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75:불의가 정의를 잠시 이길 수 있습니다.(마 27:11-26)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02-04 00:00
조회
781
마태복음 강해 75불의가 정의를 잠시 이길 수 있습니다.(마 27:11-26)2018. 2. 4. 프롤로그

-중국 최고의 역사가로 불리는 사마천의 [사기 史記]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공자는 70명의 제자 중에서 안회만이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추켜세우지 않았던가?
그러나 안회는 굶기가 일쑤였고, 술지게미조차 배불리 먹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하여 베푸는 것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반면 도척은 매일같이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고기를 먹었으며, 흉포한 행동을 제멋대로 하면서, 수천의 무리를 모아 천하를 횡행하였지만, 결국 천수를 다 누렸다.
그가 무슨 덕(德)을 쌓았기 때문이란 말인가?

-또한 근세에도 법도에 어긋난 행동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만 골라서 하면서도, 일생을 편안히 살 뿐 아니라, 대대로 부귀를 누리는 자들이 있다.
반면 땅을 가려서 밟고, 때가 되어야 말을 하며, 사잇길을 가지 않고 공정한 일이 아니면 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재앙을 만나는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나는 심히 당혹함을 금치 못하겠다.
도대체 이른바 천도(天道)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사마천이 그토록 당혹해 한 것은,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불의하게 사는 자들이 정의롭게 하는 자들보다, 오히려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배우 차인표 씨가 2016년 KBS 연기대상에서 베스트 커플상을 받았다.
<월계수 양복점>이라는 드라마에서 배우 라미란 씨와 부부로 나왔는데, 감초 같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상을 받은 차인표 씨 수상소감이, 한동안 화제였다.
“1967년생 양띠, 올해로 나이가 50살이다. 50살에 베스트 커플상을 받아, 진심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50년을 살면서 느낀 것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둘째, 거짓은 결코 참을 이길 수 없다. 셋째, 남편은 결코 부인을 이길 수 없다.”

-시상식을 보지 않았기에, 그의 시상 소감을 라이브로는 듣지 못했고, 후에 김현정 뉴스쇼에서 재방송으로 들었다.
듣자니 차인표 씨가 참 의식 있는 배우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와 둘째는 엉뚱한 말 같았지만, 당시가 국정농단으로 한참 촛불을 들던 시점임을 생각하면, 시대상황을 빗대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촛불 집회 현장에서 많은 노래들이 불렸는데, 그 중에 단순한 멜로디의 노래가 있었다.<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라는 노래이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설교 예화를 찾기 위해 검색을 하던 중, 이 노래를 알게 되었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어봤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노랫말 같은 신념과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
동시에 그건 우리의 신앙이기도 하다.
불의가 정의를 잠시 이길 수 있다.
그렇다. 불의는 정의를 잠시 이길 수 있을 뿐이다.

-어둠이 빛을 잠시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이 참을 잠시 이길 수 있다.
그러나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떠오른다.
진실은 묻히지 않는다. 반드시 드러난다.

-대신에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빛이 어둠을 이길 때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참이 거짓을 이길 때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침몰한 진실이 떠오를 때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묻힌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포기하면 불의에 영원히 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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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과 백성들의 장로들은, 가룟 유다를 매수하여, 예수님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가룟 유다는 불의한 재물에 매수되어, 악마와의 거래를 했고, 그들이 예수님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 가룟 유다가 돈을 좋아하기는 했다.
그렇다고 은 30이 탐나서 스승을 팔지는 않았을 거 같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따른 목적도 돈에 있지 않았다.
한 눈에 봐도, 예수님은 돈 버는 것 하고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그렇담 유다는 자신의 꿈을 위해 예수님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이야말로 자신의 꿈을 이루어줄 분으로 믿고 따랐다.
그리고 그 꿈은 가까이 왔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처음엔 분위기도 좋았다.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를 외쳤다.
예루살렘 도시 전체가 술렁거렸다.
다음날은 불가침의 영역인 성전에 들어가 뒤집어엎었다.

-가룟 유다는 흥분했다.
대망해 왔던, 이스라엘의 독립이 드디어 눈앞에 왔다.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딱 용두사미였다.
자신이 머잖아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다. 마 26: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흐지부지 된다는 건가?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압박할 필요가 있었다.
코너로 몰면, 예수님이 비상한 능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종교지도자들에게 넘겼는데, 아뿔싸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예수님이 묶인 채 빌라도에게 보내지는 게 아닌가?
죄수가 빌라도에게 보내졌다는 말은, 최소 사형이다.
그것도 십자가형이라고 한다.

-가룟 유다는 ‘어 이건 아닌데...’ ‘뭐가 잘못 된 거 같은데...’ 그는 스스로 뉘우쳐 은 30을 들고, 부리나케 종교지도자들을 찾아갔다.
가서 계약을 무르자고 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그러나 그에게 들려온 말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였다.

-가룟 유다는 은 30을 성소에 던져버리고, 돌아가 스스로 목을 매었다.
더 이상 살아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불의한 자들과의 거래의 결말은, 불행을 넘어 비참한 죽음이었다.
이 때까지도 불의가 정의를, 잠시 이기는 듯하였다.

-예수님이 총독 앞에 섰다.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그 장소는 총독 관저로 보인다.
빌라도는 죄수로 끌려온 예수님 앞에서 재판장이다.
예수님이 피고이고, 예수님을 고소한 종교지도자들이 원고이다.
재판장은 원고의 말만 듣고 판결을 내릴 수 없다.
그러므로 피고인 예수님한테 물은 것이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이 무슨 죄목으로 피소되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질문이다.
예수님이 단순히 랍비나 선지자라면, 총독 앞에 설 이유가 없다.

-로마는 피정복민들의 종교와 풍습, 문화에 비교적 관대했다.
단지 로마에 항거하지만 않으면 되었다.
로마의 평화, 로마의 질서에 대항하지만 않으면 문제 삼지 않았다.
유대인의 왕은 로마 황제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 자리다.
로마 황제가 충성 서약을 받고서야, 유대인의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고발을 당해, 총독 앞에 서 있다.
로마 황제와 무관한 왕은,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위험인물이다.
로마의 평화, 로마의 질서에 해가 되는 사람이다.
총독 입장에서는 그냥 넘길 수 없다.
총독이란 자리가 그렇게 안전한 자리도 아니다.
피정복민의 집단 민원이 들어가면, 황제에게 언제든지 파면당할 수 있는 위태로운 자리다.
빌라도 총독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재판을 맡게 된 것이다.

-빌라도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셨다.“네 말이 옳도다”
두 번 물을 필요가 없이 명쾌한 대답이다.
빌라도는 의외라고 여겼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보이는 정황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대한 관심은 가져왔을 것이다.
예수님이 가는 곳에 민중들이 몰리니, 혹시나 싶어 동태파악은 하고 있었을 수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유대인의 왕으로 고발을 당해 온 것이다.
그러니 확인이 필요했고, 본인으로부터 직접 답변을 듣고 싶었다.
빌라도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물으며, 속으로는 “아니예요. 내가 무슨 왕이겠어요? 내가 왕처럼 보여요? 저들이 그렇게 짜 엮은 거예요.” 라고 대답하길 바랐을지 모른다.
그럼 너무 간단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재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예수님이 “당신의 말대로입니다.” 했다.

-종교지도자들은 기세가 올랐다.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자신들이 억지로 고발한 것이 아니라는 게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피고가 자백한 것 아닌가?
당시만 해도 피고의 진술이 가장 중요한 증거로 여겼다.
그들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온갖 증거를 갖다 붙였다.
대부분의 증거는 조작된 것이다.
그들 고발의 결론은 예수님한테 십자가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눈을 지그시 감고, 그들의 고발을 듣고 있었다.
뭐라도 한 마디 대꾸할만한데, 입을 꾹 다물고 계셨다.
가만히 있으면 그걸 인정하게 되는 셈이고, 그럼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보다 못한 빌라도가 끼어들었다.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보는 빌라도가 답답했던 모양이다.
사실 그렇지 않겠는가?
뻔히 아닌 게 보인다.
그런데 아무 말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다.
보고 있자니 너무 안 돼 보였고, 조금이라도 편들어주고 싶은 심정으로 끼어들었다.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십자자형에 해당하는 죄를 찾지 못했다.
총독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들의 고발하는 내용이 너무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그래서 예수님한테 자기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혹시라도 숫자에 눌려 자기 할 말을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자기 변호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라도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4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예수님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사실 변호할 기회를 받았을 때, 변호를 잘하는 것도 지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바보다.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공정한 재판을 받을 기회를 스스로 날렸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은 애초에 살고자하는 마음이 없었다.
자신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뤄야 함을 아셨기 때문이다.
죽어야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슬픈 운명이었던 것이다.

-피고는 자신의 죽음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재판장은 피고의 그런 태도를 안타깝게 여기는, 이색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아무나 자신의 생사가 정해지는 결정적인 상황에서도, 그렇게 덤덤할 수 없다.
사형 언도를 받고 대기 중인 사형수도, 자기 수형번호가 불리어지면 털썩 주저앉고 만다.
자신의 삶을 후회 없이 살아오지 않고서는, 죽음을 그렇게 덤덤하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할 부담을 가지고 있기에, 그 앞에 서는 것을 하루라도 미루고 싶은 게 사실이다.
그런다고 아주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보면 생명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해서 문제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이 연명시키는 것은 더 문제다.
웰빙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웰다잉이다.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이 좋은 것이다.
잘못 살아온 사람이 잘 죽을 수 없고, 잘 죽지 못한 사람은 잘못 살아온 것이다.
우리는 잘 죽기 위해 잘 살아야 한다.
잘 죽어야 영원히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서 변호할 기회를 줬는데도 침묵하는 예수님에 대해, 빌라도는 이해되지 않았다.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그래도 빌라도는 어떻게든지 예수님을 놓아주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한테 덕 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총독으로서 죄없고 힘없는 한 사람을 억울하게 십자가 형을 언도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마침 좋은 전례가 생각났다.
그건 명절에 총독이 무리의 청원이 있을 시,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였다.
총독이 임의로 놓아주는 것이 아니라, 무리의 청원이 있을 때다.
마침 유월절 명절이다.
빌라도가 좋은 카드를 생각해 낸 것이다.

-빌라도는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누가 봐도 예수님에 비해 훨씬 죄질이 나쁜 죄수를, 예수님하고 비교를 시키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된 사람이 바라바였다.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바라바는 보통 죄수가 아니다.
좀 도둑이 아니다.
바라바 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죄수다.
악명 높은 죄수로 이해할 수 있다.
바라바가 사형을 언도받고 대기 중이었다면, 반란을 음모했던 사람이 아닐까 싶다.
빌라도 총독이 보기에, 바라바는 여지없이 사형감이다.
흉악범이다.
악명 높은 죄수다.

-그래서 바라바와 예수님을 군중들 앞에 세웠다.“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빌라도는 무리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둘 다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설명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종교지도자들의 시기로 넘겨진 예수님과, 유명한 죄수 바라바가 무리의 선택을 받기 위해 한 자리에 세워졌다.
때로는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가진 자들 눈 밖에 나면, 생사람 잡는 일이 흔했다.

-빌라도는 자신의 지혜에 만족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바라바와 그리스도라는 예수를 비교시킨 것은, 탁월한 아이디어란 생각이 들었다.
무리가 바보가 아닌들 예수를 선택할 게 뻔해서였다.

-총독은 잠시 자리에 앉았다.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처음에 판단하기로 별 대수롭지 않는 재판으로 여겼다.
예수님에게서 사형은커녕 특별한 죄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재판이 복잡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총독의 심신은 피곤해졌다.
그래서 잠시 자리에 앉았다.

-그 때 한 사람이 총독에게로 왔다.
총독의 아내가 보낸 사람이었다.
그가 사모님의 부탁이라며, 총독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빌라도가 전날 골치 아픈 재판을 앞두고 있다고 부인한테 말했던 모양이다.
“무슨 재판인데요” 물었을 거고, 예수님 얘기를 해주었을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빌라도의 아내가 그날 밤에 예수님 꿈을 꿨다.
빌라도의 아내의 꿈에 나타난 예수님은, 한 마디로 옳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남편이 이 재판에서 손을 떼기를 바랐다.
혹이라도 재판을 잘못하여, 옳은 사람을 죄인으로 판결하여 사형이라도 당하면, 큰 문제가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급히 사람을 보냈던 것이다.
사람을 보내놓고도, ‘이미 판결을 내렸으면 어떻게 하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그 사람이 도착했을 때,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
빌라도는 아내가 보낸 사람에게, “그래 알았다”며 돌려보냈다.

-재판정 아래는 소란스러웠다.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빌라도는 아내의 부탁까지 더해지자, 예수님이 무죄라는 확신이 더 강해졌다.

-그러나 재판정 아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갑작스런 빌라도의 제안을 예상하지 못했던 종교지도자들은 당황했다.
그래서 아내가 보낸 사람과 잠시 얘기를 나누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종교지도자들이 무리를 선동했다.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는 죽이자 하게 하자”
생각 없는 무리들은 종교지도자들의 선동에 넘어갔다.
지도자들은 이처럼 생각 없는 무리를 잘 활용해먹는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우민화정책을 쓰기도 한다.

-우리는 정치인 수준을 욕할 필요가 없다.
정치인이 누구 수준에 맞추겠는가?
국민들 수준에 맞춘다.
그들이 국민을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그들로 하여금 우습게보도록 만들었다.
정치인들에게 수준을 높일 것을 요구하기 전에, 국민 수준을 높일 필요가 있다.
국민 수준이 올라가면, 정치인들의 수준이 변할 수밖에 없다.
정치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 삶의 작은 부분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

-총독은 무리들을 조용하게 한 후 물었다.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내심 예수님을 놓아주라는 대답을 기대하고 물었다.“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바라바로소이다”

-무리들은 옳은 사람이 아닌 유명한 죄수를 선택했다.
그들이 보기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편들고 있고, 종교지도자들은 바라바를 편들고 있다.
무리에게 빌라도는 점령군 사령관이다.
종교지도자들은 그래도 자기 지도자들이다.
무리들은 빌라도를 편들 수 없다면, 그래도 자기 지도자들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진영논리가 참 무서운 것이다.
지도자들은 옳고 그름보다 진영논리로 몰아가기를 좋아한다.
옳고 그름 앞에서는 생각이 필요하다.
진영 논리 앞에서는 생각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이미 어떤 진영에 서있기 때문이다.

-무리들은 처음부터 종교지도자들 진영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라바를 선택했다.

-빌라도는 혼란스러웠다.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자신의 예상과 기대를 크게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빌라도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다시 물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예수님이 큰 죄인이라면 사형시키면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한 번 더 물은 것이다.

-무리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빌라도를 더 곤혹스럽게 했다.“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가?
빌라도는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더 나아가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언성을 높였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아니 예수가 무슨 악한 일을 했다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란 말인지, 그 이유나 좀 알자는 물음이다.
그들이 무슨 이유를 댈 수 있겠는가?
종교지도자들이 입에 넣어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그렇게 말하는 무리의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빌라도는 무리의 함성에 흠칫 놀랐다.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사실 빌라도가 두려워하는 것은 민란이다.
자기 통치 구역에서 민란이 일어났다고 하면 자기는 끝장이다.
바로 황제에게 소환당하여, 총독 직에서 파면 당하게 된다.
아무 성과도 없이, 민란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예수님을 편들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는 어떻게든 옳은 사람을 십자가형에 처한 총독이라는 오명만은 벗고 싶었다.
그래서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다며 손을 씻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무죄로 봐주지 않았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빌라도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빌라도는 무리를 향해 한 마디 던졌다.“너희가 당하라”

-무리는 빌라도의 “너희가 당하라”는 말에, 바로 화답했다.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멘한 것이다.
무죄한 피를 흘린 사람을 향해, 하나님은 피 값을 묻는다.
피 흘린 자가 개인이든 단체든 반드시 심판을 하신다.
그런데 그들은 그 심판을 자신이 더 나아가 자기 자손들도, 기꺼이 받겠다는 용감한 고백을 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몰라서 그랬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기억해두셨다가, 그대로 갚으셨다.
그들은 주후 70년에 로마로부터 완전히 멸망당하고, 그 후 세계 각지로 흩어져 끝없는 유랑을 하다, 1948년에 독립을 했다.
세계2차대전 후 히틀러에 의해 600만 명이 학살을 당하기도 했다.

-하나님 심판 무시하면 안 된다.
저주 함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아멘한 대로 된다.

-빌라도는 불의에 굴복하고 말았다.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그래서 무리들 아니 종교지도자들이 원하는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었다.
자기의 자리를 지켜보겠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었지만, 그는 총독의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그는 황제에게 본국으로 소환 도중에 자살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본디오 빌라도는, 오늘도 그리스도인의 입에 불명예스럽게 오르는 내리는 이름이 되었다.

-빌라도는 민란이 두려워 자기 자리를 보전하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었지만, 예수님은 부활 승리하셨다.
모든 불의를 이기고 승리하셨다.
이 땅에서 불의가 정의를 잠시 이길 수 있다.
그러나 끝내는 정의가, 하나님의 공의가 승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