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78:무덤은 예수님을 가두지 못합니다.(마 27:57-66)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02-25 00:00
조회
914
마태복음 강해 78무덤은 예수님을 가두지 못합니다.(마 27:57-66)2018. 2. 25. 프롤로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어느 날,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이 유명한 경제학자인 베버리지를 불렀다.
“앞으로 영국은 국민의 건강과 복지를 책임지는 복지 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각하!”
“어떤 방법으로 영국을 복지 국가로 만들 것인지 연구해 주시오.”

-베버리지는 ‘사회 보험 및 관련 서비스에 관한 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복지 국가에 대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42년 ‘베버리지 보고서’를 발표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민의 건강과 복지에 대해 책임지는 국가’
베버리지는 보고서에 위와 같이 적으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국가가 도와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처칠은 이 보고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영국을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평등한 사회로 만들어 나갔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란 용어는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전 생애 중에 예측 가능한 사고는 국가가 최저한도의 사회보장책임을 진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아무리 선진국이라도, 아무리 세계에서 사회복지가 가장 잘된 북유럽 국가들도 국가가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다.
그럼 무덤 이후는?
무덤 이후는 어떻게 할 건가?
무덤 이후는 어떻게 할 수 없다.
무덤에 가두는 일까지만 할 수 있다.
무덤이 이생의 끝인 것은 맞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만 어느 정도 보장이 돼도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저생이 있다.
무덤 이후의 삶이 있다.
육체의 죽음 너머의 영원한 삶이 있다.

-공산주의가 왜 문제인가?
신을 부정해서이다.
그들은 유물론에 입각해 있다.

-유물론이라는 게 무엇인가?
유물론을 철학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풀이해놨다.
‘물질을 제1차적·근본적인 실재로 생각하고, 마음이나 정신을 부차적·파생적인 것으로 보는 철학설.’
유물론에서는 물질이 근본적인 것이다.
마음이나 정신은 부차적이고 파생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이 신을 인정할 까닭이 없다.

-작년(2017) 11월 14일 new1 Korea 인터넷 뉴스는 헤드라인을 이렇게 자극적으로 뽑았다.
“예수 믿을래, 시진핑 믿을래, 시진핑 믿으면 보조금”

-기사를 좀 인용해보겠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이 마오쩌둥(毛澤東)을 넘어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는 듯하다.
중국 공산당이 기독교도들에게 예수나 하느님 관련 시각물 대신 시진핑 주석의 초상화를 붙이면 생활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법으로 기독교를 탄압하고 있다고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보도했다.

-중국 공산당이 기독교도들의 집에 기독교 관련 시각물 대신 시 주석의 초상화를 걸면 생활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법으로 공산당이라는 종교(?)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위간현은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이자 기독교도들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이다.
위간현의 인구는 약 100만 명이고, 이중 11%가 평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약 10%가 기독교도다.

-위간현의 공산당원들은 극빈층을 방문, 집안에서 기독교 관련 선전물을 떼어내고 시진핑 주석의 초상화를 걸면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들의 활약으로 600여 명의 주민들이 기독교 관련 선전물을 떼어 냈으며, 이중 453명은 시 주석의 초상화를 걸었다.

-시 주석 집권 이후 중국 공산당은 종교에 대한 통제를 특히 강화하고 있다.
지난 3월부터 중국 공산당은 전국 교회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고 있다.

-저장성 원저우시는 중국 기독교의 메카다.
원저우시에만 약 100만 명의 기독교도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최근 시정부는 온저우의 한 교회를 방문해, 교회 출입구와 예배당 등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했다.
테러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신도들의 격렬한 저항에도 감시카메라는 설치됐고, 신도들은 저항하는 과정에서 수십 명이 부상했다.
중국 공산당은 이 같은 반발에도 감시카메라 설치를 전국 교회로 확대할 계획이다.

-글쎄 하나님이 그를 권좌에 얼마나 둘지 모르겠다.
1953년생인 그가 아무렴 영원하겠는가?
자기 영혼에 무관심했던 것에 후회하고, 예수님과 그의 몸된 교회를 박해한 것에 대해 땅을 치며, 무덤에 들어갈 날이 다가오고 있다.

-아무리 대국의 권좌를 누렸으면 뭐하나?
그걸 무덤까지도 가져갈 수 없다.
무덤은 화려하게 꾸밀 수 있다.
무덤 앞에 비석은 크게 세울 수 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이 세상에서의 기껏 100년의 삶을 위해,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삶을 포기하는 것은, 정말이지 어리석은 일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질상 동등하신 분이다.
만유의 주라는 말이다.
만왕의 왕이라는 말이다.
그분이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다.
섬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까지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

-아이들을 섬기셨다.
여인네들을 섬기셨다.
병든 사람들을 섬기셨다.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셨다.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섬기셨다.

-열두 제자를 세우셨지만 그들은 변변찮았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미움을 받으셨다.
이 땅에 인류 구원자로 오셨지만 거부 당하셨다.
끝내 그것도 제자의 배신으로, 종교지도자들의 고소로, 총독 빌라도의 판결로,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다.
그것도 젊디젊은 서른셋의 나이에...
그렇게 예수님은 죽음을 맞이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다. ①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②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③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다...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④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⑤ “내가 목마르다(요 19:28)”
⑥ “다 이루었다(요 19:30)”
⑦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보면 첫마디 말씀도 기도요, 마지막마디 말씀도 기도인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기도로 태우셨다.
자신을 따라올 자들에게 십자가를 이기는 유일한 길이 기도임을 밝히 보여주셨다.
예수를 따른다면서 기도에 무관심하거나 소홀한 것은 모순이다.
그것은 자신이 예수님보다 뛰어나다는 말이 된다.
예수님도 못한 것은 자신은 할 수 있다는 교만인 것이다.

-신앙의 처음과 마지막은 기도이다.
신앙생활의 처음은 영접기도로 시작한다.
신앙생활의 마지막은 임종기도로 마친다.
신앙의 열기가 식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기도하지 않아도 살 수 있을 거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
다른 시간은 있어도 기도할 시간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다른 게 위기가 아니다.
기도하지 않는 게 신앙의 위기다.
기도가 안 되는 게 신앙의 위기다.
기도할 맘이 안 생기는 게 신앙의 위기다.

-다시 기도의 끈을 붙잡자.
기도의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자.
인생 광야학교에 보내기 전에, 기도의 자리로 나가자.

-기도는 죽는 연습이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죽는 연습니다.
기도의 자리는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는 자리다.“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육체적 죽음을 맞기 전,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자아의 죽음 경험하셨다.
이미 기도로 죽음에서 승리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6시간 달려계셨다.
우리시간으로 오전 9시에 못 박혔고 오후 3시에 운명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지 3시간 후에, 온 땅에 어둠이 임했다.
십자가에 달린 아들을 차마 볼 수 없어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그렇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진이 일어나,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기도 하여 죽었던 사람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광경을 목도한 예수님의 사형집행을 처음부터 주도했던 백부장은, 이렇게 고백했다.“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더욱 특이했던 것은, 예수님이 운명하는 순간에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이, 둘로 찢어졌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에 의하면,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몸이 찢기심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이 열린 것이다.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사람에 대해,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생각이 달랐다.
유대인들은 그가 비록 죄수라 할지라도, 안식일에 달려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안식일에는 시체를 내려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반면 로마인들은 십자가에서 죽으면 그대로 두었다.
날짐승에게 쪼아 먹히게 했다.
그래서 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예수님에 대한 사형을 판결한 사람이 로마 총독이다.
사형 집행도 총독의 명령을 받은 로마 군인들이 했다.
그러니 시체를 처리하는 것도 총독의 권한에 속했다.
아무리 예수님이 유대인이고 고소인들이 유대인이지만 일단 총독에게 일임한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예수님의 가족들과 제자들은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틀림없이 기도했을 것이다.
자기들에게는 어떤 힘도 없다.
막무가내로 총독을 찾아가서 사정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고위급 인사 중 알고 지내는 사람도 딱히 없다.
정말 그들은 예수님이 죽은 채 십자가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 미칠 것만 같았다.
자기들에게 어떤 방법도 해답도 없으니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그러자 기적적인 응답이 있었다.
하나님이 응답의 사람을 보내주셨다.
저물었을 때에 아미마대의 부자 요셉이 찾아온 것이다.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우리가 기도하면, 성령님이 역사하신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천사가 동원된다.
천사가 동원되면, 환경이 변화되든지, 응답의 사람이 찾아온다.
본문에서는 그들이 기도함으로 응답의 사람이 찾아온 것이다.

-그들을 찾아온 요셉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다.
공회원이었다. 눅 23:50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선하고 의로운 공회원이다.
그는 공회에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자로 결의할 때 반대표를 던졌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그는 존경받는 공회원이었다.
그들이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을 보내주신 것이다.
더 나아가 요셉은 와서 자신도 예수님의 제자라고 밝혔다.
그들은 사정 얘기를 하며,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역시 확답은 할 수 없지만, 가서 총독을 한 번 만나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당부를 했다.
“대신 나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아, 물론입니다. 바로 기도하겠습니다.”

-요셉은 그들과 인사를 하고 급히 총독 관저로 떠났다.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빌라도는 표정이 밝지 않았다.
백부장으로부터 예수님 처형에 대한 보고를 받은 후여서다.
자신은 어떻게든 예수님을 풀어주고 싶었다.
예수님이 그만한 죄를 지었다면 사형에 처해야 하지만 자기는 아무리 봐도 예수님은 죄가 없어보였다.
무리가 들고 일어나 민란이라도 날까봐 할 수 없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었지만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백부장으로부터 예수님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는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러던 차에 요셉이란 공회원이 찾아왔다.
기분 같아서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공회원이 찾아왔다니, 안 만나줄 수도 없었다.

-요셉은 빌라도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예수님의 시체를 주십시오.”
사실 어려운 부탁이다.
빌라도는 요셉의 부탁을 받고는 선뜻 “내주라”고 명령했다.
왜 달라고 하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시체를 달라고 하는 목적이 장사를 치르려고 하는지, 혹시 다른 목적이라도 있는지 따져 묻지도 않았다.

-요셉은 자신이 공회원이긴 하지만 그래도 총독을 찾아올 때는 부담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도 기도했고, 기도 부탁도 하고 왔다.
그런데 막상 빌라도 총독을 만나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부탁했더니 마치 자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적하게 일이 진행되었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공회원 요셉을 사용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빌라도 총독의 마음을 열어놓으신 것이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자기 새 무덤에 장사 지냈다.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예수님이 갑작스럽게 죽었고 또한 바로 안식일이 닥쳐서 장례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시신에 바를 향품도 준비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체를 잘 닦고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장사를 지내야 했다.
예수님은 죽을 때 자기가 묻힐 무덤 하나 장만해 두지 못했다.
그래서 잠깐이지만 남의 무덤을 빌려서 장사되셨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한테 와서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할 때 하셨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
살아계실 때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죽어 묻힐 때도 그랬던 것이다.
보통 사람이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었다면 잘 살았다는 말 듣기 어려울 것이다.

-예수님은 아낌 없이 주는 나무로 살다가 가셨다.

-쉘 실버스타인이 쓴 [아낌 없이 주는 나무]라는 책이 있다.
옛날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나무에게는 사랑하는 소년이 하나 있었고, 그 소년과 나무를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여 자주 놀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소년은 점차 나이가 들며 나무를 잘 찾아오지 않아, 나무는 혼자 있을 때가 많았다.
어느 날 소년이 나무를 찾았을 때, 나무는 소년을 반기며 “같이 놀자”고 하였다.
하지만 소년은 나무에게 “돈이 필요한데 돈을 주지 못하겠냐” 물어, 나무는 “자기에게 달린 사과를 따서 도회지에서 팔라”고 하였다.
그래서 소년은 사과를 따 도회지에서 팔았고,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 소년이 돌아왔다.
그 소년은 “집 한 채를 마련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나무는 “자기 가지를 베어다가 집을 지어라” 하였고, 가지를 베어간 소년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다 되어 돌아 온 소년은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하였고, 나무는 “자기의 줄기를 베어다가 배를 만들어 여행을 떠나라”고 하였다.
나무는 행복하였지만 정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소년은 다시 돌아 왔다.
하지만 그 때 그 나무는 가진 것이 밑동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소년이 필요한 것은 편안히 앉아서 쉴 곳이었다.
나무는 “앉아서 편히 쉴 곳은 늙은 나무 밑동이 최고”라며, “밑동에 앉아 편히 쉬라”고 하였고, 소년은 그리 하였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을 아낌없이 주는 분으로 표현했다.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아리마대 요셉의 도움을 받아 급하게 장사를 지내긴 했지만, 여인들은 무덤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무엇이 그 여인들을 무덤에 붙잡아놨는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다.
예수님께 아낌 없는 사랑을 받았던 여인들이다.
그 사랑에 감격하여 예수님을 따랐고 너무나 갑작스럽게 운명을 달리한 예수님이 보고도 믿겨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도 바르지 못하고, 급하게 장사를 치른 것이 너무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고 그 여인들이 계속 그곳에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두 사람이 예수님의 무덤 위치를 봐두었다고 했다.
안식일을 지키고 다시 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예수님이 처형된 다음날이 되었다.62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종교지도자들이 빌라도를 찾아왔다.
빌라도 입장에서 썩 반가운 손님들이 아니다.
그들이 자기들을 찾아온 목적은 뻔하다.
예수님 때문이다.
혹시라도 이 양반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내놓으라고 떼를 쓰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긴 했다.
사실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하면, 입장이 난처해진다.
자신의 입장도 그렇고, 공회원인 요셉의 입장은 더욱 난처해진다.
이미 무덤에 장사를 지냈는데, 무덤에 가서 시체를 다시 가져올 수도 없는 일이다.

-다행히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63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대신에 무덤을 지켜달라는 요구를 했다.
그것도 사흘 간만 지켜달라는 거였다.
세상에 무덤을 지켜달라는 요구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빌라도는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아니 죽으면 끝 아닌가?
그가 살았을 때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주장을 했다고 해도, 그건 살아있을 때 주장이다.
살아 있을 때 무슨 주장인들 못하겠는가?
그와 비슷한 주장을 한 사람이, 아담 이래로 한 둘이었겠는가?

-하지만 이제 그는 죽었다.
십자가 위에서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죽은 사실이 확인됐다.

-그런데도 종교지도자들은 그마저도 미덥지 못하다며 무덤까지 지켜달라고 했다.
제자들이 와서 예수의 시체를 도둑질하고는, 예수가 부활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빌라도는 조금은 빈정거리는 투로 대꾸했다. 65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성전의 경비병으로 지키라는 것이다.
이들은 가룟 유다를 앞세우고 가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잡았던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본의 아니게 무덤 앞에서 보초를 서게 되었다.
살다살다 무덤 앞에서 경계 근무를 서는 것은 처음이었다.
산 사람을 지키기 위해 보초는 서봤지만, 시체를 지키기 위해 보초를 서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종교지도자들은 무덤마저 지켜달라는 부탁을 하러 갔지만 이번에는 빌라도의 협조를 받지 못했다. 66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빌라도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전 경비병으로 지키면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다.
자기들이 지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지도자들은 돌을 인봉했다.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예수님을 영원히 무덤에 가둬두기 위해서였다.
무덤문을 가로막고 있는 돌을 열어주지 않으면, 죽은 자 스스로 나올 수 없다.

-종교지도자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돌아갔다.
빌라도에게 사형 판결을 얻어낸 것,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한 것에 이어, 무덤을 돌로 봉인함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불의가 잠시 정의를 이긴 거 같았다.
무덤이 잠시 예수님을 가둔 거 같았다.
그러나 무덤은 예수님을 결코 가두지 못한다.

-예수님이 무덤에 갇혔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의 헌신도 헛되다.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불쌍한 존재가 된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우리 살아있는 자와 먼저 죽은 자의 주가 되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