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79: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마 28:1-15)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03-04 00:00
조회
903
마태복음 강해 79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마 28:1-15)2018. 3. 4. 프롤로그

-영국의 시인 테니슨은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아름다운 언어로 노래한 시인이었다.
어느 날 그는 시골길을 가다가 행복한 얼굴로 열심히 일하는 중년 부인을 보았다.
“오늘 아침에 좋은 소식이 있나 보죠?”

-테니슨이 묻자 부인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선생님, 저는 한 가지 소식밖에 모른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테니슨도 말했다.
“부인, 그것은 오래된 소식이자 새로운 소식이며 정말 좋은 소식이군요”

-맞다. 예수님의 부활은 오래된 소식이자 새로운 소식이며 정말 좋은 소식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당신도 나도 부활합니다.”

-언제나 즐거움과 기쁨으로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꽃을 파는 할머니가 있었다.
어느 날 단골손님이 할머니에게 물어 보았다.
"언제나 즐거워하시는 것을 보니 할머니는 걱정 근심이 전혀 없는가봐요?"
"천만에요. 걱정 근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내게도 고통스러운 일, 짜증나는 걱정거리가 생긴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도 매일 즐겁게 사실 수가 있어요? "
"나는 ‘3일의 비밀’을 가지고 산답니다.

-"네...‘3일의 비밀’이라니요? 그게 무엇입니까?"
"‘3일의 비밀’이란,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그 문제를 해결하시도록 맡겨버리고 조용히 3일을 기다리는 것이라오. 예수님이 무덤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그 문제가 해결되는 데는 3일이면 족하다오. 때론 숫자대로 3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주님의 부활 원리는 늘 동일하답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어떤 암흑 같은 고난이 와도 3일 후면 언제나 광명이 찾아온다는 것을 믿기에 즐겁게 산답니다." 그렇다. 부활의 신비는 3일의 비밀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3일째에 부활하실 줄 누가 알았겠는가?
누가 짐작이라도 했겠는가?
그러니 3일의 비밀이요 신비다.
3일의 비밀의 핵심은 3일을 버티는 것이다.
기도로 3일을 버티는 것이다.
믿음으로 3일 후를 바라보는 것이다. “당신도 3일의 비밀을 아시죠?”

-3일이면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
3일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인류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작심삼일은 굉장할 수 있다.
작심삼일을 연결하기만 하면 된다.
작심삼일이 끝나자말자 다시 작심삼일을 시작하면 된다.
우리가 작심삼일 했기 때문에 안 변한 것이 아니라 작심삼일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 변했고 작심삼일을 계속 이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안 변했다.

-어쩌면 우리는 하루하루 산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인생이다.
나는 새벽기도회 때 오늘 하루 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물론 미래를 위해서 기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 잘 살게 해달라는 기도에 더 무게가 실린다.
오늘을 살아야 내일이 오고, 현재를 잘 살아야 미래를 잘 살 수 있어서다.

-인도 수상 네루는 이런 말을 했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인도의 종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짓고 늪지를 메우고 댐을 건설하도록 자극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교회가 칭송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세계 도처에서 인간의 짐을 덜어 주려고 노력해 왔다. 교회가 인간을 자극하고 이끌었던 힘의 근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오늘을 사는 능력이, 예수님의 부활에서 나온다.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곤 한다.
또한 교회가 광야 한 가운데 던져질 때가 있다.
그 때 우리가 살아갈 힘이, 교회가 버텨낼 힘이, 예수님의 부활에서 나온다.-------------------------------------------------------

-공회의원인 아리마대 요셉의 도움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본래 그도 예수님의 제자였다.
하지만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르지는 못했었다.
아마 자기 신분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보다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요 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유대인이 두려워서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 됨을 숨겼다고 했다.
당시 공회의원은 오늘날의 국회의원보다 권한이 막강했다.
그것들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만약 그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누가 알았다면 “예수 믿으려면 좀 제대로 믿지” 라고 지적했을 수 있다.
예수님이 공회에서 재판을 받을 때도 요셉은 드러나게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자신은 결의에 찬성하지 않았지만, 가부를 결정하는데 영향이 미미했다.
그렇게 예수님은 공회에서 사형이 결정했고, 빌라도에게 넘겨져 최종 확정 판결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했다.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자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유대식이 달랐고, 로마식이 달랐다.
유대식으로는 안식일 이전에 시신을 거둬서 장례를 치러야 했고, 로마식으로는 시신을 십자가에 그대로 둬서 새의 먹이가 되게 했다.
빌라도가 사형 판결을 내렸으니, 시신 처리에 대해서도, 빌라도가 주관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유족이나 제자들 중에 빌라도를 찾아갈 만한 사람이 없다.
안타까워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물론 기도했을 것이다.
그 응답으로 아리마대 요셉이 왔다.
사실은 자기도 예수님의 제자라면서 자신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해보겠다며 대신에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하는 공회의원 요셉의 부탁을 들어줬다.
또 다른 문제는 장례를 치를 무덤이 없었다.
그 무덤도 요셉 자신의 것을 내주었다.
그래서 무사히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역사에 가정이 존재할 수 없지만, 만약에 아리마대 요셉이 없었다면, 어떻게 될 뻔했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이 든다.
그는 비록 예수님 생전에 제자 노릇을 못했지만, 죽으신 후에 확실하게 했다.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그였기에 해낼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다려줄 필요가 있다.
그가 진짜 예수님의 제자라면 언젠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아리마대 요셉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긴 했지만, 장례 시간이 급박했다.
곧 안식일이 시작되기에, 서둘러 장례를 치러야만 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도 바르지 못하고, 세마포에 싸서 급히 돌무덤에 안치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무덤 곁을 쉬 떠날 수 없었다.
자신들은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예수님이 그렇게 죽으실 때 아무런 도움이 돼드리지 못했다.
그저 바라만 봐야 했고, 애꿎은 가슴만 쳐야 했다.
그렇게 예수님은 죽으셨고 차가운 바위 무덤에 둬야 했다.
그러니 발길이 떨어지겠는가?

-그렇다고 그곳에 계속 머물 수는 없다.
바로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또한 경비병들이 무덤을 지키기 위해 오기 때문이다.
두 마리아는 한참을 흐느끼다가 무덤을 떠났다.
어떻게 안식일을 보냈는지 모른다.
예수님 생각에 안식일이 빨리 지나가기만 바랐다.

-드디어 안식일이 다 지나갔다.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안식일이 지나고 날이 새기만 기다렸다.
날이 환히 밝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두 마리아는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했다.
더구나 예수님의 무덤은 지금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다.
그렇다면 무척 위험한 일이다.
자칫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들이 그렇게 한 것은 오직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오직 사랑에 매여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무덤으로 달려갔다.

-고형원은 이렇게 고백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내 영 기뻐 찬양합니다
이소망의 언덕 기쁨의 땅에서
주께 사랑 드립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나는 말할 수 없네
내 영혼 즐거이 주 따르렵니다
주께 내 삶 드립니다

-우리가 주의 사랑에 매여야 주께 내 삶 드릴 수 있다.
우리가 오직 주의 사랑에 매일 때 끝까지 주를 따를 수 있다.

-안식 후 첫날은 오늘날 주일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주의 날로 지킨다.
그러므로 매 주일은 작은 부활절인 셈이다.
그래서 주일예배는 환희와 축제가 되어야 한다.
산적한 문제가 있고, 당면한 과제가 있고, 둘러싼 난제가 있다고 해도, 주일예배는 축제여야 한다.
부활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주일에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주일에 예수 부활의 능력을 덧입어야 한다.
그래야 한 주간 승리할 수 있다.

-주일이 날로서 의미가 있다면, 새벽은 시간으로서 의미가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시간이 새벽이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무덤은 생명의 주님을 이길 수 없다.

-새벽은 잠자다 일어나는 시간이다.
부활의 시간인 것이다.
새벽은 하나님이 돕는 시간이다. 시 46:5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부활의 시간인 것이다.

-하나님이 선물로 허락하신 하루를 시작하는 부활의 시간에 주의 전에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른다.
새벽기도는 목사로서 누리는 영적인 복 중에서도 최고의 복이다.
아무나 누릴 수 있는 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으며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무덤으로 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가는 것은 아니다.
그들 앞에 있는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고 있다.
갈만한 상황이어서 간 것이 아니고, 가야했기에 가는 것이었다.
특히 경비병들에게 붙들렸다가는 시체 도둑으로 몰릴 수 있다.
새벽은 정적의 시간이다.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는 시간대다.
그러니 무덤 가까이 이르러서는 더욱 조심스럽게 걸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 눈앞에서 엄청난 광경이 일어났다.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큰 지진이 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지진은 이제 친숙해졌다.
포항 경주가 대한민국 지진의 일번지가 되었다.
지진을 경험해보니 지진 공포가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전에는 성경을 볼 때 ‘야 지진이 일어났으면 대단했겠다’ ‘무덤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은 기절초풍 했겠다’ 남의 일로 여겼던 게 사실이다.
상당한 규모의 지진의 위력을 겪어본 지금은, 지진 소리만 들어도 실감이 난다.

-지진이 예수님이 부활 때만 난 것이 아니다.마 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님이 죽는 순간에도 지진이 났었다.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좀 특이한 것은 무덤들이 열리면서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난 것이다.
그걸 볼 때 자연적 지진과는 다른 지진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임재가 지진 현상으로 나타난 것 같다.

-하나님이 소리 없이 이슬처럼 임재하실 수도 있다.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임재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늘 그렇지는 않다.
얼마든지 지진 같은 강력한 힘으로 임재하실 수 있다.
특히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와 부활하실 때는 지진이 동반되는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다.
무덤문을 큰 돌로 막아놓았지만 천사의 손이 닿자 자동문처럼 돌문이 열렸다.
천사는 굴려진 돌 위에 앉아 있었다.

-그 천사의 모습은 광채가 났다.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마치 변화산에서 변모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마가복음에서는 흰 옷을 입은 청년으로, 누가복음에서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으로, 요한복음에서는 흰옷 입은 두 천사로 묘사했다.
천사가 천상의 존재이기에 보는 이의 각도에 따라 차이가 남을 알 수 있고 그건 별 다른 문제될 것도 없다.
어차피 천사가 주연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특히 그 천사가 그 빛나는 형상을 한 채 굴려진 돌 위에 앉아 있다.
그러니 얼마나 무섭겠는가?
너무나 무서우면 몸의 신경이 마비가 된다.
얼마나 떨리겠는가?
신경이 마비가 되어 꼼짝도 못하고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치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의식은 살아 있지만 몸은 말을 안 듣는 상태가 된 것이다.
경비병들이 꼭 가위눌린 것 같은 상황에 처해진 것이다.
천사가 자기들을 노려보니 자기들은 어떻게든 도망을 쳐야 하는데 몸이 꿈쩍도 안 한다.
천사가 공격이라도 하면 죽은 목숨이다.
무덤을 지키다가 이게 지금 무슨 꼴인가 싶었다.

-그런데 여자들이 나타났다.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이 여자들 역시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봤다.
천사가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굴려내는 것을 봤다.
경비병들이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 같이 된 것을 봤다.
당연히 이 여자들도 무서웠을 것이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를 생각으로 무덤을 찾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압도적 광경을 보게 되었고, 무서움이 임했다.

-그 때 천사가 여인들을 향해 말했다.“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여인들만은 아니다.
경비병들도 무서워하고 있다.
그런데도 천사는 경비병들은 패스하고 여인들만 안심시키고 있다.
천사들의 관심이 아니 하나님의 관심이 무덤을 지키는 경비들이 아닌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만 있음을 알려준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분이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관심을 보이시는 것은 아니다.
예수를 믿고 바라고 따르는 자들과, 예수를 부인하고 배척하고 거역하는 자들을 똑같이 대우하실 수 없다.
그걸 통해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다고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을 통해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셨다.

-천사는 여인들이 왜 무덤을 찾아왔는지를 알고 있었다.
어쩌면 여인들이 찾아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인들이 어떤 마음으로 무덤을 찾아오는지, 그 여인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안심시킨 후 바로 얘기를 해줬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죽은 예수, 장사된 예수라고 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라고 했다.
훨씬 실감난 표현이다.
여인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자기들을 향해 말하는 천사를 처음 만났다.
그 천사가 자기들을 꿰뚫어 보고 있다.

-여인들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천사의 말을 경청했다.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천사가 예수님의 부활을 첫 번째로 증언한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도 천사를 통해 예고되었다. 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의 탄생과 예수님의 부활에 모두 천사의 알림이 있었다.
예수님의 탄생은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천사가 여인들에게 알려주었다.
천사가 최초로 전해준 목자나 여인들이 당시의 주류층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천사도 쓰시고 왕도 쓰시지만 낮고 천한 계층의 사람들도 쓰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들은 여인들은 부활의 증인이 된 것이다.
증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봤느냐는 것이다.“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을 봤다.
급하게 장사하느라 시신을 세마포에 싸서 뉘어두었던 자리가 비어 있다.
예수님의 몸은 없고 세마포만 놓여 있다.

-그들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럼 진짜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인가?’

-그 때 천사가 그 여인들을 재촉했다.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또 빨리 가서”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하는데 잠시도 지체해서 안 된다는 것이다.
보면 좀 있다가 전해도 되는 소식이 있다.
자기 혼자만 알다가 뜸 잔뜩 들인 후에 전해도 되는 소식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소식이 있다.
그렇게 했다가는 자칫 혼날 수 있는 소식이 있다.
예수님의 부활,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예수님의 죽음에 비통해하는 자들에게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예수님의 죽음으로 절망적인 삶에 빠져있는 자들에게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시신이 없는 무덤에 더 이상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래서 천사가 여인들을 빨리 가라고 재촉한 것이다.

-천사가 여인들 더러 누구에게 가라고 했는가?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르라고 했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은 그 어떤 이들보다 제자들에게 복음이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은 누구보다 제자들이 듣고 싶어 할 말이다.
예수님의 죽음에 가장 좌절하고 절망했던 이들이 제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전 인생을 걸었었다.
자신의 생업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라다녔다.
그런데 예수님이 갑작스럽게 그것도 십자가에서 죽고 말았다.
그랬으니 그들은 맨붕 상태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보고 계셨다.
그들이 좌절한 모습을 보고 계셨다.
그들이 절망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한 시라도 빨리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리게 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쭉 늘어뜨리며 맥없이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리며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책무를 다하며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해야 할 사명은 여인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먼저 접한 우리에게 이 사명을 맡기셨다.
빨리 가서, 죄로 인해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라고 하신다.
우리는 이 엄숙한 명령에 답해야 한다.

-그 여자들은 천사의 재촉에 응답했다.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무서워 심장이 펄떡거렸다.
기뻐서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들은 빨리 무덤을 떠났다.
예수님이 없는 빈무덤에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어서였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한 달음에 내달렸다.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을 때 발걸음과 확연히 달랐다.
그때는 너무나 조심스러웠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
“큰 기쁨으로”였다.

-모르는 사람이 그 광경을 봤다면 딱 미친 여자들이다.
예수를 따르던 여자들이 갑작스런 예수의 죽음 앞에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이 어떻게 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면 어떤가?
그런 말을 들으면 또 어떤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고 달리는 이 여자들을 누구도 막아설 자가 없다.

-그런데 여인들은 달음질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예수님을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감격스런 만남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만남이다.
예수님의 첫 마디는 평안하냐는 안부였다.
여인들은 너무나 기뻐서 눈물을 글썽이며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

-여인들은 천사에게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해 들었다.
빈 무덤을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것도 모자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뵈었다.
이제 확실하게 부활의 증인이 된 것이다.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는 제자들에게 가는 것을 잊었다.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그러자 예수님이 여인들에게 말씀하셨다.“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천사는 “그의 제자들”이라고 했고, 예수님은 “내 형제들”이라고 호칭을 달리 하셨다.
자기 살겠다고 스승을 버리고 도망친 의리도 믿음도 없는 제자들을 향해서 “내 형제들”이라고 하셨다.
죽음을 앞두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이시다.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님의 제자 사랑은 변함이 없으셨다.
그 사랑이 제자들을 움직였다.
그 사랑에 감격하여 복음 전하는데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우리 역시 제자들과 똑같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 제자들이 받았던 사랑에 조금도 모자라지 않다.
그들은 그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불살랐다.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어떤가?
주님과 그의 몸된 교회를 어떻게 대하는가?

-마태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 기사를 실어 놓았다.
11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경비병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경비병들은 무서워 죽은 자 같이 되었다.
정신은 있되 몸이 움직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자신들이 본 충격적인 사실을 종교지도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성으로 들어간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은 돈으로 경비병들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가짜 뉴스를 가공하여 전하게 했다.
그 가짜 뉴스는 지금도 계속해서 퍼져 나가고 있다.
이 가짜 뉴스를 우리는 막을 방법이 없다.
단지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방법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