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신 주님을 하나님은 최고로 높여주셨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모든 무릎을 예수 이름에 꿇게 하셨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다.
이보다 높아질 수 없을 정도로 높여주셨다.

-교회는 영광스런 주님의 몸이다.
교회를 섬기는 것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남은 삶 동안, 겸손의 롤모델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주의 몸된 교회와 그 지체들인 교우들을 겸손히 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