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74:뉘우침만으로는 부족합니다.(마 27:1-10)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01-28 00:00
조회
870
마태복음 강해 74뉘우침만으로는 부족합니다.(마 27:1-10)2018. 1. 28. 프롤로그

-2008년 10월 목사 안수식이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교단의 이 안수식에서는 일명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이근안 씨가 목사가 되었다.
그는 1985년 9월 김근태를 당시 안기부로 끌고 가, 이십 여일간 물고문과 전기고문, 구타 등으로 잔인하게 고문하여, 그 후유증으로 각종 질병을 앓다가 사망케 하고, 또 다른 사람을 반신불수에 이르게 한 것을 비롯한, 여러 건의 고문전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수배를 피해 도망 다니던 시절,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7년의 교도소 복역 중 신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회개했다고 하여, 목사안수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목사가 된 후 언론인터뷰와 간증 등을 통해,‘자신은 고문 기술자가 아니라 심문 기술자이며, 고문은 하나의 예술이었다, 고문은 곧 애국이었다, 그 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할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등, 자신의 과거를 합리화하는 주장을 반복하였다.
그의 발언으로 사회적 공분이 일자, 그에게 안수를 준 합동개혁 측은 2012년 징계위원회를 열었다.
거기서 ‘다른 사람들보다 수백 배 더 조심하고 낮아지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함에도, 지난 행위를 미화하면서, 또 다시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밝히며, 이근안 씨의 목사직을 면직, 제명 처리하였다.
그는 목사직을 잃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목사라고 소개하며 같은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한국교회는 또 다시 사회로부터 원색적인 비난을 받아야 했다.
다른 건 놔두고라도, 회개도 제대로 안 한 사람을 덜컥 목사로 세웠으니, 열 번 비난 받아 싸다.
교회 스스로가 제 무덤을 판 격이다.
아니 어떻게 회개도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을, 목사로 세울 생각을 했는지, 뇌구조가 의심스러울 뿐이다.

-우리가 잘못 사용하는 용어 중에 하나가 “회개”이다.
회개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 보면, 잘못을 뉘우치고 고침으로 풀이 되어 있다.
한자사전에 봐도 뜻이 동일하게 풀이 되어 있다.
회개는 한자로 뉘우칠 회(悔)에 고칠 개(改)자를 쓴다.
자구적인 풀이를 해도, 뉘우치고 고침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뉘우치기만 하고 고치지 않는다면, 온전한 회개가 아닌 것이다.
여기서 온전하다는 말이 중요하다.
뉘우친 것도 부분적인 회개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어떤 분이 “오늘 예배 때 설교을 듣고 많이 회개했습니다.” 했다면, 그건 부분적인 회개이지 온전한 회개는 아니다.
온전한 회개는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잘못을 고치는 것이다.

-사실 설교를 들으며 마음을 고쳐먹는 사람도 많지 않다.
대개는 그냥 지나간다.
고개만 몇 번 끄덕이고 지나간다.
눈 지그시 감고 있다 보면 끝나고 만다.
좀 졸다가 정신차려보면 어느 새 마치고 기도한다.
설교를 들으며 잘못을 인정하고 가슴을 치는 사람은 소수이다.
이게 우리 예배의 현실이다

-하긴 마음을 고쳐먹은 사람이 소수라도 있다면 그게 어딘가?
그럼 마음을 고쳐먹은 사람이, 맘먹은 바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정말 극소수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뉘우침과 회개의 차이를 정리해 보자.

-뉘우침은 죄보다 죄에 대한 징계를 더 무서워하고, 회개는 죄에 대한 징계보다 죄 자체를 더 무서워한다.
우리는 어떤가?
죄보다 죄에 대한 징계를 더 무서워하는가?
죄에 대한 징계보다 죄 자체를 더 무서워하는가?

-뉘우침은 죄를 깨닫고 가책이 되어 자기 속으로 들어가고, 회개는 죄를 깨닫고 부끄럽지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어떤가?
죄를 깨닫고 가책이 되어 자기 속으로 들어가는가?
죄를 깨닫고 부끄럽지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가?

-뉘우침은 죄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피하려고 하고, 회개는 죄의 결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려고 한다.
우리는 어떤가?
죄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피하려고 하는가?
죄의 결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려고 하는가?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셨다.
처음엔 가룟 유다도 그 자리에 참석을 했다.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여기에 자신을 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셨다.
그에게 망신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를 제자 공동체에서 매장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를 사랑하셨기에 마지막까지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회개할 마지막 기회를 걷어차고, 밖으로 뛰쳐나가버렸다.
그리고는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을 찾아가 만났다.

-예수님은 열 한 제자와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려 가셨다.마 26: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은 좀체 드러내지 않았던 심경을, 세 제자 앞에서 밝히셨다.
자신 앞에 놓인 고난의 잔을 피할 수 없음을 아셨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것을 아셨다.
그 십자가를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대신 질 수 없다는 것 또한 아셨다.

-그랬기에 목숨을 연장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다.
고난의 잔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지 않으셨다.
“나의 원대로 하지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렇다고 주님이 십자가만을 위해서 기도했을 거 같지 않다.
물론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그 집중력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자기를 팔러간 가룟 유다가 눈에 아른 거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위한 기도도 건너뛸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여 가룟 유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는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애쓰고 힘써서 기도하는 시간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잡으려는 무리들과 함께 예수님께로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파멸의 길로 몰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은, 자신을 잡으려고 오는 일행들을 기다리고 계셨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들은, 예수님을 확실하게 잡기 위해 가룟 유다를 앞세우고 왔다.
아무리 횃불을 들고 오긴 했지만, 혹시라도 엉뚱한 사람을 잡을 수도 있기에, 현장에서 군호를 짰다.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그리고는 태연하게 예수님께 다가가 인사를 하며 입을 맞췄다.“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예수님은 그의 거짓된 인사를 받지 않으셨다.
그리고는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하셨다.
그걸로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영원한 결별이었다.

-유다는 한 때는 재정을 맡았던 제자였다.
넉넉한 살림살이라면 재정도 맡을만하지만, 제자 공동체의 재정은 그렇지 못했다.
재무에 밝은 전직 세리인 마태가 있었음에도, 유다에게 재정을 맡기신 것을 보면, 그 역시 계산에 능하고 관리능력도 뛰어났던 모양이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체포되어 대제사장에게로 끌려가셨다.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그곳에는 이미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이다.
그 새벽에 그 바쁜 양반들이,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모였다.
참 대단한 열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희한하게도, 살리는 것보다는 죽이려고 하는 것에, 더 열정이 있는 거 같다.
누구 살리려고 하는데 모이라고 했다면, 그 새벽에 그들이 모였을까 싶다.

-어떻게든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한다.
어떻게든 사람을 살리는데 앞장 서야 한다.
그게 내가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죽이는 데 앞장 선 사람은, 자기에게도 죽는 길이 열린다.
다른 사람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해놓고, 자기는 기쁨의 눈물 흘리는 것을 기대해선 안 된다.

-예수님을 죽이겠다고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보라.
다른 사람이라면 또 모른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종이고, 장로는 백성의 대표이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양을 잡아서 사람 살리는 일을 해야 할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잡으려고 한다.

-장로는 백성을 대변해주는 사람이다.
힘없고 빽없는 백성의 권익을 대변해 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힘 있는 종교지도자들의 대변자가 되어, 힘없고 빽없는 백성의 지지를 받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

-그들은 용감하게 예수님을 잡아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쥐도 새도 모르게 헤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의논했다.
‘어떻게 예수님을 잘 죽일 수 있을까?’
‘어떻게 예수님을 뒤탈 없이 죽일 수 있을까?’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았다.

-일단 예수님을 총독에게 넘기기로 했다.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그들이 총독을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그건 자기들에게 예수님을 사형시킬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로마는 자신들이 정복한 피지배민족들에게 비교적 관대했다.
그들의 종교에 대해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단지 사형에 대해서만은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들은 평소 총독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서는 총독을 끌어들이고 있다.
덕분에 실제로는 자기들이 예수님을 죽여 놓고, 그리스도인들의 입에서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해서, 빌라도에게 다 뒤집어씌우고 자기들은 쏙 빠졌다.

-이 무렵 가룟 유다는 뭐가 잘못 돼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긴 의미를, 유다는 뒤늦게 알았다.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겼다는 말은, 예수님이 공회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것이고,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사형으로 몰아가겠다는 의미였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종교지도자들에게 은30에 넘겼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을 죽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잔뜩 기대를 했지만,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자 메시야로서 능력을 발휘하도록, 극단의 상황으로 몰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결박을 당하여 빌라도 앞에 끌려온 것이다.

-한 때는 자기의 희망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따랐던 스승이었다.
그런데 결박을 당한 채, 죄수의 몸으로 총독 앞에 넘겨졌다.
유다는 가책이 되었다.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아 뉘우쳤다.
‘어, 이게 아닌데...’
‘야 이거 뭐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내가 계산을 잘못한 건데...’
‘아이 참 내가 왜 그랬지? 내가 그 때 왜 그런 판단을 했지?’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그때 그의 머리에 불현 듯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빨리 종교지도자들을 찾아가서 계약을 물려야겠네...’
그는 그 상황을 어떻게든 되돌리고 싶어서 순진한 생각을 했다.

-유다는 자기 손에 있는 은 삼십을 잠시 바라보다, 급히 종교지도자들에게로 달려갔다.
가면서 몇 번이고 뉘우쳤다.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른 자신에게 너무나 후회가 됐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이 예수님을 판 대가로 받았던 은 삼십을, 그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외쳤다.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유다는 너무나 마음이 아파 진심을 다했다.
유다의 말을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다. “내가 죄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나는 죄인입니다.”
그는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대제사장 앞에서 행한 일종의 가룟 유다의 고해성사였다.

-하지만 그의 고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에게 돌아온 말은, 상처 난 마음에 소금을 치는 매몰찬 말이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역시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다.“우리가 알 바 아니다.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여라”
그들은 모든 책임을 가룟 유다에게 떠넘겼다.

-처음에 유다를 회유할 때는, 그냥 예수를 잡는 데 도와달라고 했었다.
예수에게 조사할 게 좀 있으니까 협조해 달라고 했을 거 같다.
“굳이 은 삼십을 안 줘도 된다”고 하니 “그래도 그러면 안 되고 성의 정도로 생각하고 받아두라”고 해서, 일단 받아둔 것으로 보인다.
지금에 와서 보면, 종교지도자들은 교활했고, 가룟 유다는 순진했다.

-종교지도자들이 아무리 회유를 했어도, 넘어간 가룟 유다의 잘못이 크긴 하다.
그가 무슨 변명을 하고, 어떤 항변을 해도, 자기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어떤 잘못된 일 앞에, 잠시 갈등은 할 수 있다.
너무나 돈이 필요한 상황인데, 누가 돈을 가져와서 회유할 때, 갈등이 왜 안 되겠는가?
사람이라면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는 게 당연하다.
갈등이 되고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는 것과,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산상수훈에 보면, 예수님이 율법을 재해석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그 중 일곱 번째 계명에 대해서다. 마 5: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마음에 음욕이 가득하면서도 신체적인 접촉이 없었다고 칠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도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엄격하게 해석하셨다.
그렇다고 마음의 간음하고 몸의 간음이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죄의 질이 다르고, 죄의 급이 다르다.
그에 따른 회개도 다를 수밖에 없다.

-가룟 유다에게 전혀 동정이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가룟 유다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가룟 유다의 마음에 마귀가 예수 팔 생각을 넣었다고 했다.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가룟 유다의 마음 관리가 안 된 부분이 있었다.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였다면, 마귀가 접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예수님과의 관계에 약간의 틈이라도 보이면, 마귀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수 있다.
내 마음의 자리를, 누가 무엇이 차지하고 있는지를, 매순간 점검할 필요가 있다.
내 마음의 자리를 마귀에게 내주는 순간, 우리는 가룟 유다처럼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지금 무너지지 않았다고 안심할 일이 아니다.
마귀가 던지는 낚시 바늘에, 언제라도 걸려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유다가 종교지도자들을 찾아가 거래를 무르자고 했으나 소용 없었듯이, 우리와 마귀와의 거래도 마찬가지다.
그 때 마귀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이렇다.“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우리가 알 바 아니다.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여라”

-우리는 마귀 탓할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마귀 핑계 대서는 안 된다.
인류의 첫 번째 사람이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타자의 핑계를 댔다.
아담은 하와를 핑계 댔고, 하와는 뱀을 핑계 댔다.
그러자 에덴동산은 실낙원으로 바뀌고 말았다.

-우리는 오답노트 정리를 잘 해야 한다.
하나님의 책망에 대해 이렇게 답했어야 한다.
“모든 잘못은 나한테 있습니다.”
“이건 전적으로 내 잘못입니다.”
그렇게 나오는 사람을 마귀는 다시 건드리기 힘들다.
그렇게 되기 전에 내 마음의 자리를 다른 것에 빼앗기지 않도록 잘 지키자.

-유다는 종교지도자들을 찾아오면서, 번복이 쉽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거다.
은 삼십을 주고받은 엄밀한 계약이었다.
그런데 그걸 파기하는 게 쉽겠는가?
그럼에도 종교지도자들이 그렇게 심하게 나오는 것을 보며, 끓어오르는 성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 버리고 뛰쳐나왔다.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그는 은 삼십을 놓아버렸다.
하지만 예수님을 판 죄로부터 놓아지지는 않았다.
자신이 예수님을 팔았다는 양심의 가책까지 놓아지지는 않았다.
애초에 은 삼십을 잡지 않았어야 했다.
은 삼십으로 악마와의 거래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유다는 성소에서 나왔으나 갈 곳이 없었다.
평생 예수 판 제자라는 주홍글씨를 이마에 새기고는,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그는 힌놈 골짜기를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는 내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후회의 눈물이요, 때늦은 뉘우침의 눈물이었다.

-그는 힌놈의 골짜기 어디에선가, 스스로 목을 매고 말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진심으로 회개하지는 않았다.
그런 못난 행동을 한 자신을 미워했다.
그리고 미련 없이 죽음을 선택했다.
그런 가룟 유다가 베드로에 비해, 남자다워 보일 수 있다.
자기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죽음으로서 속죄한 것처럼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그건 남자다운 것도 아니고, 죽음으로 속죄가 되는 것도 아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죄의 무게로 따지면, 가룟 유다와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성경의 평가는 다르다.
베드로는 위대한 사도로 평가받고, 가룟 유다는 영원한 배신자로 평가 된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비슷한 죄를 지었는데, 왜 평가는 이처럼 나이가 날까?
대관절 무엇이 한 사람은 위대한 사도가 되게 했고, 다른 한 사람은 배신자의 아이콘이 되게 했을까?

-그게 회개와 뉘우침의 차이다.
회개한 베드로는 위대한 사도로 재탄생했고, 뉘우친 가룟 유다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뉘우침만으로는 부족하다.
회개로 나아가야 한다.
뉘우침은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께 그리고 자신에게 타인에게 하는 것이다.
뉘우침은 지적이고 심적인 것이다.
회개는 지적이고 심적인 것에서, 더 나아가 행동적인 것이다.
행위의 변화가 따르지 않는 회개는, 온전한 회개가 아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부분적인 회개에 그칠 때가 많다.
회개의 시늉만 내다가 말 때가 다반사다.
때로는 뉘우침에도 못 미칠 때가 있다.
일단 죄를 부인하고 끝까지 숨기려고 한다.
그래도 가룟 유다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누가 지적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죄를 뉘우쳤다.
그렇다면 죄를 부인하고 끝까지 숨기려고 하는 자들은, 심하게 표현하면 가룟 유다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도 그 중 한 사람이다.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얼마나 그럴듯한가?
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못했다.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지키는데 방해가 된다면, 하나님의 아들조차도 죽이고자 했다.
그리고도 겉으로는 거룩을 내세웠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지만, 실제로는 가룟 유다보다 못한 사람이었다.
우리라고 예외는 아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고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제 이의 제 삼의 가룟 유다가 되고 말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은 가룟 유다가 던지고 간 은 삼십의 사용처를 두고, 잠깐 의논을 했다.
그래서 나그네의 묘지를 구입하는 것으로, 그럴듯한 결론을 내렸다.
헌금으로 잡을 수 없으니, 대신 자선이나 구제의 용도로 쓰자는 식으 결의를 한 것이다.

-본래 헌금은 깨끗한 돈으로 해야 한다.
깨끗하게 번 돈, 정당한 노동을 통해 번 돈으로, 헌금을 해야 한다.
뇌물이나 불의한 방법으로 번 돈으로 헌금을 하면, 교회에서는 모르니까 받겠지만, 하나님은 받지 않으신다.
자신의 생업을 주의 일이라고 생각하라.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일이라고 여겨라.
그렇게 번 돈은 깨끗할 수밖에 없고, 그 깨끗한 돈으로 헌금할 때,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

-예수님의 핏값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는 것은, 이미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된 말씀이기도 하다.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액수가 은 삼십이고, 밭 임자가 토기장이라는 것까지 예언된 것이 놀랍기만 하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무조건 믿을 수 있다.
사람의 말은 조석변개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불변이다.
올해도 말씀을 믿고 따르기를 기뻐하는,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