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77:죽음으로 삽니다.(마 27:45-56)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02-18 00:00
조회
1033
마태복음 강해 77죽음으로 삽니다.(마 27:45-56)2018. 2. 18. 프롤로그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 유배를 가 있을 때, 넷째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애통해 하며 이런 묘비명을 썼다고 한다.
“나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은데 살아 있고, 너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나은데 죽었으니, 이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게 죽음 앞에 선 인간의 한계가 아닐까?

-노르웨이에 사는 한 할머니는, 노구의 몸을 의탁할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아는 친척들을 찾아가서 같이 살자고 사정을 했지만, 아무도 할머니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 할머니는 자기의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꼭 이런 약속의 말을 잊지 않았다.
“염려하지 마세요. 저는 저의 죽음이 아름답기 위해서 줄곧 기도해 왔거든요. 하나님께서 제 마지막을 책임지실 거예요. 그러니 염려마시고 저를 받아 주세요.”

-그러나 아무도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인 부부가 이 할머니의 간증을 들었다.
“할머니가 기도하셨다면 틀림없습니다. 우리 집에 오셔서 같이 사세요.”

-그래서 할머니는 이 젊은 그리스도인 부부와 함께 살게 되었다.
할머니는 이 부부의 자녀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본을 가르쳤다.
젊은 부부의 가정은 이 할머니 때문에 무척 행복했다.
매일 저녁 할머니를 모시고 온 가족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그 날도 다른 날과 다름없이 맑은 아침이었다.
할머니의 기도 시간이 끝날 쯤 되어 식사 기간이 되었는데도, 할머니가 나오시지 않았다.
그래서 이 젊은 부부는 할머니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무 기척이 없었다.

-방문을 연 그들의 눈에 순간 비쳐진 것은 엎드린 채로 기도하며 숨져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할머니 곁에서 편지 한 장을 발견하였는데 할머니가 남긴 유서였다.

-유서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아무도 나를 맞아 주지 않았는데 당신들은 나를 믿어 주었고, 나와 함께 살아 주고 베풀어 준 은혜에 참으로 감사하오. 당신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재산을 가장 잘 관리할 사람들로 믿어졌소. 하나님의 사업에 이 재물을 써주오."

-의사이자 세계적 사상가인 아툴 가완디는, 자기 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 그러나 인간다운 죽음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앞서 소개한 그 할머니의 죽음은, 누가 뭐래도 아름다운 죽음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죽음을 위해, 자신의 죽음이 추하지 않고 아름다운 죽음이기를 위해, 기도해야 함을 깨닫는다.
무엇이 그 할머니로 하여금, 그처럼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었다.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전적으로 의탁한 신앙이었다.

-2014년 6월 15일, 아프리카의 수단 법정은 출산을 불과 10여일 남겨둔, 만삭의 임산부 이스학(마리암 야히아 이브라힘 이스학, 27세)을 피고인석에 세웠다.
그의 죄명은 '개종(改宗)'이었다.
이슬람 샤리아 법에 따르면, 무슬림 여성들은 비무슬림 남성과 결혼할 수 없으며, 무슬림이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배교행위다.

-수감 당시 법원은 이스학의 한 살배기 아들 마틴도, '개종하고서 낳은 자식'이라는 이유로 함께 감옥에 넣었다.
재판 끝에 이날 수단 법원은, 그에게 채찍 100대의 태형과 교수형을 각각 선고했다.
12일 후에 그녀는 딸 마야를 감옥에서 출산했다.

-이스학의 아버지는 독실한 무슬림(이슬람 신자)이었다.
에티오피아 정교회 소속의 기독교인인 어머니는, 딸 이스학을 남몰래 자신의 신앙대로 키웠다.
이스학은 2011년 수단 출신의 미국 시민권자 다니엘 와니를 만나 결혼식을 올렸고, 이듬해 마틴을 낳았다.
둘째를 갓 임신했던 지난해 8월, 이스학은 수단 당국에 체포되었다.

-이스학의 아버지 쪽 친척이, "이스학이 이슬람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기독교인과 결혼했다며 고발했다.
샤리아(이슬람 율법)'에 따르면, 이슬람에서는 다른 종교로의 개종이나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의 결혼은 금지하고 있다.

-수단 당국은 현지법상으로는, 이스학은 아버지의 종교를 물려받은 무슬림이기 때문에, 기독교인 남편과의 결혼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스학은 "나는 어렸을 적부터 기독교인으로 자랐기 때문에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적이 없다"고 맞섰다.

-법원은 최종 심리에서 이스학에게 사흘 말미를 주고 이슬람으로 복귀할 것을 권유했지만, 이스학은 "진짜 종교는 취소하거나 버릴 수 없는 것"이라고 거절했다.
결국 법원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남편 와니는 애초부터 기독교도인 데다, 미국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처벌받지는 않았다.

-이스학의 투옥 소식을 들은 서방사회는 크게 반발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오늘날 어디에도 있을 수 없는 야만적 대우"라고 수단 정부를 비판했다.
이스학의 '옥중(獄中) 출산' 이후 국제사회의 비판이 한층 거세어지자, 수단 카르툼 고등법원이 이스학에게 내린 사형선고를 내린 1심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마리암의 석방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과 인권단체들은 일제히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마리 하프 미 국무부 대변인은 “미국인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우려했던 사건에 대한 수단 고등법원의 결정을 환영한다”면서, “지난 2005년 제정된 수단 과도정부의 헌법과 '세계인권선언' 등과는 다른 내용을 담은 현행 법률은 폐기해야 한다”고 밝혔다.

-죽음 앞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순교할 각오를 한 한 연약한 여인이, 지독하게 인권을 말살하던 현행 법률을 무효화하는 승리를 얻은 것이다.
그녀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 여인은 죽음으로 살았다.
살기 위해 믿음을 포기했다면, 육체의 생명은 연장될 수 있었겠지만, 영원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무엇을 주고 영생과 바꿀 수 있겠는가?
이 땅의 삶은 길지 않다.
이 땅의 삶은 영생으로 가는 여정이다.

-사는 동안 잘 살되 떠날 준비도 하고 살아야 한다.
죽음은 끝나는 게 아니다.
죽음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죽음은 새로운 삶을 위해 떠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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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말씀이다.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종교지도자들의 시기가 있었다.
스승을 은 30에 판 가룟 유다의 배신이 있었다.
어떻게든 총독 자리를 보전하려는 빌라도가 있었다.

-예수님을 죽이는데 가장 적극적인 이는, 종교지도자들이었다.

-가룟 유다는 스승에 대한 실망감이 컸다.
극단의 자리로 몰면 ,예수님이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믿었다.
은 30을 들고 종교지도자들에게 달려가 계약을 무르자고 한 것을 보면, 예수님을 죽게 하려는 의도는 없어 보인다.

-빌라도 총독은 애초에 예수님의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풀어주려고 애를 썼다.
더구나 아내의 간절한 부탁도 있었다.
하지만 민란이 일어나려는 움직임에 겁을 먹고, 무리가 원하는 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고 말았다.

-총독으로부터 예수님을 건네받은 군인들은 예수님을 희롱했다.
그리고 관례대로 십자가형을 받은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워서, 처형장소인 골고다까지 가도록 했다.
십자가는 성인 남자면 충분히 질 수 있는 무게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대로 지지를 못했다.
얼마를 가다가 쓰러지고, 그러면 군인들의 채찍이 가해지고, 겨우 일어나 몇 걸음 가다가 쓰러지고, 그러면 군화발이 날아들고, 그렇게 하기를 몇 차례나 반복됐다.

-보다 못한 군인들이, 구경하던 건장한 남자 구레네 시몬을 차출하여, 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도록 했다.
더 이상 진행했다가는 죄수가 처형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강도 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다.
예수님이 마치 강도의 우두머리처럼 보이게 할 목적으로, 예수님을 기준하여 좌우에 강도를 십자가에 단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숱한 조롱과 모욕을 받으셨다.
심지어 같은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조차 예수님을 욕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 삼시였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시간은 흘렀다.
어느덧 세 시간이 지났다.

-그 때 갑작스럽게 온 땅에 어둠이 임했다.
누가 봐도 어둠은 심판을 상징한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의미한다.
또한 어둠은 아들이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있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속 타는 마음이기도 하다.
자신이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사람들이, 죄값으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도 고통스럽다.
그 인류를 구원할 목적으로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버려두는, 아버지의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본래 힘든 시간은 길게 느껴진다.
학교나 군대에서 벌 받을 때, 시간이 왜 그리 안 갔는지 모른다.
인생의 고난과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시계는 멈춰 있는 거 같다.

-그 엄청난 세 시간을 한 절로 가볍게 처리했지만, 결코 가볍게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가 2시간짜리고, 그 중 고문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장면이 1시간이다.
그 장면을 영화로 보는데도 여간 힘들다.
하물며 그 고난을 당하시는 예수님은 어떠셨겠는가?

-예수님은 어둠 속에서 절규하셨다.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버지께 버림받은 아들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항상 아버지라고 부르셨다.10: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6: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심지어 십자가 위에서의 기도하실 때조차도 아버지였다.“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아닌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다.
물론 시편 22:1의 말씀으로 기도하신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 대신 아버지로 바꿔서 부를 수 있다.
그럼에도 굳이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아들로서 부르신 게 아니라 죄인의 대표로서 부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다.
양손과 양발에 못이 박혀있고, 머리에 가시관이 씌워져 있다.
육체적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럼에도 더 큰 고통은 영적인 고통 곧 아버지께로부터 버림받은 고통이다.

-또한 예수님의 절규를 통해, 죄인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을 부르는데 있음을 말해준다.행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렇다. 예수 이름 외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

-세상의 그 어떤 이름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우리가 시험 가운데서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이름 예수,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이름 예수,
우리가 죄 중에 있을 때조차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이름 예수 뿐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처절하게 불러본 적이 있는가?
그렇게 안 불러봤다면, 개인적으로는 삶이 평탄했다는 말이고 축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교회에 대해, 나라와 민족에 대해, 그리고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게 살아왔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프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버지께 버림 당하신 예수님의 절규에 대해, 함께 아파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상황에서도 놀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유대인들 중에는, 엘리야가 죽지 않고 승천했기에, 고통 당하는 자를 구하러 다시 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엘리 엘리 하는 절규를 듣고, 엘리야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예수님이 너무나 처절하게 절규하심으로, 엘리야를 부르시는 줄 잘못 들었을 수 있다.
최후의 몸부림으로 부르짖었는데, 발음에 신경 쓸 여력이 있었겠는가?

-십자가 아래 있던 한 사람이, 어디론가 달려갔다.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그가 가서 가져온 것은 해면에 신포도주를 적신 것이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목마름을 호소하셨기 때문이다. 요 19: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그 사람의 행위는, 죽어가는 예수님에 대한 최소한의 동정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 정도 호의는 베풀 수 있었다.
“살려달라” “십자가에서 내려달라”는 말 외에, 다른 부탁은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

-그런데 그보다는 예수님의 생명을 더 연장시켜, 엘리야가 와서 구원해 주는지 보고 싶어서였을 가능성이 높다.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그들은 자신만만해 했다.
예수님이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놀린 것이다.
그들은 최후의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최후의 승자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까지 십자가 위에서 내려온 사람은 없다.
십자가에 달렸던 사람 중에 살아난 사람은, 아직까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그런 자신감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결국 엘리야는 오지 않았다.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예수님이 운명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운명하시기 전, 뭐라고 소리 지르셨는지는 다른 복음서를 참조하면 이렇다.눅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잠자기 전에 하는 기도라고 한다.
나도 가끔 이 기도를 하고 잔다.
우리가 이 기도를 하고 잤다가 천국에 깨어나는 게, 가장 멋진 삶의 시나리오가 아닐까 싶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주기도문이 좋겠다.“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아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오늘의 일용할 양식과 용서와 보호를 구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밤에 잠들기 전에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좋겠다.“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잠잘 때 내 영혼을 맡아줄 아버지가 계시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예수님은 그렇게 이 땅에서의 짧디짧은 33년의 생을 마감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짧고 비참한 최후였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대망하던 메시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다.

-종교지도자들은 눈엣 가시와 같던 예수를 없앴으니,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이제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터졌다.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이 찢어지고 만 것이다.
그 휘장은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일 년에 단 한 번만 열렸다.
휘장이 허접한 게 아니다.

-평택에 있는 광은기도원에 가면 세계성막복음센타가 있다.
그곳에 실물 크기의 성막이 있다.
세계에서 성막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세 곳뿐인데, 실내에 만들어진 곳은 그곳뿐이라고 한다.
그곳에 가면 휘장을 확인할 수 있는데, 카페트 몇 장 두께다.
말 몇 마리가 당겨도 찢어지기 힘들다.
그런데 그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짝~ 찢어진 것이다.
성소와 지성소의 구분이, 사실상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해석했다.히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휘장을 예수님의 찢겨진 육체에 비유했다.
예수님의 찢겨진 육체 때문에 죄인이 바로 지성소 곧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누구를 거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성모 마리아나 성인이나 사제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 이름으로 바로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나아가는 것이다.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어떻게 나가야 할까
나를 구원한 주의 십자가 그것을 믿으며 가네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나 여전히 부족하나
나를 품으신 주의 그 사랑 그것을 믿으며 가네

자격 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자격 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십자가의 보혈 완전하신 사랑 힘입어 나아갑니다
십자가의 보혈 완전하신 사랑 힘입어 예배합니다

-예수 피면 족하다.
십자가에서 쏟으신 예수님의 보혈이면 충분하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보혈로 덮여진 우리를 받아주신다.

-우리야 성소 휘장이 찢어진 의미만 알면 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얼마나 충격에 휩싸였을까?
얼마나 불길한 징조로 비춰졌을까?

-그들에게 비상이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휘장을 다시 제작하는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휘장은 정교한 작업이고, 손이 많이 가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오늘날처럼 구입해서 바로 교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유월절은 정월이고 대속죄일이 칠월이니까, 그래도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지진이 일어났음도 알려주고 있다.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지진을 동반한 여러 일로 인해, 백부장은 자기도 모르게 특별한 고백을 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이 백부장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일체를 지휘했던 사람이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다.
십자가형이 집행되는 6시간의 과정을 쭉 지켜본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죽음이 평범한 죽음과는 뭔가 달라도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결정적으로 지진과 그로 인해 일어난 일들을 통해, 그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심히 두려워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희롱했다.
십자가를 지워 쓰러지면 채찍질을 가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 모든 일을 자신이 진두지휘했다.

-그의 고백이 얼마나 오래갔는지 모른다.
그가 후에 예수님을 믿었는지, 그 때 두려움에 사로잡혀 했던 한 번의 고백으로 끝났는지 모른다.
그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제 정신으로 사는 게 힘들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 사람들이 있었다.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멀리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지켜본 사람들이 누구였는가?
여자들이었다.
예수님을 섬겨왔던 여인들이었다.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따라왔던 여성들이었다.
이름이 기록된 여성은 몇 명 안 되지만, “많은 여자”라고 했다.
제자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큰소리치던 사내들은 자기 살겠다고 도망치고 없다.
연약한 여성들만,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죽었다.
그들은 골고다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우리도 예수와 함께 죽었다.
아니 예수와 함께 죽지 않았다면 큰일이다.
죽어야 살기 때문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제 우리 남은 삶을,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