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80(끝):우리에게는 마지막 순간까지 할 일이 있습니다.(마 28:16-20)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03-11 00:00
조회
769
마태복음 강해 80우리에게는 마지막 순간까지 할 일이 있습니다.(마 28:16-20)2018. 3. 11. 프롤로그

-오늘이 마태복음 마지막 설교이다.
2016년 4월 첫주부터 시작했으니까, 거의 2년이 걸렸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말씀을 한결 같이 경청해준 여러분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늘 그래왔듯이 말씀을 변함없이 사랑하기 바란다.
아울러 설교자를 위해 늘 기도에 힘써주기 바란다.

-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인가?“우리에게는 마지막 순간까지 할 일이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할 일을 다른 말로 사명이라고 한다.

-실존주의 철학자로 잘 알려진 키에르 케고르 목사님이 코펜하겐 대학의 신학생 시절, 그가 22세 되던 때에 일기에 이렇게 썼다.
“온 천하가 다 무너지더라도, 내가 이것만은 꽉 붙들고 놓을 수가 없다. 내가 이것을 위해 살고 이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나의 사명을 발견해야 한다.”

-철학자 칼 히티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자기의 역사적 사명을 깨닫는 순간이다.”

-1950년대 세계 선교의 영웅 짐 엘리어트가 정글에서 피를 흘린 후 발견된 그의 일기장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일, 그것을 위하여, 결국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그것들을 버리는 사람, 그는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고백했다.
“주님, 오래 살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을 위해서 내 삶이 불타기를 원합니다.”

-살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사명이 있다.
내 생명이 연장되고 있는 것은, 아직 내 사명이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가 사명이 끝나면 죽는 것이다.

-오래 전 미국의 햄크스라는 사람은, 젊은 시절 광산에서 일하다가 크게 부상을 당했다.
두 눈이 멀게 되고, 두 손이 떨어져나가 심한 장애를 갖게 된 그는, 매우 절망하여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살을 계획하고 실행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예일 대학의 유명한 교수가 설교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 자리에 가게 되었다.
그때 그 교수는 청중들에게 이렇게 설교했다.
“사람마다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다.”

-모임이 끝나고 햄크스는 그 교수를 만났고, 다짜고짜 물었다.
“나 같이 눈도 없고 손도 없는 인간에게 무슨 사명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한 동안 말없이 그를 쳐다보던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아직 입과 귀와 발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눈과 손이 없더라도 나머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집에 돌아온 햄크스는 이 한 마디로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는 돌아오자마자 곧 하나님을 믿고 회개하고는, 자신에게 눈과 손만 거둬가고 입과 귀와 발을 남겨주신 것에 대한 감사기도를 올렸다.
그 후 그는 스텐포드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미국의 유명한 강연자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사명(使命)은 한 자로 심부름 ‘사(使)’자에 목숨 ‘명(命)’자를 쓴다.
그러니까 사명이란 ‘심부름하는 목숨’이라는 뜻이다.
무슨 심부름을 하는가?
하나님의 심부름이다.

-사람은 사명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명은 생명보다 귀한 것이다.
인간은 절대로 무의미하게 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존재가 아니다.
되는대로 막 살아도 되는 그런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사명을 위해 살아야 하는 존재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워싱턴 시를 지나다가, 한 흑인 청소부가 욕설을 퍼붓고 짜증을 부리며 청소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왠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곁에 다가가 말을 했다.
“여보게, 자네는 하나님이 자네에게 맡기신 지구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없는가?”
그리고는 그 젊은 청소부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청소를 할 때, 베토벤이 음악을 작곡하듯이, 미켈란젤로가 조각을 하듯이, 괴테가 작품을 쓰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게나.”

-청소부가 자기가 하는 일을 하나님의 일로 여긴다면, 그게 사명이 아니고 뭐겠는가?

-석공 세 사람이 성당을 짓기 위해, 뜨거운 태양 아래서 열심히 돌을 쪼고 있었다.
하는 일은 같았지만, 세 사람의 얼굴 표정이 제각각이었다.
첫 번째 석공은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고, 입에서는 한숨이 새나왔다.
두 번째 석공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세 번째 석공의 얼굴에는 활력과 생기가 넘쳤다.

-지나가던 사람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들에게 이유를 물었다.

-첫 번째 석공이 투덜대며 대답했다.
“나는 죽지 못해 이 일을 합니다. 이렇게 뼈 빠지게 일해도 나에게 돌아오는 몫은 형편없거든요. 그저 목구멍이 원수입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두 번째 석공이 말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 있나요? 저는 그저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일합니다. 그냥 시키는 일만 탈 없이 하면 먹고 살 수 있으니까요.”

-세 번째 석공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이 일이 참 좋습니다. 내가 정성을 다해 돌을 쪼면 언젠가 아름다운 성당이 세워질 겁니다. 얼마나 기쁘고 보람된 일입니까?”

-세 번째 석공은 다른 두 사람과는 달리, 사명으로 일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일을 사명으로 여기는 사람은, 일을 통해 행복과 축복을 동시에 누릴 수 있다.

-사명자에게는 은퇴도 없다.
직분은 은퇴가 있어도, 사명엔 은퇴가 있을 수 없다.
죽는 날이 사명 은퇴하는 날이다.

-구세군의 창설자 윌리엄 부스 대장이 은퇴하던 날. 4천 명이 넘는 런던 시민이 그의 은퇴식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당시 그의 시력은 사물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약화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면서 강단에 올라선, 그는 약한 시력으로 말없이 군중을 바라보았다.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

-측근이 염려하는 어조로 묻자, 윌리엄 부스는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며 말했다.
"아직도 저 군중 너머에서 내가 할 일이 있어.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이 많거든. 이제부터 일할 때야!“ “이제부터 일할 때야!!”

-이게 진정한 사명자다.
죽기 전까지는 자신을 사명자로 여겨야 한다.-------------------------------------------------------

-안식일이 지나자말자, 여인들이 무덤을 찾았었다.
급하게 장례를 치르느라 예수님의 몸에 향품을 바르지 못하고, 세마포에 싸서 돌무덤에 안치했기 때문이다.
여인들도 겁도 없다.
무덤을 찾은 시간이 새벽이었다.
더구나 경비병들이 무덤 보초를 서고 있다.
거기다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큰 돌이 있다.
여인들은 아무 대책도 없이 무덤을 찾아간 것이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무덤을 미리 봐두었기에 찾는데 어려움이 없었지만,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게 아닌가.
막혀 있어야 할 무덤문이, 활짝 열려있는 게 아닌가.
무덤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은 너무나 놀라서 죽은 자 같았다.
여인들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무덤을 막는데 썼던 돌 위에 앉아있던 천사가 말했다.
이미 예수님은 부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인들을 데리고 무덤에 들어가,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을 보여주었다.

-여인들은 지금 두 눈을 뜨고 역사의 현장을 보고 있다.
꿈이 아닌 분명히 생시다.
그런데도 확신이 안 섰다.

-천사는 어정쩡한 모습을 한 여인들을 향해 재촉했다.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말이었다.

-여인들은 기쁨 반 무서움 반, 제자들에게로 달려갔다.
한참을 달려가다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 여인들을 만나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첫 인사를 건넸다.
“평안하냐”
여인들은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

-그런 여인들을 향해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역시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말이었다.

-여인들이 증언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
“내 형제들” 곧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그들은 한 데 모여 있었다.막 16: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그들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
절망의 기운에 겹겹이 둘러싸여, 간간히 흐느끼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러던 중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여인들을 통해 전해졌다.
그럼 환호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럼 기쁨의 탄성을 질러대며 흥분해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그들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막 16: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당연히 믿어지지 않아서였다.
아니 믿을 수 있는 말을 해야지,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면서 믿으라고 하면 믿어지겠는가?
이게 부활의 증인 앞에서 제자들이 보인 첫 번째 반응이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3년을 따라다니며 말씀을 듣고 배웠던 그들이다.
그럼에도 부활의 신비는 믿어지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예수님이 부활했다는데도 믿지를 못했다.

-우리가 예수를 전할 때, 쉽게 믿는 게 이상한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며 사랑의 수고를 하며 복음을 전하는 거고, 믿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
그 때는 내가 생각하는 때보다 길어질 수 있다.
눈물병이 꽉 채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특히 가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교우들 힘내기 바란다.
가족 구원은 우리의 사명이다.
그건 우리의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절대 사명이다.

-처음 여인들의 말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믿지 않았지만, 여인들이 워낙 확신 있게 말하자 제자들이 움직였다.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갔다.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가 다 갈릴리로 간 것이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했을 때, 제자들이 불신의 반응을 보인 것을 보고 실망하여 포기했다면, 어떻게 될 뻔 했겠는가?
당신들은 제자될 자격도 없다며 돌아서 나와 버렸다면, 과연 어떻게 될 뻔 했겠는가?

-부활의 증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부활의 증인은 상대가 한 번 듣고 믿지 않는다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몇 번이고 말한다.
몇 번이고 전한다.
그게 사명이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후, 동네에 뛰어 들어갔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 여인은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예수님을 만난 후, 동네에 들어가 예수 증인이 되었다. 요 4: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신기한 것은, 동네 사람들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다.
첫마디에 믿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귀가 얇은 사람은 “어, 진짜?” “오, 대단한데!” 하며 호기심을 보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이, 그럴 리가 있나.” “하하, 어쩌다 맞췄겠지” 하며 시큰둥했다.
그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증언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부활의 증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것을 사명으로 아는 사람은, 좔?포기할 줄 모른다.
포기하기 전에는 끝난 것이 아니다.
포기하기 전에는 내가 진 것이 아니다.
사명에 포기란 없다.
사명은 생명을 다해서라도 완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확신하는 여인들의 말을 듣고 제자들은 갈릴리로 갔다.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생각해 보니, 며칠 전에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말씀을, 얼핏 하신 게 기억났다.마 26: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이 100% 믿기지 않았지만, 여인들의 말을 들었다.
그 결과 부활의 주님을 뵐 수 있었다.
그들에게 엄청난 인생의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도, 여자 말 들어서 손해 보는 경우가 드물다는 또 하나의 예다.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따르던, 그들에게 주님의 죽음은 모든 게 끝난 것이다.
자신들의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주님이 부활하신 것이다.
주님께는 당연한 부활이다.
자신이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말씀을 믿지 않았기에 뜻밖의 부활이다.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뵌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경배했다.
그 상황에서 경배가 안 나오겠는가?
그러나 다는 아니었다.
제자들 다라고 해도 몇 명이나 되는가?
고작 11명 아닌가?
그중에는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부활하신 주님을 뻔히 두 눈으로 보면서도, 심지어 그 앞에 경배하면서도, 100% 확신하지 못했다.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이게 사람이다.
성육신이 믿어지고, 십자가가 믿어지고, 부활이 믿어지고, 재림이 믿어지는 것이 기적이다.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것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보지도 않고 믿기 때문이다.
단순히 마음으로 믿는 것을 넘어,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고 따르고 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볼 게 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 중에는,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후 믿었고,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 부활의 증인으로 살았다.
자신들의 마지막 호흡하는 순간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힘썼다.
요한을 제외한 열 제자는,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잠시 영광을 누리는 것보다, 하늘의 영광을 위해 이 땅에서 기꺼이 고난의 길을 걸었다.
이 땅의 유한한 가치를 위해 살지 않고, 저 하늘의 영원한 가치를 위해 살았다.
그래서 자신들의 믿음이 진짜였음을 증명했다.

-반면에 우리는 어떤가?
우리의 믿음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믿음이란 모험이다.
믿음이란 자신을 던지는 것이다.
믿음이란 자기 인생을 거는 것이다.
믿음이란 자기 인생의 전부를 거는 것이다.

-믿음은 결코 악세사리가 아니다.
믿음은 나를 꾸며주는 악세사리가 아니다.
믿음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악세사리가 아니다.
믿음은 내 전부다.
믿음은 내 삶의 전부이다.

-그렇게 믿는 사람이 부활의 증인이다.
그런 사람은 이 땅에서 잠시 받는 고난을, 하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며 오히려 기뻐한다.
복음 전하는 것 외에는, 다른 소망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가치를 위해서 살아간다.
즉 사명을 위해 살아간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약 40일을 지내셨다.
그리고 하늘에 오르시기 전, 유훈과 같은 말씀을 주셨다.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고 선언하셨다.
아버지께로부터 받았다는 뜻으로 볼 수 있지만, 본래부터 그 권세를 가지신 분이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사역하셨다.
그 권세로,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하는 무리들에게 말씀 사역을 하셨고, 각색 병든 자들을 위한 치유 사역을 하셨고, 더러운 귀신 들린 자들을 위한 축사 사역을 하셨고,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그 권세로 기도하셨고, 그 권세로 제자들을 양육 훈련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세를 보고 놀랐다.
지금 보니 그 권세들은 보통 사람에게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에게만 있는 것이었다.
메시야에게만 있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 권세로 제자들에게 분부하셨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한 마디로 “가라”는 것이다.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가서...”라고 한다.

-사도행전에 보면, 가기 전에 먼저 머물라고 했다. 행 1: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일단 한 번 가보라”는 뜻이 아니었다.
제자들은 권세를 받은 그 후에 가야 했다.
예루살렘에서 떠나는 것이 먼저가 아니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 곧 성령을 받는 게 먼저였다.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증인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구원의 믿음만으로는 안 된다.
구원의 믿음에 성령 충만이 더해져야 한다.
그래야 폭발할 수 있다.
그래야 마지막 순간까지 부활의 증인으로 살 수 있다.

-우리가 가서 할 일이 무엇인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일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제자로 삼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제자가 되어야 한다.
내가 먼저 제자가 되지 않고서는, 결코 다른 사람을 제자로 삼을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제자로 삼게 해달라고 기도하되, 자신이 제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주여, 내가 먼저 신실한 제자가 되게 하소서.”“주여, 나에게 충성된 제자를 붙여 주소서.”

-우리는 자신을 제자 삼는 제자로 이해해야 한다. “나는 제자 삼는 제자입니다.”

-제자로 삼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먼저 세례 주는 일이다.
복음을 전하여 믿기로 결단하면, 첫 번째로 하는 일이 세례를 주는 일이다.
세례는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다.
어제의 나는 죽고 오늘부터 예수를 위해 사는 것이다.
세례는 내 인생에 주인이 바뀌는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우리 신앙의 진정한 출발은 세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교회에서 새가족 관리는, 적어도 세례 받을 때까지는 해야 한다.
교회로 인도하여 등록했다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그가 새가족 교육 받았다고 마음 놓아서도 안 된다.
세례를 받게 해야 한다.
세례를 받도록 안내하고 도와야 한다.

-가톨릭에서는 세례를 받으면, 새로운 이름이 주어진다.
그걸 세례명이라고 한다.
꽤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세례가 신앙의 마침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양육해야 한다는 말이다.
말씀으로 양육하고 훈련해야 한다는 말이다.
“가르쳐”의 원어 ‘디다스콘테스’가 현재 분사형이다.
가르침에 있어 지속성을 강조한 말이다.
언제까지 가르쳐야 하는가?
지킬 때까지이다.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말이다.

-말씀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바울은 지식의 위험성을 이렇게 지적했다.고전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 8: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사랑이 없는 지식은 자칫 교만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믿음이 약한 자를 망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것이다.
말씀을 지켜보면 겸손해진다.
말씀 앞에 직면하고도 교만하다면 뭐가 잘못 됐다.
실제로는 말씀을 대면한 게 아니었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은, 말씀을 가르칠 수 있도록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몇 번 배웠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수료증이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다른 사람을 지키도록 가르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이 제자 삼는 것이다.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