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강해 1: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호 1:1-2:1)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03-18 00:00
조회
1310
호세아 강해 1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호 1:1-2:1)2018. 3. 18. 프롤로그

-마태복음에 이어서 구약성서 호세아의 말씀을 강해하겠다.
호세아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설교자를 통해 한꿈교회 가족들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말씀을 사모하기 바란다.
아울러 설교자를 위해 기도해주기 바란다.

-교회가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면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는다.
대신 하나님께 무관심한 길을 택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버리는 길을 택한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구약성서 호세아다.

-호세아 당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날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 공동체 자체가 곧 교회였기 때문이다.
교회를 떠난다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와 가나안 땅을 완전히 떠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럼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은 채, 종교적인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떠났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몸은 교회를 떠나지는 않았어도, 마음은 이미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꽤 있다.
몸은 주일마다 교회를 찾지만,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진 사람이 많이 있다.

-호세아의 중요한 메시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언약이 파기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냥 말씀하시면 백성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못 믿는 시대였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를 아주 음란한 아내와 결혼하게 해서, 그 아내가 계속 부정한 생활을 하고, 부정한 자식을 낳게 하셨다.
“봐라, 어떻게 이 아내가 호세아의 아내일 수 있으며, 이 자식들이 어떻게 호세아의 자식일 수 있겠느냐?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을 어떻게 ”내 나라“라고 할 수 있으며, 너희를 어떻게 내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선언하신 것이다.

-호세아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지하게 받아야 할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교회 밖에 있는 불신앙보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불신앙이,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 신앙을 버리는 것은, 사실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그러나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불신앙은, 교회 전체를 오염시킬 수 있다.
오늘날 교회가 안고 있는 어려움은, 교회 밖의 불신앙이 아니다.
자신의 신앙이 아주 좋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너무너무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가슴이 철렁해야 그 영혼이 정상이다.
‘고멜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구나’ 하는 신음이 나와야 정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눈물이 나와야 정상이다.

-호세아는 먼저 자기가 예언한 시대가 언제인지를 밝히고 있다. 1:1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 때는 남쪽 유다가 악한 왕 아하스의 고비를 넘어, 선한 왕 히스기야가 부흥을 일으킨 시기였다.
북쪽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전성기를 맞은 시기였다.
북쪽 이스라엘은 늘 형편이 어려웠다.
늘 침체되어 있었다.
물론 그 이유는 잘못된 신앙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안타깝게 여기신 하나님이 생각을 바꾸셨다.
그들에게 분에 넘치는 복을 주셨다.
그래서 때 아닌 부자가 되었다.
영토가 넓어졌다.
이른바 강대국이 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자기들의 받은 복이 오히려 해악이 되었다.
스스로를 교만하게 만들었고, 더 담대하게 죄를 짓게 되었다.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물질적인 축복은 축복임과 동시에 무서운 시험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에게 실제로 돈이 생겨보면, 그가 지닌 신앙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돈지갑이 회개해야 진정한 회개를 한 사람이다”란 존 웨슬레의 말은 진리다.

-우리는 잘될 때 조심해야 한다.
일이 술술 잘 풀릴 때 삼가 조심해야 한다.
특히 까닭 없이 잘될 때는 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

-북 이스라엘은 이렇게 물질적으로는 대단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영적-도덕적으론 타락의 길에 서 있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불러, 그에게 말씀을 주셨다. 1:2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하나님께서 오래 침묵하다가 드디어 입을 여셨다.
이스라엘이 하는 짓을 보고, 참고 또 참으시다가, 드디어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첫마디가 무엇인가?“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호세아에 대한 말씀이다.
아무리 선지자지만 상식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여기 하나님의 사람의 고민이 있다.
여기 말씀 사역자의 고통이 있다.

-호세아가 어디 모자라서 이런 아내를 얻으라 했을까?
호세아가 그런 여자를 품어줄 수 있는 넒은 마음의 소유자여서 그랬을까?
참으로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명령이다.

-당시 호세아의 이상한 결혼은 이스라엘 내에서 큰 화제 거리였을 것이다.
호세아의 설교를 그렇게 싫어하던 사람들도, 그의 결혼에 대해서는 입방아를 찧었을 것이다.
호세아의 이상한 결혼은 호세아 개인의 일이 아니었다.
사실은 자신들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걸 알지 못했다.

-우리는 호세아의 이런 결혼을 보고 의문이 생긴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종을 그렇게 대하실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이건 우리에게 대단한 십자가로 다가오는 말씀이다.

-교회 안의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먼저 말씀을 받은 우리가 나만 행복할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한 배를 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아픔이 교우들의 아픔으로 느껴져야 하고, 교우들의 고통이 목회자의 고통으로 느껴질 때, 우리는 비로소 한 교인이다.
같은 교회에 다닌다고 한 교인이 아니다.

-호세아의 아내를 음란한 여자라고 부른 것은, 직업적인 창녀는 아니지만, 그가 결혼하기 전에도 음란한 생활을 했었고, 결혼한 후에도 계속 음란한 생활을 청산하지 못해서다.
여기서 “음란”이란 단어는, 마음의 상태만을 나타내지 않는다.
구체적인 행위까지 나타내는 말이다.
딴 남자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남편 아닌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이런 일을 시키신 이유가 무엇인가?“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리켜 보통은 “내 나라”, “내 백성”이라고 부르신다.
그런데 분명히 “이 나라”라고 하신다.
“이 나라”와 “내 나라”는 어감이 다르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포기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내 나라”가 아니다 절교 선언을 하기 전에, 그들 스스로 “이 나라”로 살겠다고 관계단절을 한 셈이다.

-여기서 음란하다는 말을 살펴보는 게 좋겠다.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영적으로 음란한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과 결혼하는 것과 같다.
신약성서에서 실제로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우리를 신부로 비유한 바 있다.
한번 결혼하면, 자기 남자가 조금 능력이 없어도, 다른 남자를 쳐다보지 않아야 한다.
또한 자기 여자가 예쁘지 않아도, ‘미스 김’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이 원리는 하나님께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기웃거리며 관심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여호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바알 하나님을 찾고 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나의 모든 것 되신 주님 찬양해

-우리가 찬양은 그렇게 한다.
하지만 우리의 속마음까지도 진짜 그런가?
또 다른 하나님을 찾은 그들과 우리는 전혀 상관없는가?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살기를 바란다.

-둘째로 실제로 음란한 것이다.
바알 신을 섬기는 가나안 종교 자체가 굉장히 음란했다.
가나안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비가 오는 것이다.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는 헛것이 되고 만다.
그런데 일 년에 두 번 비를 내리는 신이 바알이었다.
바알은 지하의 신과 싸우다가 죽었다.
그래서 바알의 여동생이 죽은 바알을 살려내는데, 1년에 한 번밖에 못 살려낸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때 많은 성행위를 통해 바알에게 힘을 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바알의 종교제사는 완전히 섹스파티였다.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참한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다가갔다.
그러다가 차츰 차츰 그들과 하나가 되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종교문화에 쏙 빠지고 말았다.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종교가 제구실을 못하면 사회가 대책이 안 설만큼 썩게 되는 법이다.

-오늘 우리 사회가 그렇다.
음란이 사회 구석구석 파고들었다.
음란은 사람의 정신세계를 피폐하게 만든다.
다시는 일어서기 어렵게 만든다.
요즘 미투 운동이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다.
하지만 아직 덜 터졌다.
머잖아 봇물이 아닌 댐이 터질지 모른다.
그동안 한계 수준이었는데, 드디어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동안 대중에게 사랑을 받던 사람들이 나자빠지니 충격이 크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종교에 호기심을 갖는 정도가 아니다.
바알 종교에 유혹을 느끼고 있는 정도가 아니다.
그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이미 넘어 버렸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음란한 아내로 비유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음란한 자식으로 칭하셨다.
그리고는 “이것이 어떻게 내 나라이고 내 백성이냐? 호세아를 보아라. 이 여자를 호세아의 아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자식을 호세아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느냐” 반문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중단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그들은 버젓이 하나님께 제사는 드렸다.
수많은 어린 양들이 죽어갔다.
그 피가 제단 뿔에 발라졌으며 성소에 뿌려졌다.
그리고는 또 산당으로 옮겨가서는 “내 사랑 바알이여”를 소리높이 외쳤다.
“바알, 당신이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고백했다.

-이게 가능하다는 게 신기하다.
사실 우리의 마음은 중립적이지 않다.
좋아하지 않으면 싫어한다.
어느 걸 사랑하면 다른 것은 덜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다.
하나님은 결코 50% 사랑을 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100%로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1:3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어떻게 순종했는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순종했다.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했다는 것은, 단순히 고멜을 집에 데려다 놓았다는 것이 아니다.
호세아는 값을 치르고 정당한 결혼절차를 밟아 결혼한 것이다.
그런데도 고멜의 음란한 습관은 없어지지 않았다.
제 버릇 개 주겠는가?
고멜은 결혼한 후에도, 여전히 음란한 짓을 멈추지 않았다.
세 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다 호세아의 자녀가 아니었다.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하나님께서 고멜이 자식을 낳을 때마다, 이상한 이름을 주셨다. 1:4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첫 아들을 낳았지만 사실 기쁠 수 없었다.
남의 자식을 바라보는 아빠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하루에도 피가 거꾸로 솟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첫 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로 지었다.
이스르엘은 역사적으로 아주 피비린내나는 살육이 있었던 곳이다.
여러보암의 조상인 예후는 아합의 가족 70여명을 이곳에서 몰살시켰다.
이스르엘은 아합 왕가의 멸망을 상징하는 곳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아이를 통해서 예후 왕가도 아합 왕가처럼 완전히 끝나리라는 것을 예고하셨다.
예후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아합 왕가를 심판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자신의 왕가를 지키지 못해서, 결국 아합 왕가의 전철을 밟고 만다.

-한 번 하나님께 사용되었다고 해서, 면책특권이 생기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한 번 쓰임 받은 것은 쓰임 받은 것이고, 자기 자신은 하나님 뜻대로 바로 살아야 함을 말해준다.
한 때 하나님께 쓰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버림받았던 사람이 한 둘인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부강하게 된 줄 몰랐다.
자기들이 잘나고 잘해서 그렇게 된 줄 점점 교만해졌다.
어디까지 교만해질지 모른다.
얼마만큼 교만해질지 모른다.

-보다보다 못한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심판을 선언하실 수밖에 없었다. 1:5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활을 꺾는다는 것은 힘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궁수에게 활은 생명과 같다.
활이 꺾이는 것은 모든 걸 잃는 것이다.
형통함이 종결될 것이라는 무서운 말이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철저히 외면하시겠다는 말이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추락하는 것만 남았다.

-우리는 잘 될 때 겸손해야 한다.
형통할수록 깨어 근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렇다고 일부러 넘어질 준비할 필요는 없다.

-주신 복을 감사함으로 받자.
형통할 때 겸손히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자.

-첫째 아들을 낳고, 그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서도, 고멜의 부정한 행실은 고쳐지지 않았다. 1:6 고멜이 또 임신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둘째를 낳았는데 이번에는 딸이었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의 이름을 “로루하마”로 짓게 하셨다.
“루하마”가 ‘긍휼히 여기다’는 뜻인데, 앞에 “로”를 붙여 “로루하마”는 ‘긍휼이 없다’, ‘긍휼을 베풀지 않겠다’, ‘은혜와 상관없게 하겠다’는 뜻이 되었다.
이건 너무나 심각한 이야기다.
그 어떤 징계보다 무섭다.

-하나님은 매를 때려도 긍휼을 잃지 않으시는 분이다.
그런데 아예 긍휼을 베풀지 않겠다고 하신다.

-만약 하나님께서 긍휼을 거두어 가시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만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비참 그 자체일 것이다.

-우리가 조금 어려워도, 하나님의 긍휼이 있는 한 살아갈 수 있다.
좀 힘들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 있으면 참고 버틸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로루하마”란 말을 들으면, 우리는 끝이다.
어떤 기대도 할 수 없다.
이 지경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 “로루하마”란 선고를 받기 전에,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있다.
바로 말씀이다.
예배 때 내 귀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면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실 때 먼저 말씀을 거두신다.
어느 순간부터 말씀이 들리지 않고, 말씀이 따분하게 느껴져 졸리고, 말씀이 나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내 신앙에 적색 경고등이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에게 물질이 있고, 명예가 있고, 건강이 있어도, 말씀이 없으면 “로루하마”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자기 취향에 맞는 설교를 듣고 싶어 한다.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고, 격려가 되는 설교를 듣기 원한다.
신경 안 쓰고, 부담스럽지 않는 상태로, 한 20분 정도 맘 편히 듣는 설교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듣는 것이 아니다.
영혼이 긴장하면서 들어야 한다.
내면의 위기를 느끼면서 들어야 한다.
내 삶의 방식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며 들어야 한다.
내 습관들을 더 이상 지속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하며 들어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마음을 찢는 예배가 사라졌다.
예배 때 눈물을 훔치는 것이 낯선 광경이 되고 말았다.
그런 영적 경험들이 아득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음을 찢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
그게 진정한 부흥이다.

-매일 하나님께로 은혜 받고 있다면 감사하라.
매시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자.
매주일 하나님이 설교자를 통해서 말씀을 주실 때 경청하자.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가 있었다.
말라기 때부터 세례요한 때까지는 무려 400년이었다.
우리에게라고 그렇게 못하실 리 없다.
하늘의 긍휼의 문이 닫힐 때가 있었다.
우리에게라고 닫지 못할 거란 법이 없다.

-하나님의 긍휼을 순간순간 사모하기 바란다.
말씀으로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기 바란다.

-호세아의 아내는 회개와 무관한 사람이었다. 1:8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그는 부지런하여 열심을 품고 음행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이번에도 딸을 낳은 것이다.
부지런하다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이 여자는 쓸데없는 일, 죄 짓는 일에 부지런했다.
뭐가 그리도 부지런하게 죄를 지었는지 모른다.

-당연히 좋은 말 못 듣는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제부터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고 선언하셨다.
“암미”는 ‘백성’이란 뜻이고, “로”가 그 앞에 붙어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이, 서로 남남이 된다는 뜻이다.
이제는 모든 언약관계를 청산하고,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쫓아내겠다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무단으로 하나님의 땅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선언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무조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들려온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암미”는, “아브라함의 자손”과 함께, 어떤 보증과 같았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다.
그들에게 수많은 은혜를 베풀어오셨다.
그것은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닌, 그들이 “암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로암미”이다.
하나님이 너희는 더 이상 내 백성이 아니다고, 단절을 선언하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런 식으로 버리실 수 있느냐 하는 고민이 든다.
우리 중에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는 사람이 있는가?
우리는 종류만 달랐지, 다 고멜처럼 이러저런 정욕에 붙들려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다 버린다면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신 것은, 단지 그들에게 정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실 때, 그들이 부정한 자인 줄 모르셨을 리가 없다.
그들이 고멜 같은 자인 줄 아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은, 그들의 음란함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교만함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나친 자기 확신을 갖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설마 이 백성들을 버리시겠어 라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자기들을 위하여 투자한 것이 얼마인데, 그렇게 싶게 버리실까 안심했다.
이게 그릇된 확신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면, 이 일은 충분히 반복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물론 하나님이 까닭 없이 버리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하다고 해서 버리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멜같은 성향이 있다고 해서 버리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나는 당연히 은혜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는, 그런 교만한 사람을 버리신다.
나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자신하는, 그런 오만한 사람을 버리신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임을 기억하며 살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겸손함을 잃지 말자.

-그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실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을 살펴봤다. 1:7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10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우리는 말씀을 통해, 사랑의 하나님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두 절이 똑같은 단어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이다.
심판을 말씀했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버렸으나 “그러나”, 내가 로루하마라 했으나 “그러나”, 로암미라 했으나 “그러나” 이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호세아서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고 넓은지를 말해준다.1:11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이스라엘과 유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이 허물어지고, 온 인류가 하나님께 나아오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에 대한 구원계획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뭐라고 부르기를 원하시는가? 2:1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으며, 천국의 순례길을 걸으며, 크고 작은 고난 앞에 지치고 힘들 때, 이렇게 서로 격려하기 원하신다. “형제님은 암미입니다.”“자매님은 루하마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