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76:나에게도 십자가가 있습니다.(마 27:27-44)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02-11 00:00
조회
1073
마태복음 강해 76나에게도 십자가가 있습니다.(마 27:27-44)2018. 2. 11. 프롤로그

-<땡큐 아빠>라는 블로그 명을 가진 분의 묵상 글을 소개한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어느 늦은 밤, 친구와 함께 보게 된 영화 한 편 바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였다.
예수님의 고난, 제목부터 내용을 짐작하게 하는 종교영화를 믿지 않던 내가 보게 된 것은, 친구의 추천 때문이었지만, 내 스스로도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2년 전 아버지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시면서, 나를 제외한 가족들이 모두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나 또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때였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서 받으신 고난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한 그 영화를 보는 내내, 얼마나 눈물이 나든지...
마지막 순간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그를 조롱하고 그의 옷을 나누는 로마병사들을 향해,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드릴 때는, 내 자신이 주체하지 못할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눈물이 났던 것은, 그 때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의 고난과 고통, 그리고 그런 가운데서도 용서의 기도를 올리는, 그 분의 삶에 감동했던 것이다.
그의 죽음이 나에게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그 이후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고, 몇 년 동안 나에게 십자가는 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너무나 무거워 보이고 고통스러워보였다.
그 무게와 고통이 어디로부터 시작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채찍을 맞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예수님을 생각하면 슬펐다.

-십자가는 분명 감동이고 슬픔이다.
이 시간 지금 나에게 예수님이 짊어지신 십자가는 나의 것이다.
나의 죄로 인한 것이며, 나의 사망을 대신 짊어지신 것이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것이 아니다.
그 십자가는 나의 것이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 기사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여러 사람들의 공로가 있었다.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데는 하나님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된 인류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하시기로 했다.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그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자청만 면도 없지 않다.
아버지가 원하시니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직접적으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있다.

-먼저는 종교지도자들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죽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앞서 몇 차례나 말씀하셨다.마 20: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종교지도자들을 일컫는다.
여기엔 백성의 장로들도 포함된다.
이들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예수님을 없애려고 시도를 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12제자 중 한 명을 매수하여, 예수님을 잡는데 성공했고, 형식적인 산헤드린 공회의 결정을 통해, 빌라도에게 넘겨 십자가형 판결을 얻어냈다.

-다음은 가룟 유다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유다는 예수님을 잔뜩 기대했지만 대 실망이었다.
예루살렘 입성할 때의 분위기는 좋았고 성전을 정화할 때까지는 뭐가 되고 세상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갈수록 실망이 커져가고 있던 어느 날,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마 26: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그리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그는 종교지도자들을 찾아가서 은 30에 스승을 팔았다.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셔서, 이런 자극적인 말씀까지 하며 회개할 기회를 제공하셨지만, 그는 이미 마음을 닫았다. 마 26: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결국 은 30을 성소에 던지고,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 주님의 말씀대로 되고 말았다.

-그 다음은 빌라도 총독이다.
당시 사형 판결권은 총독에게 있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데려왔던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해보고, 그게 단순히 종교 문제지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아님을 알았다.

-자기를 향해서 온갖 거짓 증언을 하는데도, 일절 침묵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든 예수님을 살려보고자 했다.
명절에 죄수 한 명을 풀어주는 전례를 들어, 예수님을 석방하고자 노력했다.
더구나 자기 아내의 부탁도 있었다.
무엇보다 법을 공정하게 집행해야 하는 총독의 자존심이 있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과 합세한 무지한 무리들이,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무조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소리 소리를 질렀다.
금방이라도 민란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자기 관할 지역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하면, 빌라도는 끝장난다.
황제로부터 본국으로 소환되어, 책임 추궁을 당하게 된다.
결국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고 말았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고라도 자기 자리를 지키고 싶어 했지만, 결국 황제의 소환통보를 받고 소환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빌라도 총독은 속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종교지도자들과 무리의 압박에 굴복하여 결국 예수님을 내주고 말았다.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이 한 번의 결정이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 되고 말았다.
그에게 영원한 꼬리표가 되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주으시고”

-총독의 결정이 떨어지자 군병들이 예수님을 데리고 갔다.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총독은 깊이 고민하다가 마지못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줬는데, 그 뒤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물론 그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군인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군인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명령만 따른다.
일반적으로 군대 생활은 단순한 사람이 잘 할 수 있다.
생각이 깊고 복잡한 사람은 여간 힘들다.

-총독의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잠시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심심하던 차에 좋은 놀잇감이 생긴 셈이다.
그래서 온 군대를 모았다.
무슨 비상이 걸린 것도 아니다.
무슨 작전이 걸린 것도 아니다.
죄수 한 명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온 군대가 모였다.
좀 과한 반응인 거 같기는 한데, 아마 예수님이 대단한 능력을 가진 소문을 들었기에, 만반의 준비를 했던 거 같다.

-십자가 형을 위해서는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이 대기 시간을 무료하게 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기더니 홍포를 입혔다.
예수님의 옷은 멀쩡한 옷이 아니다.
모진 채찍질을 당하여,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 옷이다.

-옷에 살이 달라붙어 있어, 옷을 벗길 때 심한 통증이 있었다.
그리고 준비한 홍포를 입혔다.
마가복음에서는 자색옷이라고 했다.
홍포는 로마의 시행장관들이 입던 짧은 망토를 가리킨다.
자색옷은 황제나 왕이 입는 옷이다.
또한 그들은 어디서 준비했는지 가시관을 가져와 씌웠다.
갈대를 예수님의 오른손에 들려줌으로 마치 홀을 든 왕처럼 보이게 연출했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놀리기 위해서, 참 준비도 열심히 했다.

-사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인 것과, 자기들은 아무 상관이 없다.
자기들이 예수님한테 무슨 피해본 적도 전혀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심심풀이로 예수님을 희롱하고 있다.
사람들이 이렇게 악하다.
물론 군중심리도 한몫했을 것이다.

-자기들은 죄수 앞에서 힘을 가진 자들이다.
그래서 가진 힘을 이용하여 약자의 인격을 마구 유린하고 있다.
당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떨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 자체를 오락처럼 즐겼다.
군인들은 모처럼 웃고 떠들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채찍에 맞아 초주검이 되어 있는 예수님을 앞에 두고...

-이제 준비가 다 됐다는 연락이 왔다.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그들은 예수님한테 입혔던 홍포를 벗겼다.
본래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힌 후 밖으로 끌고 나갔다.
십자가에서 처형을 받는 죄수는,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처형장까지 지고 가야만 했다.
십자가 행진을 해야 했다.
상당한 거리를 십자가를 지고 걸어야 했다.
그 십자가의 무게는 건장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질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예수님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막 15: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기기 전에 채찍질이 있었다.
그건 예수님을 심한 채찍질로 피투성이를 만들어놓으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 채찍질이 보통이 아니다.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가는 모진 고문이다.

-이미 예수님은 채찍질을 당함으로, 온 몸의 기력이 소진되었다.
일어서 걸을 힘도 없었다.
그런 사정을 봐줄 군인들이 아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어깨에 십자가를 지웠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얼마쯤 가다가 쓰러졌다.
그럼 여지없이 채찍질이 가해지고 군화발이 날아왔다.
겨우 몸을 일으켜 다시 십자가를 져보지만, 얼마가지 못해서 또 쓰러지고 만다.
쓰러지면 채찍질과 발길질, 겨우 일어나서 십자가를 지고 가다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 채찍질과 발길질...이게 몇 번이고 반복된다.

-그 무자비한 군인들이 보기에도 더 이상 안 되겠던 모양이었다.
십자가 처형장까지 가지도 못해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나 보다.
그들은 어떻게든 처형장이 있는 골고다까지, 예수님을 데려가야만 했다.
그래서 십자가를 대신 좀 지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주위를 살펴보게 되었다.

-그 때 한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어깨가 떡 벌어져, 한 눈에 봐도 힘 좀 쓸 거 같은 건장한 젊은이였다.
시몬은 당시 구레네 지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왔다가, 시끌벅적 해서 무슨 일인가 싶어 구경 나왔다가 강제 징발된 것이다.
그는 유월절을 지키려고 멀리서 왔다.
그런데 피 묻은 십자가를 져야 한다.
아무리 대신이긴 하지만 그래도 재수 없는 일이다.
이건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다.
그렇다고 십자가를 못 지겠다고 끝까지 반항할 수도 없다.
로마 군인들의 살기 어린 눈빛 때문이다.

-군인들은 당황하는 시몬을 향해 손짓으로 재촉했다.
계속하여 못 지겠다고 하면, 자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
아마 그는 십자가를 대신 진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그 이후 그의 행적은 잘 모른다.
성경에 나와 있지 않아서다.
확실한 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막 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롬 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이 말씀을 근거로, 시몬의 온 가족이 구원 받은 것 같다.
시몬의 아내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후견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두 아들은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한다.
비록 억지로 십자가를 지긴 했지만, 주님은 보상해 주셨다.
사실 십자가가 좋아서 지는 사람은 없다.
져야 하니까 지는 것이다.
안 지면 안 되니까 지는 것이다.
억지로 져도 보상을 해주신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지면 어떨까?

-기쁘게 못 지겠거든 불평은 하지 말고 지라.
기쁘게 못 지겠거든 억지로라도 한 번 져보라.
그리고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진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나 주어지지 않나 확인해보라.
그 때 임하는 은혜를 나는 ‘강요된 은총’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다.
때론 우리에게 강요된 은총도 필요하다.

-올 겨울은 유독 추웠다.
지구 온난화를 걱정한 게 무색하게 빙하기를 떠올리게 한다.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고 바람까지 불어 체감온도가 영하 20도에 이르면, 집에서 나올 때 몸이 알아서 움츠려든다.
그래도 옷 겹겹이 껴입고 새벽에 교회를 향한다.
강요된 은총인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그 은총 덕에 살고 있다.

-예수님은 자기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져준 구레네 시몬에게, “고맙다”며 인간적인 고마움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 때 그는 좋지 않은 기분 탓에, “됐수다”며 퉁명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그게 지금은 많이 후회된다.
시몬은 시간이 지난 후 깨달았다.
전에 자기가 졌던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사실은 자기의 십자가였다는 것을...
사실은 예수님이 자기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감사해야 할 사람은 정작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였다는 것을....

-누구나 자기 십자가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거 아닌가?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기 십자가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이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게 동반돼야 한다.

-자기 십자가가 더 크게 느껴질 수 있다.
본래 자기 떡은 작아 보이고, 자기 십자가는 커 보이는 법이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주님께서 두 제자를 데리고 어떤 길로 들어서셨다.
거기서 주님은 각자에게 무게가 똑같은 십자가 하나씩을 건네주시며, 당신은 이 길이 끝나는 곳에 가 있을 테니 그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지시한 다음 자취를 감추셨다.

-첫 번째 제자는 가볍게 십자가를 매고 가는데 반해, 두 번째 제자는 지독히 힘들어하면서 뒤쳐져 따라왔다.
십자가를 걸머진 지 하루 만에 첫 번째 제자는 길 끝에 당도하여 십자가를 스승에게 넘겨드렸다.
주님은 첫 번째 제자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아들아, 아주 잘 했다.”

-두 번째 제자는 이튿날 저녁이 되어서야 길 끝에 도착했다.
도착한 제자는 십자가를 주님의 발 밑에 내동댕이치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한테는 다른 제자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십자가를 내주시다니요! 제가 이제야 온 것도 그 때문이라구요!”

-주님은 마음이 상한 채 슬픈 얼굴로 두 번째 제자를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둘 다 똑같은 무게였느니라.”

-두 번째 제자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도 앞 사람은 아주 쉽게 십자가를 옮겼는데, 유독 저만 십자가를 옮기느라 쩔쩔 맸다는 말씀입니까?”

-주님이 그에게 타이르셨다.
“십자가를 탓하지 말아라. 그 까닭은 십자가를 지고 오는 동안 줄곧 불평을 늘어놓은 너에게 있느니라. 네가 불평할 때마다 십자가의 무게는 늘어났던 거야.”

-십자가의 무게가 늘어났다는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그럼 십자가의 무게가 줄어들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A란 사람은 점점 무게가 줄어들어 가볍게 지고, B란 사람은 점점 무게가 늘어 무겁게 진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에 속하는가?

-십자가에 대한 이런 명언이 있다.
“참고 순종하며 십자가를 져라. 그리하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너를 져줄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책으로 유명한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Kempis)의 말이다.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마지막 호의를 베풀었다.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님이라고 해서 특별히 호의를 베푼 것 같지는 않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쓰디쓴 포도주를 사형당하는 죄수에게 제공하는 것이 관습이었다고 한다.
쓰디쓴 포도주가 어느 정도 마취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십자가의 고통이 컸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마지막 호의마저 거절하셨다.
맛을 보시더니 마시지 않았다.
조금도 고통을 덜지 않고 온전히 받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고통을 덜어보려고 애를 쓴다.
수술을 받고 나면 무통 주사를 어떻게 할 건지를 묻는다.
그럼 열의 아홉 이상은 달아달라고 한다.
얼마나 아플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다.
만일 견딜 수 없을 정도도 아파오면, 괜히 돈 좀 아끼려고 했다며 후회가 된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온전히 받기를 원하셨다.
주님은 자신에게 부어진 고난의 잔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시기를 원하셨다.

-몇 번의 호의를 계속 거절하자,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슬쩍 지나가는 투로 기록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사형을 집행했던 군인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죄수의 옷은 사형 집행자들의 몫이었다.
사실 다른 사람을 사형 집행하는 것은 못할 짓이다.
모르긴 해도 맨 정신으로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죄수가 입었던 옷을 가질 수 있도록 했나 보다.
그래도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놓고, 그 밑에서 옷을 나누기 위해 제비 뽑는 것은 좀 심하기는 하다.

-그러면서 그들은 시간을 보낸다.
어차피 그들은 죄수들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는,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그러니 그렇게 해서라도 무료한 시간을 달래야 할 필요가 있었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특별한 사람이다.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아무나 십자가에 처형시킬 수 없다.
로마법이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형틀인 십자가에 죄패를 붙임으로, 한 번 더 인격적인 사형을 당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죄패는 좀 이상하다.
“유대인의 왕 예수” 이게 죄패다.

-요한복음에는 죄패에 대한 좀더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준다.요 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죄패에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쓴 것이 맘에 안 들었다.
그래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부탁했지만, 빌라도는 그건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죄패를 남기고 죽으셨다.
그건 우리가 죽을 때 남겨야 할 죄패였다.
이제 우리가 남겨야 할 죄패는 사라졌다.
혹 묘비명은 남길 수는 있을지 모른다.
굳이 재미있거나 심각한 묘비명이 아니어도 괜찮다.

-예를 들면 버나드 쇼의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소설가 헤밍웨이의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오."
걸레스님으로 유명한 중광의 "괜히 왔다 간다."
개그우먼 김미화의 “웃기고 자빠졌다.”

-묘비명은 내 삶을 짧은 한 줄로 표현하는 것이다.
자기가 정할 수도 있고 타인이 헌사할 수도 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묘비명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삶을 통째로 기억하시는 주님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는 십자가 동무가 있었다.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물론 그들이 자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동무가 됐던 게 아니다.
예수님이 원해서 동무로 붙여주신 것도 아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처형될만한 죄를 지었다.
두 사람을 예수님 좌우에 못 박게 하심으로, 예수님은 두 사람보다 더 큰 죄인처럼 두 강도의 두목처럼 보이게 했다.

-지나가는 자들이 예수님을 모욕했다.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생각 없는 자들의 소리니, 우리도 무시하고 넘어가도 되겠다.

-종교지도자들도 예수님을 회롱했다.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놓고도 직성이 안 풀린 모양이다.
그러나 진짜 내려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나 보다.
참 사람들이 못 됐다.
누구보다 배운 사람들이 못된 심성을 가졌고, 더군다나 종교지도자들이 악한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누구를 가리치고 누구를 지도한단 말인가?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에 희롱하는 죄를 더하고 있다.

-더 가관인 것은 두 강도다.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그들은 어떻게 하다 보니 예수님의 십자가 동무가 됐다.
그럼 예수님을 욕해야 할 이유가 없다.
다른 사람은 다 욕해도 두 사람은 하면 안 된다.
그런데 마치 자기들이 십자가에 달린 것이 예수님 탓이나 되는 양, 예수님을 욕하고 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한 강도가 돌이켜 다른 강도를 꾸짖고는, 예수님한테 정중히 부탁을 한다.눅 23: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님은 그런 강도를 받아주셨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내 십자가이다.
내가 짊어져야 할, 다른 누구도 대신 질 수 없는, 순전히 내 십자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