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강해 17(끝):결국은 말씀밖에 없습니다.(호 14:1-9)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08-26 00:00
조회
736
호세아 강해 17결국은 말씀밖에 없습니다.(호 14:1-9)2018. 8. 26. 프롤로그

-박승오는 KAIST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에서 경영공학을 공부한 대한민국 과학 엘리트였다.
매 순간을 열심히 살았는데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레 실명 위기가 찾아왔다.
밤샘 공부와 안약 남용 때문이었다.
이후 3년이라는 긴 시간을 방황과 눈물로 보냈다.
뿌옇고 좁은 시야 속에서 좌절하던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우연히 읽은 책 한 권이었다.
그 책의 저자였던 구본형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고, 이후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자신을 탐색했다.
이 기간이 삶의 전환기가 되었다.
그는 공학 분야를 떠나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교육자로서 다시 시작했다.
지금은 작가로 성천문화재단연구실장으로 살아간다.

-그가 몇 권의 책을 썼는데, 그 중에 이런 책이 있다.
<시계를 멈추고 나침반을 보라>

-“어디로 배를 저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어떤 바람도 순풍이 아니다.”
그의 책에 나오는 말이다.

-시계는 시간을 보는 것이고 나침반은 방향을 보는 것이다.
지금이 몇 시인지도 중요하지만 지금 어디로 가는지는 더 중요하다.
사막을 건너는 사람에게 시계보다 나침반이 더 중요하다.
시간이 부족하면 쉬었다 내일 가도 되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접어들면 걷잡을 수 없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김은주는 <달팽이 안에 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침반 바늘은 정확한 방향을 가리키기 전에 항상 흔들린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지금 흔들리고 있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언젠가는 바른 방향을 가리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흔들리는 것이 정상이다.
흔들리되 방향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러려면 항상 바른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필요하다.
이 나침반이 말씀이다.
말씀은 우리 인생의 나침반이다.
인생의 나침반인 말씀만 붙들고 있으면, 흔들리다가도 곧바로 중심을 잡을 수 있다.
자리를 조금 이탈했다가도 금방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흔들리지 않은 것이 자랑거리일 수는 없다.
부두에 묶여있는 배는 안전할지 몰라도, 배를 부두에 묶어두려고 만들지 않았다.
배를 만든 이유는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서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는, 어쩔 수 없이 바람을 맞고 물결에 부딪혀 흔들리게 된다.
그럼 흔들리다 중심을 잡으면 된다.

-왜 가다가 넘어지는가?
왜 항해하다가 전복되는가?
중심을 잃어서 그렇다.
중심을 잘 잡기 위해서는, 무게 중심이 낮아야 한다.
운동할 때도 보면, 무게 중심이 낮으면 잘 넘어지지 않는다.
오뚝이는 넘어지지 않는다.
무게 중심이 아래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항상 겸손해야 할 이유이다.
교만하면 넘어지게 돼 있다.

-성경은 교만하면 넘어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잠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렘 50:32 교만한 자가 걸려 넘어지겠고 그를 일으킬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그의 성읍들에 불을 지르리니 그의 주위에 있는 것을 다 삼키리라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하나님 앞에 겸손의 표현이 있다.
기도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기도는 엎드려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기도는 엎드려서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이 넘어질 확률이 낮다.
그건 삶의 무게 중심이 낮기 때문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자.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 앞에 서자.
나침반이 아무리 북쪽을 가리켜도, 그것을 무시하면 소용없다.
내비게이션이 아무리 길을 안내해도, 따르지 않으면 소용없다.
겸손해야 할 이유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수없이 말씀하신다. 14:1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돌아오라고 목 놓아 부르신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을 때 답답했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었다.
매사에 눈치가 보였다.
모든 것에 하나님의 감시를 받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품을 뛰쳐나가 바알의 품에 안겼다.
그러니 세상 좋았다.
간섭하는 이 없는 내 세상이었다.

-그렇다고 하나님과 완전히 의절할 수는 없다.
적당히 관계를 유지했다.
연중행사로 하나님을 찾아가 절기 제사를 드렸다.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것으로 하나님께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돌아와야 한다고 하셨다.
실제로는 그들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있는 상태로 보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얼마간은 좋았다.
하지만 그게 정상일 수 없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이 그렇게 하는 것을 언제까지 두고 보겠는가?
결국 그들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였다. 14:2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14:3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

-하나님은 그들에게 무조건 빌라고 하신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무조건 용서해달라고 빌라는 것이다.

-공동번역성서는 보다 실감나게 번역했다.14:3 모두 야훼께 돌아와 이렇게 빌어라. "비록 못된 짓은 하였지만,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 애원하는 소리를 들어주십시오. 우리가 이 입술로 하느님을 찬양하겠습니다. 14:4 아시리아가 어찌 우리를 구하겠습니까? 우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아니하고 우리 손으로 만든 것 보고 우리 하느님이라 부르지 않겠습니다. 하느님 외에 누가 고아 같은 우리에게 어버이의 정을 베풀겠습니까?"

-왜 무조건 빌어라 했을까?
왜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라 했을까?
용서해주기 위해서다.
그들을 포기했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다시 안 볼 작정이었으면 버려두면 된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날 때는, 하나님의 품이 답답해서였다.
하나님한테 매이는 게 귀찮아서였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사사건건 간섭하는 거 같아서였다.

-그런데 실제 어떻게 됐는가?
2-3절 말씀을 보면 나온다.
그들은 수송아지에 매였다.
앗수르에 조공 바치면서도, 간섭은 간섭대로 받았다.
그들은 군마를 하나님처럼 의지했다.
하지만 그들은 고아 처지 같아졌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군마에 대해 고백한 적이 있다.시 20:7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8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군마를 의지하는 자는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바로 서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바로 선 사람이, 어떻게 하겠는가?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고아 처지였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에게 자랑거리가 아니었다.
하나님과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고아다.
하나님이 창조주 곧 아버지시다.
아버지를 떠난 인생이 고아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아버지가 있는 고아라는 사실이다.
멀쩡히 아버지가 있는데 고아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을 향해 호칭이 바뀐다.
뭐라고 바뀌는가?
“아버지”, “아빠 아버지”...
이전에는 “하나님”, “하느님”이었다.
무서운 하나님이요 두려운 하느님이었다.

-혹시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 하면서, 울컥해 본 적이 있는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고아인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는 것이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은 사람들이 고아로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들에게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라신다.
누구를 통해서...?
먼저 아버지를 만난 우리를 통해서...
고아 신분을 탈출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통해서...

-이미 용서할 마음의 준비를 다 마친 후, 제발 돌아와서 빌기만 해다오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철든 자녀이다.
왜 하나님은 저렇게 나만 보면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고 한다면, 아직 하나님을 모른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주신 분이다.
그런 하나님이 무슨 감정 조절이 안 되어, 우리만 보면 화를 내겠는가?
하나님께 분노조절장애가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육신의 부모도 자녀에게 괜히 화내지 않는다.
괜히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는다.
화를 실컷 돋구어놓고 왜 화를 내냐고 하면 안 된다.
그럼 더 화가 난다.
거기서 조금 더 나가면 화가 폭발할 수 있다.
한쪽이 화를 내면, 다른 쪽에서는 대꾸를 하지 않아야 한다.
이게 지혜다.

-이건 하나님께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리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타이르고 있다. 14:4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할 계획을 세우고, 무조건 잘못을 빌라고 하셨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을 기쁘게 사랑하겠다는 말씀을 하신다.
그들은 아직도 반역을 고치지 못했다.
여전히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가 서 있다.
이 반역을 하나님이 고치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리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리고는 이제 그들을 기쁘게 사랑하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밖에 모르신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다.
기뻐하면서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예쁜 짓하면, 하나님이 기뻐하면서 사랑하신다.
아파하면서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미운 짓만 골라서 하면, 하나님이 아파하면서 사랑하신다.
둘 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의 질까지 같을 수는 없다.

-그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파하면서 사랑하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징계를 당해 아팠고, 그런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은 더 아프셨다.
하나님은 그 아파하는 사랑을 끝내고 싶으셨다.
이제 그들을 기쁘게 사랑하고자 하신다.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가?
하나님이 기뻐하면서 여러분을 사랑하실 거 같은가?
아니면 하나님이 아파하면서 여러분을 사랑하실 거 같은가?

-하나님이 기뻐하면서 사랑하실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14:5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14:6 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14:7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들은 곡식 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주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기후가 건기와 우기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쯤은 다들 알 것이다.
건기에는 비가 전혀 오지 않는다.
그럼 식물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이슬 때문이다.

-이슬은 식물에게 생명이다.
이슬이 그치면 식물은 말라죽게 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주겠다는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겠다는 것이다.

-이슬이 내리는 때가 있다.
이슬이 아무 때나 내리지 않는다.
밤중에 내린다.
한 낮에는 내리지 않는다.
햇볕이 내리쬐는 정오에는 내리지 않는다.
그 때 내리면 땅에 내리기가 무섭게 금방 말라버린다.
이슬은 밤중에 내려야 한다.
이슬이 밤중에 내리는 게 제 때 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제 때 임한다.
하나님의 응답은 가장 절적할 때에 된다.
아픈 사람에게 밤중은 가장 고통스런 시간이다.
외로운 사람에게 밤중은 가장 힘겨운 시간이다.
그러나 그 밤중에, 그 고통스러운 밤중에, 그 힘겨운 밤중에, 하나님의 이슬 같은 은혜가 임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행 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이제까지 다 죽어가던 이스라엘이다.
수분을 받지 못해 고사 직전의 상태에 있었다.

-그 때 기적같이 하나님의 이슬 같은 은혜가 임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란 나무가 회복되었다.
백합화가 피었다.
레바논 백향목처럼 뿌리가 내렸다.
가지가 감람나무 같아졌다.
그 향기가 레바논 백향목 같았다.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왔다.

-다 죽어가던 이스라엘이 풍성한 곡식을 냈다.
향기로운 포도주가 나왔다.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한다.

-그 때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14:8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하나님이 그토록 듣고 싶어 하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이 말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영락없이 집나갔던 둘째 아들을 맞이했던 아버지 모습이다.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는 모습을 한 탕자를 와락 끌어안는 아버지다.
그리고 잔치를 준비하게 했다.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이 한 마디에 하나님이 흥분하셨다.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그 동안 미운 짓만 골라가면서 했던 것은 잊어버리고 이제 그들이 열매 맺게 될 거라고 축복하신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다.

-누가 이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9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이런 하나님을 깨달을 수 없다.
단지 의인만 깨달을 수 있다.

-누가 의인인가?
믿음의 사람이 의인이다.
의인의 길로 다니는 사람이 의인이다.
말씀의 나침반을 따라 사는 사람이 의인이다.

-결국은 말씀 밖에 없다.
말씀에 인생의 길이 있고, 말씀에 축복의 길이 있다.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기뻐하며 사랑하는 자녀가 되라.

-치즈로 유명한 크래프트 회사가 있다.
설립자인 크래프트의 이름을 따서 회사명을 지었다.
그는 가난한 시절을 보냈지만 신실한 믿음과 성실로 치즈 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런데 회사가 너무나 급작스럽게 성장하자 그는 주일을 지키기가 어려웠다.
한 번 두 번 예배를 빠지면서, 급기야 하나님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성장하던 회사가 갑자기 적자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생산 라인이 중단되기 시작했고 직원들이 하나 둘씩 떠나갔다.
크래프트는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군. 적자가 날 리가 없는데....’

-그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의 대답이 충격적이었다.
“나는 자네가 망할 줄 알았네. 자네, 회사를 시작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대로 한 적이 있는가? 믿는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는가? 하나님을 제쳐놓고 사업을 하는 것은 믿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네.”

-크래프트는 친구의 말을 듣고 새롭게 결단을 했다.
주일을 성수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무엇도 아닌 말씀을 붙든 것이다.
그 후 지금까지도 크래프트 치즈는 치즈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호세아 강해를 마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
설교자가 부족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다 풍성하게 드러내지 못했을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의 한 책을 마치면, 후련함과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은 빌립보서를 통해 주실 은혜를 기대하자.
설교자를 위해 기도해 주기 바란다.

-결국은 말씀 밖에 없다.
우리의 남은 삶의 여정에서, 말씀의 나침반에서 눈을 떼지 말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