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2018):십자가 위에서의 네 번째 말씀(마 27:45-50)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03-25 00:00
조회
721
종려주일(2018)십자가 위에서의 네 번째 말씀(마 27:45-50)2018. 3. 25. 프롤로그

-우리는 매년 종려주일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마디 말씀을 차례로 살펴보고 있다.
오늘은 네 번째 말씀을 들을 차례다.
네 번째 말씀을 상고하기 전에, 첫 번째 말씀부터 세 번째 말씀까지를, 다시 한 번 정리해보겠다.

-첫 번째 말씀이 무엇인가?눅 2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용서에 대한 말씀이다.

-J.C 라일은 이렇게 말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동안에 하신 것이거나, 십자가에 세워진 직후에 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몸이 속죄 제물로 드려져 피를 쏟으시는 순간에, 이와 같은 중보의 기도를 하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그분의 처형됨을 기뻐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를 구하셨다.
예수님은 운명하시는 순간까지 용서하셨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까지 용서하셨다.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분들이 있는가
이번 고난주간을 맞아 용서하기 바란다.

-두 번째 말씀이 무엇인가?눅 23:43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구원을 약속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양 옆에 두 명의 강도가 있었다.
예수님의 용서를 위한 기도에 마음이 변화된 것인지, 한 강도가 예수님께 부탁을 해왔다.
그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조롱했다.
그러나 무죄한 죽임을 당하면서도 욕하거나 저주로 대항하지 않고, 고통을 묵묵히 감수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누가는 그의 말을 이렇게 적었다.눅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생전에 그렇게 악하게 살았던 강도였지만,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다.
구원이 자신의 공로가 아닌, 오직 예수님의 은혜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혹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이 있는가?
구원은 자신의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은혜로 받는다.
나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로 받는다.
고난주간기도회가 고행이 아닌 감사가 되기를 바란다.

-세 번째 말씀이 무엇인가?요 19:26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모친을 부탁하는 말씀이다.

-요한복음 19장에 의하면, 십자가 아래에는 예수님의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도 서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어떻게 지켜보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거나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모친의 마음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요한을 향해 머리짓을 하면서, 세 번째 말씀을 하셨다. “보라 네 어머니라”
어머니의 노년을 부탁하신 것이다.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들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애쓰심을 볼 수 있다.

-혹시 부모님과 좋지 못한 관계에 있는가?
고난주간을 부모님과 관계회복의 기간으로 삼기 바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세 번째 말씀을 하신 후, 세 시간 가까운 침묵이 흘렀다.
예수님은 세 시간 동안의 침묵 속에서,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진노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끔찍한 형벌을 당하셨다.
이것은 견딜 수 없는 육체적인 고통이었다.
출혈과 함께 지옥을 넘나드는 것 같은 육체적 고통이 있었다.

-정신적인 고통 역시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제자 유다에게 배신당한 아픔과, 수제자 베드로에게 부인당한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은, 육체적 고통에 그치지 않는다.
정신적인 고통이 전부가 아니다.

-영혼으로 당하신 고통이 있다.
주님이 당하신 영적인 고통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인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고통이었다.
바로 아버지와 단절되는 고통이었다.

-제 육시부터 네 번째 말씀을 하신 제 구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탄생하실 때 빛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이셨는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순간에는 어두움을 내리셨다.
인간의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아이작 왓츠는 이렇게 고백했다. 143장 3절 주 십자가 못 박힐 때 그 해도 빚 잃고그 밝은 빛 가리워서 캄캄케 되었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에, 해가 빛을 잃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없는 세상은 암흑천지다.
예수님이 없는 삶은 어두움 아래 있다.
그 안에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어두움의 영의 지배를 받는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요 12: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도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어두움 가운데 있었다.
우리 안에는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울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둠의 세력에서 벗어났다.
다시는 어둠의 자식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고,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한다.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교회는 다니면서도, 여전히 어두움의 영에 인도를 받는다면, 엄청난 불행이요 비극이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이 시간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하신다. 고후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예수님의 사람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세상 속에서 자기 정체성(Identity)을 분명히 갖기 바란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채 크게 소리를 지르셨다.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사실 이런 말은, 구원으로부터 멀어져 멸망하는 죄인이 부르짖으며 통곡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왔다.
예수님은 구원자로 오셨다.
마태는 예수란 이름의 뜻을,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다.
그런데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버려진 채 부르짖고 있다.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 어찌 자신마저도 구원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을까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누가는 당시 사람들도, 그런 의문을 갖고 있었음을 증언해주고 있다. 눅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그러나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철저히 버림받는 것이,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에게, 십자가가 이해될 수 없다.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모른다.
그들은 십자가 위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예수님의 절규에서, 고통을 이기지 못해 울부짖는 죄수 이상을 보지 못한다.
그게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리셨는지를 안다.
그 분이 왜 저주의 십자가를 지셨고, 그 분이 왜 그 저주의 형틀에 못 박히셨는지를 안다.

-이건 말할 수 없는 은혜다.
이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혜다.
눈물로 감사해야 할 은혜 중에 은혜다.

-찬송가 143장 4절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와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아이작 왓츠의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지 몇 시간이 지났는데, 무슨 힘이 남아있어서, 크게 소리 지를 수 있었을까?
운명하기 전 죽을힘을 다하여 하신 말씀일 것이다.
아버지와 단절된 영혼의 고통에서 비롯된 울부짖음이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한 순간도 끊어진 적이 없다.
늘 함께 하셨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셨다.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그런데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버려졌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본래 이 말씀은 시편에 있다. 시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죽음 직전에 있는 예수님이, 시편을 말씀하신 것을 통해, 그분이 얼마나 말씀을 사랑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정의했다.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은 태초의 말씀이시다.
예수님은 육신이 되신 말씀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이시다.
그럼에도 말씀을 사랑하여 가까이 하셨고 암송하셨다.
또한 그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가르치셨다.
더 나아가 자신의 모든 생애를 통해 말씀을 이루어가셨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생애는 말씀에 붙들린 생애였다.
그랬기에 십자가의 모진 고통 속에서도 말씀을 붙들 수 있었다.
그 숨쉬기 힘든 상황에서도 말씀으로 기도할 수 있었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앞두고 꼭 생각해 봐야 할 게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내가 어떤 관계에 있는가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말씀의 사람인가를 확인해야 한다.
예수님의 고통 당하심을 보고,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내가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하게 살아간다면, 우리는 자신의 눈물에 속고 있는 것이다.

-시편 기자가 이렇게 고백한다.시 119:161 고관들이 거짓으로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162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163 나는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율법을 사랑하나이다

-시인의 고백을 통해, 자신이 말씀의 사람인지를 확인해볼 수 있다.
시인은 하나님을 경외했기에, 또한 주의 말씀을 경외했다.
그는 하나님을 즐거워했기에, 또한 주의 말씀을 즐거워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또한 주의 법을 사랑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기 바란다.
돈벌이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기 바란다.
어떤 놀이나 재미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기 바란다.

-어떤 형제가 수련회에 참석했다.
자기도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며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당신을 만나야 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만나주십시오.”

-너무나 간절하게 기도했는데, 뜻밖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나를 만나서 뭐할래?”
정작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그는 아무 대답도 못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 그 형제가 간증문을 작성했다.
그 간증문의 일부이다.

-그 때에 하나님은 침묵을 깨고 제게 말씀하셨다.
“네가 나를 만나서 뭐할래?”
저는 순간 아무 말씀도 못 드렸다.
정말 그렇게 간절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고, 하나님이 정작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멈춰버렸다.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을 때, 이내 들려오는 말씀이 있었다.
“살아가거라. 네게는 이미 내가 준 말씀이 있으니,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거라.”
이 말씀을 하시고는 이내 떠나가셨다.

-찬송가 442장이 생각났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주님도 우셨고 나도 울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눈물로 고백하면서도,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건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니다.
말씀의 사람은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살다가, 말씀을 따라 영광스럽게 죽는 사람이다.
신앙을 감상적으로 생각하지 마라.
신앙은 삶이다.
신앙은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시편의 말씀으로, 아버지께 버림받았음을 증거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을까?
아버지께서 정말 독생자 예수를 그렇게 버리셨을까?
그렇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셨고, 아버지는 아들을 버리셨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인류의 죄를 짊어지셨기에, 십자가에서는 가장 큰 죄인이 되었다.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진노의 잔을 쏟아 부으셨다.

-완전히 버리신 것이다.
버린 척 한 게 아니다.
버리신 흉내만 낸 것이 아니다.
주님 곁에서 수종 들던 천사도 보이지 않는다.
태양조차 예수님께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십자가 아래에는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하는 여인들이 있었지만, 그게 조금은 위로가 되었을지 몰라도, 아버지께 버림받은 것을 대신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 번도 아버지의 말씀에 불순종하신 적이 없었던 예수님께서, 왜 그처럼 버림을 받으셔야 했을까?
하나님의 뜻에 한번도 “아니오” 하신 적이 없었던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버림을 받으셔야 했을까?
죄는 우리가 졌는데, 불순종은 우리가 했는데, 왜 예수님이 버림을 받으셔야 했을까?

-우리의 죄 때문이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예수님이 속죄양으로서 버림받아 죽으신 것이다.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렇다. 주님은 우리 때문에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셨다.
그러나 주님은 한순간도 우리를 탓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보면, 그걸 분명히 알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로 오셔서, 고개 숙인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 때 베드로가 대답했다.“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한 가지를 확인하셨다.
그 한 가지가 무엇인가?
사랑이다.
베드로가 지금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셨다.
사실 그거면 됐다.
예수님한테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사랑하는 한꿈교회 믿음의 식구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신 예수님을 사랑하자.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사랑하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 하신 예수님을 사랑하자.

-주님께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자.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사랑합니다 그 것 뿐예요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라는 고백을 받으신, 예수님은 고난주간 내내 만나자고 하신다.
“사랑합니다 그 것 뿐예요”라는 고백을 기뻐하신, 예수님이 매일 저녁마다 보자고 하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셨다.
한 주간 저녁기도회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다.
어떻게든 시간을 조정해서 참여하도록 애쓰기 바란다.
이번 한 주간을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작게라도 그 고난에 동참하는 하루하루를 보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