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73:당신은 하나님 편에 선 사람입니까?(마 26:47-68)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18-01-21 00:00
조회
1220
마태복음 강해 73당신은 하나님 편에 선 사람입니까?(마 26:47-68)2018. 1. 21. 프롤로그

-유럽에 가면 도시마다 중세 성주들이 살던 웅장한 성이 있다.
그 성의 중심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던 채플(chapel)이 있다.
당시 성주들은 자기의 세력을 확장하느라 자주 전투를 치렀다.
그럴 때면 그들은 먼저 승리를 기원하는 예배를 드렸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 편을 들어주실까?
강자 편일까? 약자 편일까?
기도를 많이 한 자 편일까? 적게 한 자 편일까?
그것도 아니면 이긴 자 편일까?

-지난해 12월 첫째 주 월요일 영남지역목회자 축구대회에 다녀왔다.
지진 여파로 참석한 선수가 부족하여, 열심히 뛰었지만 준우승에 그쳤다.
경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상대편 선수들과 인사를 한다.
그리고 추첨을 통해 진영이 결정되면, 둥그렇게 모여서 파이팅을 외친다.
그런데 어떤 믿음 좋은 목사님이 “자, 기도해요. 기도해야 이겨요” 라고 해서, 거기서 누가 “에이 하지 마요” 할 수 없어서, 웃음을 참고 기도를 했다.
기도해서 이긴 경기도 있었고, 진 경기도 있었고, 비긴 경기도 있었다.
상대팀도 목사님들인데, 괜히 하나님 곤란하게 해드린 게 아닌가 싶었다.

-하나님은 누구 편이 되실까?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의 편이다.
하나님 뜻대로 사는 자의 편이다.
이런 사람의 기도는 다르다.
자기 욕심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그 뜻대로 살아간다.

-재미교포 청년 자매가 미국의 외교관 시험에 응시했는데, 어려운 필기시험에 무사히 합격했다.
마지막 관문으로 면접시험을 보는데, 면접관들 앞에 앉아서 이런 저런 질문을 받았다.
그러던 중 아주 난감한 질문을 받게 되었다.
“당신은 한국계 미국인인데, 혹시 외교관이 되어서 미국과 한국의 국익이 상치되는 경우에 봉착하면, 어느 편에 서서 일하겠습니까?”

-그때 그 자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저는 한국 편에 서서 일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미국 편에 서서 일하지도 않을 겁니다. 저는 크리스천으로서 정의의 편에 서서 일할 것입니다....그것이 미국과 한국의 국익을 동시에 충족시킬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 자매는 합격했다.
얼른 생각하면 미국 편에 서겠다고 하여, 면접관 비위를 맞추면 좋을 듯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정의 곧 하나님 편에 서겠다고 대답했을 때, 오히려 면접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쉽지는 않다.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 자매는 면접에서 떨어질 각오를 하고, 그렇게 대답했을 거다.
평소 생각하고 있던 바를 대답했던 것이다.
평소 가지고 있던 신앙적 가치관을 따라 대답했던 것이다.
그게 면접관들을 감동시켰고, 직책을 잘 감당하리라는 믿음을 주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국경도시인 펠드리히 시가, 나폴레옹 군대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유럽을 휩쓸던 프랑스군대가 그 도시를 공격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고지에서 진지를 구축한 채 명령을 기다리고, 펠드리히 시로 쳐들어갈 때였다.

-이 때 펠드리히 시 의회는 비상회의를 소집하여서, 서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쟁을 하고 있었는데...
‘싸우다가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굴욕적이긴 하지만 항복하고 피해를 최소화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 때 그 회의에 참석한, 그 도시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목사님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예정대로 종을 치고 예배를 드립시다. 우리 힘으로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 나머지 일은 맡기고 예배를 드립시다.”

-그래서 각 교회당마다 종소리를 우렁차게 울리고 예배를 드렸다.
나폴레옹 군대는 그 종소리를 듣고 지원군대가 온 것인 줄 알고, 공격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서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펠드리히 시 사람들은, 예배드리면 하나님이 나폴레옹으로부터 구원해주실 거라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은 부활절이니 당연히 예배를 드렸을 뿐이다.
그런데 나폴레옹 군대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계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 편에 섰을 때, 얼마나 이득을 보고 얼마나 손해를 보느냐를 주판알 튕기지 않는다.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 희생까지도 각오할 뿐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은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그는 노예해방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동족끼리의 전쟁도 감수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무엇보다 기도의 사람이었다.
1861년부터 65년까지 미국은, 남북전쟁으로 당시 인구의 3%에 해당하는 103만명의 사상자를 냈고, 전사자만도 62만명에 달했다.
처음에는 링컨이 속한 북군이 남군에게 맥없이 밀렸다.
남군에 있는 로버트 리 장군 때문이었는데, 그는 아주 탁월한 전략가였다.
그래서 계속 북군을 괴롭혔고, 남군은 여러 전투에서 북군에 승리했다.

-보좌관 중에 유머를 잘하는 사람이, 이렇게 대통령에게 말했다.
"대통령님, 요즈음 하나님께서 곤란하실 것 같습니다. 북쪽에서는 북쪽이 승리하도록 열심히 기도하고, 남쪽에서는 남쪽이 승리하도록 열심히 기도하니, 하나님이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고, 누구 편에 서야 하실지 난처하실 것 같습니다."

-링컨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나님이 난처하실 것 하나도 없지. 하나님이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누구의 편에 서는가가 문제가 아니고, 누가 하나님 편에 서는가가 문제일세. 하나님 편에 서는 편이 반드시 승리할 것일세."

-링컨은 이 전쟁에 승리하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암살당했다.
노예제도 폐지를 주창하면서, 늘 암살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링컨은 평소에 이렇게 말해왔다.
“만약 내가 암살자의 손에 죽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는 분명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때까지 ‘나의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길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선 자는, 하나님 뜻만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 의무를 다한다.
나머지에 대해서는 하나님 맡긴다.
내 일에 최선을 다한 후에, 결과는 하나님께 맡긴다.

-그런 사람은 슈몰크 목사처럼 고백할 수 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선 자라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말씀이 있다.약 4: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사는 것만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다.
사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잘 살면 된다.
죽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잘 죽으면 된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이다.

------------------------------------------------

-예수님은 세 제자를 따로 데려가면서,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밝히셨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예수님 역시 인간의 몸을 입으셨기에 고민이 깊으셨다.
십자가를 지는 게 사명인줄 알지만 고민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생명이냐 사명이냐의 고민은 누구에게든 있을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사명이 생명보다 중요하다.
사명을 위해 생명이 존재한다.
하지만 막상 사명과 생명, 이 둘 사이에 서면 고민이 된다.

-그렇다고 주님이 고민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도의 자리로 나가셨다.
이게 중요하다.
사명 앞에 고민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 앞에 고민할 수 있다.
문제는 고민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고민하며 기도해야 한다.
고민을 안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철저히 자기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붙잡으셨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피땀 흘려 기도하셨지만, 제자들은 피곤을 이겨내지 못했다.
무거운 눈꺼풀을 감당하지 못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동안에,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부탁을 받았지만, 그들은 졸다 잠이 들고 말았다.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는, 책망을 듣고도 몸을 가누지 못했다.
기도해야 할 때, 자기 의지만 믿고 기도하지 않아서였다.

-예수님의 기도가 끝나자 가룟 유다가 다가왔다. 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타이밍이 기가 막히다.
하나님은 타이밍 조절의 귀재이시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중에, 그들이 들이닥쳐 예수님을 체포했다면, 영 폼이 안 날 뻔했다.
예수님이 기도를 마치고, 제자들에게 당부를 마친 후에, 그들이 들이닥쳤다.
비무장한 주님을 잡으려고,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다.
예수님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큰 무리가 왔다.
성전경비대가 총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은 삼십에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를 이렇게 지칭한다.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
욕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끝까지 열둘 중의 하나였다고 해준다.
그가 비록 지금은 종교지도자들 편에 가담하여 있지만, 본래는 예수님 편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걸 상기시키고 있다.
여기에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녹아 있다.
얼마 전까지 자기를 따라다니던 제자가, 종교지도자들의 앞잡이가 되어 자신을 잡으려고 왔을 때, 예수님은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그의 영혼을 생각하니, 너무나 너무나 안타까우셨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다는 자기 일을 했다.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군호를 현장에 와서야 짰다.
그들이 일을 얼마나 급하게 진행했는지를 알 수 있다.
사실 종교지도자들 입장에서는 애가 탔다.
시간이 지날수록 입술이 타들어갔다.
그래서 명절을 앞두고 시간적으로 무리인줄 알면서도, 일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다.

-겟세마네 동산에 예수님과 제자 열한 명 밖에 없었다.
누가 예수님일지 알아볼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굳이 유다가 군호를 짰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대낮이 아니다.
아무리 횃불이 있지만 식별이 쉽지 않다.
베드로가 예수님인줄 잘못 알고 잡으려고 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대충 짐작이 된다.

-유다는 천연덕스러웠다.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유월절 식사 때 자리를 박차고 나갔던 그였다.
그런 그가 예수님한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인사를 건넨다.“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그리고는 예수님께로 다가와 입을 맞췄다.
군호를 짠 그대로 행했던 것이다.
군호를 통해 자신들이 잡아야 할 예수가 누군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급히 서두를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비무장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유다를 뚫어져라 쳐다보시며, 사실상 그에게 마지막 말씀을 하셨다.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그를 친구라고 부르셨다.
배신자를 향해 친구라고 부르셨다.
배은망덕한 자를 향해 친구라고 부르셨다.
자신을 향해 친구여 할 때, 유다의 양심이 요동쳤을까, 아니면 미동도 없었을까?
미동도 없었다면, 화인 맞은 양심이었을 것이다.

-유다는 더 이상 예수님을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그 때 무리들이 예수님한테 나아가 붙잡았다.

-그 때 갑작스런 일이 일어났다.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예수님의 제자 중 칼을 준비했던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 떨어뜨린 것이다.
너무나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모든 일이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예수님이 순순히 체포에 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불상사가 일어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러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잘못하면 제자들도 다 끌려가게 된다.
이건 전혀 예수님이 원하시던 그림이 아니다.

-예수님은 서둘러 사태를 진화하셨다.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그 제자 입장에서는 억울할 일이다.
전에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눅 22:36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검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준비하라고 하셨다.
그 제자는 ‘검을 준비하란 것이 바로 이 때를 위함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칼을 휘둘렀다.
너무나 순간적으로 일어났기에 누가 말릴 틈도 없었다.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성전경비대는 흥분했고, 칼을 휘둘렀던 제자는 움찔했다.
이 때 예수님의 태도가 중요했다.
예수님이 그 상황에서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상황이 진전될 수도 있고 악화될 수도 있다.

-예수님은 칼을 휘두른 제자를 나무라셨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그리고 잘린 귀를 붙여주셨다. 눅 22:50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예수님은 무력해서 잡히신 게 아니다.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예수님께는 어떤 군대보다 강력한 군대를 갖고 계셨다.
하늘의 천군이었다.
예수님이 원하시면, 열두 군단 더 되는 천군을 부르실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자인가를 보여줄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뜻을 보여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하나님 편에 선 자의 삶이다.
이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내가 힘이 없다면 참을 수 있다.
아니 참을 수밖에 더 있겠는가?
하지만 내가 힘이 있는데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참아야 할 때가 있다.
내가 힘이 있는데도, 교회의 덕을 위해 참아야 할 때가 있다.
그게 하나님 편에 선 자의 삶인 것이다.

-예수님이 12군단이 되는 천군천사를 동원할 수 있었지만 참으셨던 이유가 나온다.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하나님을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무력해서도 아니고, 숙명으로 받아들여서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만약에 예수님이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적극적 저항을 하고, 인간적인 충동으로 사태를 뒤집어엎었다면,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은 문제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늘 생명 걸어야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결정적인 순간이 있을 수 있다.
말씀을 지키기 위해 내 생명을 걸어야 할 수 있다.
아브라함 같은 경우는, 자기 생명보다 더 큰 것을 걸어야 했다.
바로 자기 아들을 희생 제물로 드려야 했다.
하나님이 급히 말리시지 않았다면, 그대로 드렸을 것이다.

-그게 하나님 편에 선 자가 갖춰야 할 삶의 태도이다.
하나님 편에 선 자는 환경이 아닌 말씀을 본다.
상황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잡는 무리들을 향해 한 마디 하셨다.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그들은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들도 자신들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죄를 물어서는 안된다고 할 수 없다.
그들 역시 암묵적으로 불의에 가담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 편이 아닌 종교지도자들 편에 서 있었다.
혹시 이들 중에도 훗날 회심하고, 예수님 편에 선 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넓은 길로 가기에, 좁은 길을 걸으신 예수님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적당히 살면 되는데...
적당히 넘어가면 되는데...
적당히 비위 맞추면 되는데....
말씀 앞에 이런 것이 안 된다.

-그렇게 살면 곁에 있던 사람이 떠나가기도 한다.“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이게 세상 인심이다.
예수님도 버림 받으셨다.
하나님의 뜻밖에 몰랐던 예수님,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걸었던 예수님인데도, 다른 사람도 아닌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자신만 잡고 제자들이 도망갈 길은 터달라고 하셨다.요 18: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아무리 예수님의 배려였다고 해도, 제자들은 체포되는 스승을 두고, 걸음아 날 살려라 꽁지가 빠지게 도망쳤다.
사람은 유불리를 따지길 좋아한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 선 자는, 그게 하나님의 뜻이냐를 따진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면 자기에게 불리해도 선택하고, 그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자기에게 유리해도 포기한다.

-예수님은 체포되어 종교지도자들에게 넘겨졌다.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섬기는 사람이었지만, 실제로 하나님 편에 서 있지는 않았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하나님의 뜻보다 앞세웠다.

-한참 도망치던 베드로가 되돌아왔다.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예수님을 두고 자기 살겠다고 어디까지 도망칠 수는 없었다.
예수님이 어떻게 되는지, 그 결말을 보려고 비록 멀찍이지만 예수님을 따라 갔다.
그래도 베드로다.
다른 제자들과는 격이 다르다.
나중에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지만, 그것은 다른 문제다.
예수님을 멀리 떠나 있으면, 부인할 일이 없다.
그렇다고 자기는 예수님을 부인한 적이 없다고 자랑할 수 있는가?

-예수님에 대한 결론은 이미 나 있다.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예수를 죽이려고”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결론이다.
미리 결론을 내 놓고 모든 것을 거기에 꿰맞춘다.
공회에서 심문하고 재판하는 것은 형식적인 절차다.
‘증거재판주의’라는 용어가 있다.
재판에서 사실의 인정은 증거능력이 있는 증거에 의하여 행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재판에 있어서 증거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
거짓 증인도 나타났지만 서로 엇갈렸고, 그래도 도움이 될 만한 증언을 확보했다.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유대인들에게 성전과 율법은 생명과 같다.
다른 거 다 건들 수 있어도, 그 두 가지만은 건들면 안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전에 대해 말했던 증언을 확보한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자백을 듣고자 했다. 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하지만 예수님은 침묵하셨다.
법적으로 묵비권이 보장된 시대가 아니었을 거 같은데.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하셨다.
급한 쪽은 종교지도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께 또 물었다.“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하나님께 맹세까지 시키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를 밝히라고 했다.
얼마 전까지도 침묵하시던 예수님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입을 여셨다.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그리고 묻지 않은 것까지 구체적으로 대답하셨다.
확실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맞다는 것이다.
후에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것과,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다.

-종교지도자들은 그 말을 들으며 한 마디로 기가 막혔다.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것으로 단정했다.
그들은 자기 옷을 찢으며 격분했다.
더 이상의 증인이 필요 없을 정도로 확실한 자백을 듣고는, 기세가 등등했다.

-그들은 모인 사람들을 향해 자신만만하게 물었다.66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이건 사실상 선동이지 재판이 아니다.
재판할 것도 없었다.
이미 사형판결의 각본을 짜놓고 진행했기 때문이다.
모인 무리들은 한 목소리를 외쳤다.“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이 아무 생각없는 사람들이 문제다.
고민 한 번 제대로 해보지 않았던 그들이다.
생각 없는 다수는 권력자들에게 이용만 당한다.
비록 소수라도 깨어 있으면 권력자들은 조심한다.

-생각없는 다수가 예수님께 어떻게 했는가 보라.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역시 그들은 생각없이 행동했다.
곁에 있는 다수의 힘을 믿고, 예수님께 침을 뱉기도 하고, 주먹으로 치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때리기도 했다.
또한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비아냥거렸다.
불과 며칠 전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환호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예수님 반대편에 서서,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이게 생각 없는 다수가 하는 행동이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 선 깨어 있는 소수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이 맞는가?
하나님 편에 선 자로서, 대가도 치를 준비가 돼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