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주일(2018):누가 부활의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났는가?(요 20:1-18)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04-01 00:00
조회
998
부활주일(2018)누가 부활의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났는가?(요 20:1-18)2018. 4. 1. 프롤로그

-우리는 지난 한 주간 고난주간기도회로 모였다.
매일 저녁 찬양 20분, 말씀 20분, 기도 20분, 한 시간을 주님 앞에서 보냈다.

-주제곡으로 찬송가 146장을 불렀다. 저 멀리 푸른 언덕에 그 십자가 위에주 예수 나를 위하여 못 박혀 죽었네그 귀한 주의 사랑이 날 구원하시니그 사랑 나도 본받아 주 위해 힘쓰리

-이 찬송을 부르며 자신을 십자가 앞에 세우는 다짐을 했다.
자신을 십자가 앞에 세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십자가 앞에 선 사람만이 빈 무덤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 앞에서 도망갔던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빈 무덤 앞에서도 도망가고 말았다.

-부활기사의 초점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찬찬히 보라.
수제자 베드로에게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주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에게 있는가? 그렇지도 않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왜 열두 제자들을 제쳐두고, 막달라 마리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을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녀가 십자가 앞에 섰던 여인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그녀가 십자가 앞에 섰던 이유도 이미 알고 있다.
무엇 때문에 그 자리에 섰는가?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주님을 너무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십자가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주님을 사랑함이 없이는, 우리도 십자가 앞에 설 수 없다.
십자가 앞에 남이 서 있다고 해서, 나도 설 수 있는 게 아니다.
주님을 자기 목숨보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십자가 앞에 설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제 3일째 되는 주일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 앞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기사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때가 언제인지를 보라.20: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때가 언제였는가?
그 때가 새벽이었을 4복음서 기자들이 공통되게 기록하고 있다.
복음서 순서대로 살펴보겠다. 마 28:1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 16: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눅 2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요 20: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도착했을 때, 예수님의 무덤은 이미 비어있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보다 이른 새벽에 부활하셨다는 말이 된다.
본문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때를,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라고, 긴 수식어를 붙여 기술한 의도가 있다.
새벽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의 부활이 새벽에 있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다.

-성경은 새벽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특히 강조한다.
성경을 새벽의 책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기적들이 새벽에 일어났다.
홍해가 육지처럼 짝~ 갈라진 때가 새벽이었다.
하늘에서 만나가 이슬처럼 내려진 때가 새벽이었다.
견고한 여리고성이 와르르 무너진 때가 새벽이었다.
히스기야가 앗수르에 승리를 확인한 때가 새벽이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이 구원받을 때가 새벽이었다.
베드로가 갈릴리에서 사도로 회복될 때가 새벽이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때가 새벽이었다.

-새벽은 시작의 시간이다.
새벽은 대망하는 시간이다.
새벽은 축복의 시간이다.
새벽은 기적의 시간이다.

-예수님이 새벽에 부활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새벽은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시간이다.
새벽은 예수님이 아버지께 드린 시간의 첫 열매였다.
예수님이 새벽에 부활하신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2018 부활절을 기점으로 우리 교우들 중에서, ‘새벽 사람’, ‘아침형 인간’으로 부활하는 사람이 몇 명이라도 생겨나면 좋겠다.

-사실 새벽기도는 쉽지는 않다.
본래부터 새벽체질인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원래부터 심야체질도 없다.
사람의 몸은 길들이기에 달려 있다.

-고려대 의대 교수였던 문국진 씨가 월간《한국인》에 기고한 글을 소개하겠다.

-제목 : 새벽 아침에 인생을 건다.
내가 아침 시간을 이용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동기는 이렇다.
학창 시절 나는 배구 선수였다.
심한 운동 연습에 시달리고 집에 들어오면, 저녁 밥술을 놓자마자 깊은 잠에 빠지곤 했고, 아침 등교시간 가까이 되어서야 겨우 잠에서 깨곤 했다.

-한 번은 이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힘든 운동을 남보다 훌륭하게 할 수 있다면, 공부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운동을 포기하지 말고 두 가지를 양립시켜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밤 시간은 도저히 불가능하니, 아침에 한 시간만 일찍 일어나 보자.’

-사실 아침에 한 시간 일찍 일어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눈은 떨어졌지만, 몸이 좀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되도록 많은 물을 마셨다.
그러고 나면 다음날 새벽에 소변을 보기 위해서라도 일단 눈이 떠지게 되고, 움직여야 소변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되도록 잠자는 시간은 밤에, 그리고 새벽시간에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3개월이 지났을 무렵에는 새벽 5시에는 깰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는 것을 완전히 습관화했다.
이렇게 약 10년 동안을 하다가, 한 시간을 더 얻기 위해 새벽 3시로 옮겨, 이제는 그것이 몸에 배어 완전히 나 자신의 것이 되어 버렸다.”

-문국진 교수의 글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말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이다.
심야체질을 새벽체질로 바꾸기 위해서는,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보지 않고, “나는 새벽기도만큼은 힘들어” 하고 말하지 마라.
감히 장담할 수 있다.
새벽기도 하지 않는 사람치고, 기도생활 잘하는 사람 흔하지 않다.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예수님이 장사된 무덤으로 갔다.
그냥 좀 이른 시각이 아니라, 아직 어두움이 짙게 깔려있는 새벽이었다.
왜 그녀가 그 시간을 택했을까?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주님을 사랑해서였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 때문이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이 살아 계실 때도, 주님을 무척 사랑했다.
그녀의 예수님 사랑은 주님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경청하는 것으로 잘 표현했다.
그녀의 예수님 사랑은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섬기는 것으로 잘 표현했다.
제자들은 흘려들었으나,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했기에 예수님이 죽으실 것을 알았고, 더욱 가까이서 따랐다.
마리아의 예수님 사랑은 신실했다.
그녀는 예수님이 살아있을 때뿐 아니라, 죽은 후에도 변함없는 사랑을 가졌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변함없는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자.
내 필요를 채워주는 것과 상관없이 무조건 주님을 사랑하자.
사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반드시 표현되어져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으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주님의 쓸 것을 채우고 헌신하는 것으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우리가 주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가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환경 때문인가?
진짜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보다는 우리가 주님을 덜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막달라 마리아를 보라.
그녀는 주님을 누구보다 사랑했기에, 제자들조차 버리고 떠나간 십자가 앞에 남아서, 주님이 운명하시는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지 않았는가?
그녀는 주님을 누구보다 사랑했기에, 큰 돌로 입구가 막혀있고 거기다 인봉까지 되어있는 줄 알면서도, 새벽에 무덤을 찾아오지 않았는가?
환경 탓하려고 하지 말자.
주님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한 걸, 슬그머니 환경 탓으로 돌리려고 하지 말자.

-대신 주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우리에게 주님 사랑을 부어달라고 더욱 기도하자.

-막달라 마리아는 지난밤을 초조하게 보냈을 것이다.
울면서 뜬 눈으로 지새웠을 것이다.
그녀는 아직 날이 밝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해 둔 향품을 챙겨, 어두움이 채 걷히지도 않은 새벽길을 나섰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몇 명의 여인들과 동행한 것으로 나온다. 막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마가복음에서 보듯이,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거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의 말에서 알 수 있다.“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그들은 대책도 없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것이다.
그들은 정말 대책 없는 여자들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원래부터 대책없는 여자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예수님 사랑에 눈멀어 대책없는 여인들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대책 없이 나선 그녀들에게 하나님이 대책이 되어 주셨다는 사실이다.

-만약 무덤 앞의 돌을 굴릴 대책을 스스로 세우려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며칠이 지나도 대책을 세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대책으로 사는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 대책으로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나가면 하나님이 대책이 되어 주신다.
우리 앞서 대책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성경에서 다른 말로 ‘여호와 이레’라고 한다.

-우리 모두가 부활절을 맞아, 하나님의 대책 ‘여호와 이레’의 주인공이 되기 바란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대책없이 나갔던 여인들에게, 돌이 굴려진 기적이 있었다.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돌들이 있다.
그 돌이 없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그 때 그 돌을 어떻게 굴리려는가?
여러분은 그 돌을 굴릴 수 있는 무슨 기발한 대책이 있는가?
여러분은 돌을 굴려낼 어떤 뾰족한 대책이라도 갖고 있는가?

-하나님을 대책 삼기 바란다.
우리가 몇날 며칠을 끙끙대며 세우는 대책보다, 하나님의 대책을 기대하기 바란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대책이 되어주신 하나님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는 오늘 우리에게도 대책이 되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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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이 열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알렸다. 20:2 시몬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여인들이 무덤 문이 열려있어서 조심스럽게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
그녀들은 그 새벽에 달려가서 제자들에게 알린 것을 볼 때, 너무나 놀랐던 것이 틀림없다.
누군가가 무덤을 열고는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간 것이 틀림없다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반응이 어떠했는가?20: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6 시몬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두 제자가 무덤으로 갔다.
그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걸어갈 리가 없다.
그들은 달음질하였다.
달리기 경주하듯 뛰었다.
요한이 베드로보다 빨리 도착을 했으나, 그는 무덤에 들어가지 않았다.
베드로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베드로는 도착하자 말자, 숨고를 여유도 없이 곧 바로 무덤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둘의 성격이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다.
요한은 성격이 세심한 사람이다.
“구푸려”의 원어 ‘파라큐사스’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하여 허리를 굽히고 들여다보는 것을 말한다.
요한은 세심하게 관찰했을 뿐 선뜻 들어가지 않고 있다가, 베드로를 뒤따라 들어갔다.
반면 베드로는 성격이 급한 사람이다.
그는 도착하자 말자, 단숨에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되었던 곳 앞에 선 것이다.

-예수님은 급하고 덜렁대는 베드로도 쓰시고, 우유부단하고 세심한 요한도 쓰셨다.
사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베드로 같은 사람도 있어야 하고, 요한 같은 사람도 있어야 한다.
모든 교인들이 베드로 같다면, 또 모든 교인들이 요한 같다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는가?
교회는 베드로 같은 사람들과 요한 같은 사람들이, 골고루 잘 섞여 있어야 한다.
그래서 조화를 이뤄야 한다.
조화는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 줄 때 이룰 수 있다.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인정해 줄 때 비로소 조화가 가능해진다.

-우리교회가 베드로와 요한이 멋진 조화를 이루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베드로와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가 이른 새벽에 달려와서,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했을 때, 그 말을 믿지 않았던 것 같다. 20: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만 제자리에 남아있고, 정작 있어야 할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사실로 입증된 것이다.
“설마” 하고 뛰어 왔는데, “여자들이 잘못 봤겠지” 하고 달려왔는데, 그 말이 사실로 판명난 것이다.
그 때가 봄이지만, 이른 새벽이기에 추위가 느껴졌을 것이다.
또 지금은 병사들이 보이지 않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일이다.
자칫하다간 자기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간 범인으로 몰릴지도 몰랐다.
그러자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두 제자는 어떻게 했는가?20: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사실 두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해서 무덤을 찾은 게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해서 무덤에 달려온 것이 아니다.
단순히 시신이 없어졌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왔다.
그런데 와서 보니 실제로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시신도 없는 무덤 앞에서, 더 이상 서성거리고 있어봤자다.
괜히 무덤 주위에 있다가는, 자칫 봉변만 당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했는가?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하고 넘어갈 게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일날 교회를 찾아 나오긴 한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애정은 별로 없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긴 한다.
그러나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은 깊지 않다.
주님을 소리 높여 부르긴 한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타는 목마름은 없다.

-마치 예수님의 무덤에 달려와서,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집으로 간 두 제자 같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모하는 자들을 만나주신다.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20: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단순히 확인 차 왔다가,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
그저 빈 무덤만 확인했을 뿐이다.
빈 무덤 밖에서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로 뵙는 영광을 누렸다.
그녀도 처음에는 예수님인줄 몰라봤다.
예수님을 동산지기인줄로 착각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여자여” 라는 호칭 때문이기도 했을 것 같다.
이어서 주님이 “마리아야” 부르니, 곧바로 “랍오니”로 대답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두 제자의 행동과 막달라 마리아의 행동을, 꼼꼼히 보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이왕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을 수제자 베드로와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에게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께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집으로 갔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막14:31)”할 때의, 그 호기가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그들은 서둘러 무덤 앞을 빠져나갔다.
그것도 연약한 여인을 홀로 남겨두고 말이다.
자기들 살겠다고, 울고 있는 마리아를 홀로 두고 말이다.

-주님은 오늘도 사모하는 영혼을 찾고 계신다.
주님은 이 시간도 주린 영혼을 찾고 계신다.

-시편기자의 고백을 들어보자.시 107: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을 만나주신다.
그들에게 친근히 다가오신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신다.
주님이 지금 이 시간에도 가장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를 전심으로 찾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부흥이 어디서 오는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에서 온다.
주님을 뵈옵고 싶어 하는 열망에서 온다.
부흥이 임하는 현장에는..., 항상 하나님을 애타게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님께 목말라하는 영혼들이 있었다.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배고픔이 있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타는 갈증이 있기를 바란다.
그 때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고,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실 때, 이 땅에 다시 부흥이 임하게 될 줄 믿는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도들이 아닌 비천한 과거를 가진, 그 여인에게 먼저 보이셨다.
며칠 전 예수님을 너무 사랑했기에 십자가 아래 서 있었던, 그 여인에게 먼저 보이셨다.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예수님의 고난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며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던, 그 여인에게 먼저 보이셨다.
시신만이라도 한 번 보고 싶어하던, 그 여인에게 부활하신 자신의 모습을 먼저 보이셨다.

-이건 제자들의 가슴에, 일평생 지워지지 않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12제자’라고 ‘사도’라고 ‘남자’라고 으스댔다면,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사도냐 평범한 여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느냐가 중요하다.

-남자냐 여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주님을 사모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주님께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주의 몸된 교회 공동체 앞에서 겸허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다시 제자들을 찾아갔다.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그녀가 찾아가서 뭐라고 말했는가? “내가 주를 보았다”
자기가 주님을 만났다는 것을 말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의 한결같은 반응은, 자기가 만난 주님을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주님이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자신을 다시 점검할 차례이다.
우리는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만났다.
우리가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되었다.
특별한 사람만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남아 있는 삶을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