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강해 6:쉽고 편한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호 4:11-19)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05-27 00:00
조회
855
호세아 강해 6쉽고 편한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호 4:11-19)2018. 5. 27. 프롤로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하나님 앞에 시간 드리기를 싫어하고, 다음은 물질 드리기를 싫어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 성전 보다, 가까운 길갈이나 벧아웬에 가기를 좋아했다.
그곳이 가까울 뿐만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데도 부담도 없었기 때문이다.
죄를 고할 필요도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릴 필요도 없고, 제사의 마지막에 여사제들과의 황홀한 시간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빼앗아간 것들이 있다.4:11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그들의 겉모습은 여전히 종교적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찾았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 삶은 음행과 포도주에 빠져 있었다.
음행과 포도주는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판단력이 흐려진다.
스스로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살기 시작하며, 이제는 농사가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농사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것이었다.
믿을 만한 것은,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시는 것도 아니고, 메추라기를 몰아오시는 것도 아니니, 순전히 자기들 힘으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아야 했다.

-농사에 있어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햇빛과 비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비가 흔하지 않다.
우리는 장마 그러면 “아휴,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성경에서는 “복된 장마비”라고 표현했다.
그들에게 있어 비에 대한 고대는, 과히 광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비를 내리게 할 수만 있다면, 죄를 지어도 좋고, 하나님을 떠나도 상관없고, 음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사람들의 문화와 종교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다.
술에 미치면 집도 제대로 못 찾아간다.
음행에 미치면 아내와 남편, 자식도 못 알아본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움이 있으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고, 어디로 갔는가? 4:12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세상에... 나무에게 물었고, 막대기에게 고했다.
물론 여기서 나무나 막대기는, 아세라나 아스다롯 같은 여신이다.
그러나 호세아의 눈으로 보면, 이것들은 한낱 나무나 막대기에 지나지 않다.
사람이 이렇게 어리석을 수 있다.

-그들이 왜 나무나 막대기에게 찾아 갔을까?
사람들이 왜 우상에게 복을 빌까?
그게 부담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우상은 죄를 지적하지 않는다.
‘네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대해 묻지도 않는다.

-얼마나 편리한 신앙인가?
얼마나 쉬운 신앙생활인가?

-반면에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삶과 연관된 예배를 원하신다.
예배하러 오기 전에 ‘네가 어떻게 살았느냐’를 묻는다.
예배드릴 만한 삶을 살았느냐를 물으신다.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이 무엇인가?
내 속에 있는 죄를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의의 옷을 입을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죄인됨을 시인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자신의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니 부담스러울 수밖에...
사실 그건 꽤 불편하고 힘든 일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쉽고 편한 우상에게로 달려갔던 것이다.
그리고 절기 때만 하나님을 찾았던 것이다. 12...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이 말씀은 어쩔 수 없어서, 실수로,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없어서 이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이 길을 택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 발로 우상에게 걸어갔다.

-그런데 그렇게 된 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그들의 마음 속에는 음란이 꽉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알과 아스다롯의 축제가 그들의 생각을 온통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에 반해 하나님은 얼마나 따분한가?
그런 즐거움이 없다.
광야에서야 하나님이 없으면 당장에라도 죽지만, 지금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아도 당장에 그들이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란 존재는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교적으로 열심이었다. 4:13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좋음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

-이스라엘에는 산들이 작고 큰 나무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큰 나무들을 아주 신성하게 생각했다.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서, 풍년 제사를 드리곤 했다.

-그런데 야외에서 제사를 드리면서도 음행을 일삼았다. 4:14 너희 딸들이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

-젊은 여자들이 앞 다투어 음행했다.
말이 제사지 항상 중심에 섹스가 있었다.
왜 하나님이 그토록 우상 숭배를 말리는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생각해서다.
그들의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우리를 얽매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를 꼼짝달싹 못하게 해서, 우리를 맘대로 부려먹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걸 알면 하나님의 말씀을 즐겨 순종할 수 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범죄자가 있으면, 출애굽기부터 여호수아까지는 반드시 골라냈다.
그 죄인을 그냥 버려두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 보면 슬픈 말씀이 나온다.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제는 하나님께서 벌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이제는 죄가 너무 만연해서, 몇몇 사람을 가려낸다고 해서, 공동체가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는 말씀이다.
죄인이 한 두 사람일 때는, 그 죄인을 솎아내서 공동체를 깨끗하게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이 죄인일 때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젊은 여자들만 탓할 수 없는 게 남자들도 똑같았다.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남자들은 창기와 함께 놀아나고 음부와 함께 붙어 다녔다.
그들이 희생을 드리지 않아서 문제가 아니다.
제사를 드리지 않아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바른 예배를 원하신다.
바알에게 드리는 식으로 예배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이 제사떡 못 얻어먹어 굶어 죽으실 분이 아니다.

-한국 교회가 예배를 얼마나 많이 드리는가?
그 많은 예배 중에,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는 얼마나 될까 싶다.

-우리의 삶을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가 중요하다.
교회 바깥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의 삶이 딱히 문제 없을 수 있다.
정상적인 삶 같을 수 있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보시느냐이다.

-신앙을 삶의 여러 영역 중에 하나로 생각하기 쉽다.
직장 생활, 가정 생활, 취미 생활, 등 여러 생활 중에 하나로 신앙 생활을 보니 문제다.
“음행을 하지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도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내 신앙양심을 팔지 않고도 직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인생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뭐라 답하겠는가?
포도주와 곡식은 가나안 땅이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우리가 취직하고 승진하고 직장생활하는 것은, 운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 세상에 적응하기에 급급해서, 그들의 방식을 따라가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우리 삶의 원리가 세상 사람들의 원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그들을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쉽게 살려고 해서 문제가 된다.
세상의 방식으로 살려고 하면, 편할지는 모르지만 세상에 먹히고 만다.
신앙인이 세상 방식대로 살아서는, 절대로 그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함께 하시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전체를 에덴동산으로 만들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하라.
에덴동산은 아주 작은 부분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세상을 에덴처럼 경작하고 창조해 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주신 명령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삶의 터전을 개척해야 한다.
우리의 일터를 에덴으로 가꾸어야 한다.
우리의 가정을 낙원으로 꾸며가야 한다.

-이스라엘은 바뀔 가능성이 별로 없었다. 4:15 이스라엘아 너는 음행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지어다

-이스라엘 네가 행음하고 사는 것은 좋지만, 왜 유다까지 그런 식으로 범죄하게 만드냐는 것이다.
유다만이라도 하나님을 잘 섬기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자고로 이웃을 잘 만나야 한다.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은 큰 복이다.
유다는 이웃의 영향을 받았다.
유다도 이웃인 이스라엘을 닮아가고 있다.
유다마저도 이스라엘의 못된 제사방법을 따라가고 있다.
이웃과 가까이 지내다 보면, 이처럼 닮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웃을 잘 골라서 사귀어야 한다.
교회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이웃은, 할 수 있으면 멀리해야 한다.
목회자에 대해 험담하기를 좋아하는 이웃은, 멀찍이 경계해야 한다.
그 사람은 내 신앙에 유익을 주는 이웃이 못 된다. “이 사람은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다.” 15 ....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길갈과 벧엘은 그 동안 좋은 이웃이었다.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뜻깊은 곳들이다.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께 헌신을 다짐했던 곳이다.
광야를 여행하는 동안에는 할례를 행할 수가 없었다.
가나안 땅에 넘어와서, 그들에게 가장 꺼림칙한 것은 바로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적을 눈앞에 두고 할례를 실시했다.
애굽에서의 죄의 흔적을 청산한다고 했지만, 아직도 포기하지 못했던 죄의 흔적을 잘라서 굴려보냈다고 해서, 그 곳 이름이 길갈이다.

-벧아웬은 벧엘의 별명이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주신 곳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뜻깊은 장소다.

-그런데 하나님이 길갈과 벧엘로 가지 말라고 한다.
이 두 곳이 음란한 예배의 본산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때 유명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이 중요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길갈과 벧아웬에 얼씬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 우리 영혼을 더럽히는 것들은 일차적으로 멀리해야 한다.
할 수 있으면 보지도 말고 생각도 말고 관심도 갖지 말아야 한다.
길갈과 벧아웬으로 올라 간 이상, 어떻게 할 재간이 없다.
모든 사람에게는 길갈과 벧아웬이 있을 수 있다.
그곳에 가지 말아야 믿음을 지킬 수 있다. 15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지어다”
장담하지 말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허풍떨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자기의 죄를 얼버무리지 말라는 뜻이다.
대신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께 “죄와 세상을 이길 능력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겸비하여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

-고집이 문제다. 4:16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그들을 먹이시겠느냐

-이스라엘의 고집은 하나님도 못 말린다.
한 번도 멍에를 맨 적이 없는 암소는, 모든 것이 제 멋대로다.
아무도 못 말린다.
한번 가야겠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때리고 꼬리를 잡아당겨도 무조건 간다.
코를 뚫지 않고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반면 양은 다르다.
물론 좀 늦게 오는 양도 있고, 놀다 오는 양도 있지만, 결국에는 따라 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방식은 목양이다.
양떼를 넓은 들판에 자유롭게 풀어놓는 것이다.
결코 양의 코를 뚫어서 몰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에 자발적인 순종을 원하신다.
결코 노예 근성에 젖어 굴복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목회자가 아무리 기도하라고 해도 죽어라고 기도하지 않는 교인들이 있다.
기도하다가 호랑이한테 물려 간 조상이라도 있는지, 이 핑계, 저 핑계, 기발한 핑계를 대면서 기도하지 않는다.
본문에 나오는 암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목사는 목자지 카우보이가 아니다.

-우상과 연합하고 아예 우상과 하나가 돼버린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시겠다고 하는가? 4:17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

-우상과 짝짝꿍 놀아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다고 하는가?
“버려두라”
우상을 섬기면서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받거나 갈등하는 빛도 없으니, 하나님도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두라”고 하신다.
정말 무서운 말씀이다.
가장 절망적인 선포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죄짓는 데 용기가 대단했다. 4:18 그들이 마시기를 다 하고는 이어서 음행하였으며 그들은 부끄러운 일을 좋아하느니라

-그들은 하나님 보기를 돌같이 했다.
그러자 하나님이 어디까지 가나 지켜보셨다.

-그럼 지도자들이라도 깨어 있었는가?18 ...그들은 부끄러운 일을 좋아하느니라”
지도자들이라도 백성들의 수치를 하나님 앞에 갖고 나가 회개했는가?
그들 역시 그 부끄러운 일을 좋아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내리신 결론이 무엇인가? 4:19 바람이 그 날개로 그를 쌌나니 그들이 그 제물로 말미암아 부끄러운 일을 당하리라

-그들을 날개로 싸서 다른 곳에 버려야겠다는 것이다.
“바람이 그 날개로 싼다”는 것은, 바람이 그들을 그대로 싸서 어디론가 데리고 간다는 뜻이다.
“그 제물로 인하여 부끄러운 일을 당한다”는 것은, 그들이 그 많은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쳤지만, 그것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손을 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더 이상 뒤를 봐주시지 않겠다는 것이다.
예배를 드려도 기도를 해도 관심조차 갖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업이 신통찮고, 장사도 안 되고, 회사에서도 힘들고,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는가?
신앙을 슬쩍 버리고, ‘세상의 방식을 따라가야 하는 거 아닌가’ 고민한 적 없는가?
“세상에는 신앙이 안 먹히는구나. 신앙이 교회에서는 통해도 세상에서는 안 통하는구나.” 하고 좌절해 본 적은 없는가?
그러다 신앙의 형식만 남은 채, 그들과 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살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믿음은 가지고 있지만, 기도는 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나는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지는 않겠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의 편한 방식을 따라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
쉬운 것에 따라 줏대 없이 이리 저리 밀려다니기를 원치 않으신다.
오히려 쉽고 편한 길이 위험한 길일 수 있다고 경고하신다.

-다른 사람이 쉽게 살면서 잘 사는 것을 부러워하지 말라.
분명한 것은 생명의 길이 넓을 리가 없다.
길이 좁고 좀 힘들어도, 좀 불편해도, 믿음의 길을 끝까지 잘 걷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