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강해 8:하나님은 오늘도 기다리십니다.(호 5:8-15)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06-10 00:00
조회
910
호세아 강해 8하나님은 오늘도 기다리십니다.(호 5:8-15)2018. 6. 10. 프롤로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안정한 상황 가운데서도 나름대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그렇게 사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사는 것은 죄악된 삶이고, 계속해서 그렇게 살면 반드시 망하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환경이 여의치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걸어가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안한 나머지 말씀보다는 인간의 길을 택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가?5:8 너희가 기브아에서 뿔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나팔을 불며 벧아웬에서 외치기를 베냐민아 네 뒤를 쫓는다 할지어다

-예나 오늘이나 사람들에게 가장 두려운 게 있다면 전쟁일 것이다.
전쟁이 났다 하면 많은 인명 피해가 난다.
전쟁은 그 동안 쌓아올렸던 탑을 순식간에 무너뜨린다.
애써 모은 것을 단시간에 앗아가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전쟁은 막아야 하고 피해야 한다.

-지난해만해도 한반도 위기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구름사이로 햇살이 비치고 있다.
작년을 생각하면 마치 꿈꾸는 것 같다.
바라기는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의 위협이 없는 영구적인 평화가 오면 좋겠다.

-오늘 본문에는 전쟁을 예언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기서 ‘나팔’은 전쟁을 알리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기브아와 라마와 벧엘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기브아와 라마와 벧엘의 지정학적 위치다.
이곳들은 이스라엘에서 전쟁의 피해가 가장 적었던 비교적 안전지대였다.
모두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중간에 있는 도시들이다.
만일 적이 쳐들어오면 북쪽에서 내려오든지 아니면 남쪽에서 올라오기 때문에, 이 도시들은 언제나 피해가 적었다.
그렇담 이 도시에서 전쟁의 소리가 들린다는 말은, 하나님이 일으킨 전쟁에는 안전한 곳에 위치해 있어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전한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이 대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대적이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대적이 되시는데, 그들이 어디로 피할 수 있겠는가?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라고 고백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바로 이해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피해 도망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눈길을 피해 숨을 곳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사는 것이 불안하다며 이민을 간다.
그러나 이 세상 어떤 곳도 안전한 곳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곳이 가장 안전한 곳임을 믿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살길이다.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지켜주시고,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 사람들에게서 높여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사람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몸부림치는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에서 행복과 만족을 찾으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라. 5:9 벌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폐할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반드시 있을 일을 보였노라

-여기서 “황폐하다”는 말은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에브라임이 폐허가 된다는 말이다.
에브라임이 한 때는 강성한 요셉의 후손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거역하면 쓸 만한 것 하나 없는 폐허가 되고 말 것이라는 무서운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부요해진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등지고 안정된 삶을 택한 자들은, 지금은 괜찮아 보일지 모르지만, 벌하는 날이 이르렀을 때에 황폐화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섣부르게 판단할 일이 아니다.
지금 무얼 얼마나 가지고 있으며, 오늘 얼마나 누리고 있는가로 평가하지 말라.
나보다 잘됐다고 부러워할 필요도 기죽을 필요도 없고, 나보다 못됐다고 깔보거나 교만할 필요도 없다.
기준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거둔 모든 재물과 권세는, 하룻밤에 재로 변할 수 있다.

-황폐하게 되는 단계가 있다.

-첫 번째 이기심의 노예가 된다.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지 않는 사람을 발견하기 어렵다.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나눌 생각 안 하고, 선교할 생각은 안 하고, 더 쌓으려고 한다.
나중 무덤에 얼마나 많이 싸 짊어지고 갈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이웃의 눈물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우선 내 잇속부터 챙기고 봐야 한다는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황폐하게 되는 첫 번째 단계를 걷고 있는 것이다.

-본문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5:10 유다 지도자들은 경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그들에게 물 같이 부으리라

-‘경계표’는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땅의 소유를 표시하기 위해서 세운 나무이다.
그러므로 ‘경계표를 옮긴다’는 말은 자기 땅을 그만큼 넓힌다는 뜻이다.
아니 자기 땅을 넓히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런데 그게 문제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땅을 나눠 주셨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지주나 소작농의 개념이 없이 출발했다.
자기 땅에서 나는 농작물로 살았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분명 개인의 능력 차가 있다.
똑같은 땅을 가지고도 농사를 잘 짓는 사람들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 격차가 많이 벌어진다.

-계속해서 풍년이 들기라도 하면 그래도 살아갈 수는 있다.
어쩌다 흉년이라도 들면 식구들을 살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비싼 이자를 물고서라도 곡식이나 돈을 빌려야 한다.
흉년이 몇 년간 계속되면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곡식이나 돈을 빌려준 자들은, 그때 땅을 빼앗고 경계표를 거기까지 옮겨 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계표를 옮긴다’는 것은, 단순히 소유를 늘리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이웃을 무참하게 짓밟으면서, 자기의 부를 추구하는 것이다.
문제는 고리대금하고 곡식 장사하는 사람들이, 유다의 방백들이었다.
못된 졸부들이 그렇게 해도, 못하게 말려야 할 사회 지도층 인사였다.
오히려 그들이 앞장서서 악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화내실 법 하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을 잘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정을 허락하셨다.
그런데 딱 하나로 제한하셨다.
능력 있다고 가정을 몇 개씩 만들면 안 된다.
두 집 살림, 세 집 살림 차리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업을 허락하셨다.
수익이 더 많다고 해서, 신의를 저버리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은, 마땅히 불의를 행하며 많은 소득을 얻는 것보다, 의를 겸하여 적은 소득 얻는 것을 택해야 한다.

-이기심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할 내부의 적이다.
이기심의 노예가 되는 순간부터 우리 삶은 황폐해 지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황폐하게 되는 단계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많고 많은 민족 가운데 소수민족에 불과한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이 하나님의 기대를 여지없이 저버렸다. 5:11 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뒤따르기를 좋아하므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받는도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명령을 뒤따랐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당연하다는 듯 사람의 말에 귀 기울였다.
황폐하게 되는 두 번째 단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의 명령을 뒤따르다”는 말은 인간의 가치관을 따라서 행동했다는 말이다.
‘자기 식으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신앙생활을 했다는 말이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신앙인 줄, 당연히 그때는 잘 몰랐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 사정을 볼 때,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상황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람의 충고에도 귀를 기울이고, 저 사람의 삶의 방식도 본받았다.
그 결과 많은 친구들을 얻을 수 있었다.

-원래 자기 말을 잘 들어주면 친구로 받아준다.
그들은 많은 친구를 얻었지만, 대신 한 분 하나님을 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상대로 싸우게 된 것이다.
내가 말씀을 떠나면, 내가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황폐하게 되는 단계 세 번째는 하나님의 심판이 단계적으로 임하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이 세 단계로 온다. ① 좀 먹히고 썩히게 된다. 5:12 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좀이나 썩이는 것이 무엇인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은근히 파고 들어가서 썩게 만드는 것이다.
하루 이틀은 표시가 안 날 수 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좀이 먹고 곰팡이가 피어서 결국 못 먹고 못쓰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고, 하나님께서 곧바로 채찍을 대지 않으신다.
점차 마음에 기쁨이 없어지고, 사역에 대한 의욕이 떨어지게 된다.
다른 사람의 허물이 크게 보이고, 지도자들의 잘못이 눈에 자주 띄게 된다.
자기 합리화가 많아지고, 변명거리 핑계거리가 늘어난다.
“이러면 안 되는데… ” 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데 뭐” 하며 끌려간다.

-그러면서 또 자존심은 있어서, 자기 힘으로 신앙을 지켜내려고 한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장담할 수 없다.
그러므로 훈련이 필요하다.
물론 훈련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감정 조절을 훈련해야 한다.
화를 내 버릇하면 화낼 일이 아닌데도 자동적으로 화가 난다.
누가 특별히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데도 화가 난다.
화를 잘 내는 그리스도인 치고, 주님의 성품을 닮은 그리스도인을 못봤다.

-좋은 생각을 훈련해야 한다.
좋은 생각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자동적으로 좋은 생각이 되는 것이 아니다.
뭐든지 좋게 생각하려고 해야 한다.
어떤 상황이든지 긍정적으로 사고하려고 해야 한다.
삐뚤어진 생각을 가진 사람, 부정적인 생각으로 꽉 찬 사람 안에, 성령님이 자리 잡을 공간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 그날부로 우리의 삶에 좀이 침범하고 썩은 인생으로 전락하게 된다.

-하나밖에 없는 인생을 좀먹는 인생으로 살겠는가?
썩어가는 인생으로 살겠는가? ② 병들고 상처를 입게 된다. 5:13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자, 처음에 좀이나 썩이는 것을 보내셨다.
그 후 점차 강도를 높여서, 이번에는 병과 상처를 통하여 사인을 보내셨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든지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셨다.
이전의 잘못된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를 소원하셨다.
이게 하나님의 방법이다.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이 말씀은 그들이 자기의 근본적인 문제를 깨달았다는 뜻이 아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조공을 내야 하는데 낼만한 돈이 없다거나, 흉년이 들어서 곡식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지금까지는 말로만 들었다가 실제로 느끼게 된 것이다.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병을 통해, 상처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의 계획을 깨달은 것이 아니다.
어려움이 닥치자, 그들은 앗수르왕 야렙을 찾아갔다.
야렙 왕은 앗수르왕의 별명으로 “싸움꾼 왕”이란 뜻이다.
이른바 해결사를 찾아 간 것이다.
현재 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해결사를 찾아서 될 일이 아니다.
그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찾는 일이다.
이스라엘을 때린 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 날 야렙 왕을 찾아가도 고칠 수 없고 낫게 할 수 없다.

-당시에 이스라엘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은, 현실적으로 강대국을 업어야 했다.
그들과 좋은 대외관계를 맺지 않고는, 도저히 남아날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관점으로 보신다.
이스라엘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강대국에게 빌붙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이건 사실상 모험이다.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 모험이 아닌가?
양이 이리 가운데서 생존한다는 것은 기적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존재할 수가 없다.
그렇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 망하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해서, 믿지 않는 자와 원수 맺으라는 말이 아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불신자들을 통해서 우리를 돕기도 하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우리의 치료자가 될 수 없고, 그들이 우리의 돕는 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병과 상처가 없을 수 없다.
문제는 병듦과 상처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다.
병들고 상처 난 상황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찾아가 어설픈 위로를 구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③ 사자와 젊은 사자를 맞게 된다. 5:14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바로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좀과 곰팡이, 병과 상처를 보냈는데도 깨닫지 못하면, 그때는 어떻게 하는가?
마지막으로 사자를 보내신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대로, 지금 재미 삼아서 벌주시는 것이 아니다.
한 단계 한 단계가넘어갈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억장이 무너져 내린다.
다음 단계가 돌아올 때까지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입술은 바짝바짝 타버린다.
어떻게든 자기 백성을 버릴 수 없어 괴로워하시는 하나님을, 그들이 왜 그토록 몰라주는지 야속하기만 하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는 우리라고, 크게 다르지 않지만 말이다.

-여기서 ‘사자’는 앗수르를 말한다.
젊은 사자는 바벨론을 말한다.
움켜가고 탈취해 가겠다는 것은, 사자가 침공하여 그들을 물고 가도록 내버려두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수르의 포로가 되어 온갖 수탈과 탈취를 당하게 될 것이지만, 누구에게도 어떤 나라에게서도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러면 끝장이다.
이스라엘 역사가 이를 잘 증명해 준다.

-우리는 여기서 왜 하나님이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토록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느냐를 알아야 한다.
즉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본심이 무엇인지 눈치 채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무슨 감정이 있어서, 그들을 멸망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몹시 괴롭히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어떻게든 살기를 바라신다.

-그 사는 방법까지도 친절하게 안내해 주신다. 5:15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사는 방법 첫 번째는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기다리고 계신다.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밤새 기다리고 계신다.
탕자처럼 방탕했었어도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하신다.
고멜처럼 막가는 삶을 살았었다 해도 받아들이겠다고 하신다.
단 자신의 죄와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고 하신다.

-다만 시간을 끌면 안 된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삶이 황폐해져간다.
그 전에 기다리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사는 방법 두 번째는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라는 것이다.
고난 가운데서 기도해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 자신을 구해야 한다.
자신의 영혼을 위해 자신의 직분과 사역을 위해 주님을 간절히 구해야 한다.
주님이 피로 값주고 사신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눈물로 주님을 구해야 한다.

-내 영혼이 살고 교회가 살면 다른 것은 살 수 있다.
자기 영혼을 위한 기도 한 시간을 채우라.
자기 기도 시간의 절반은 교회를 위해서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