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인물(아브라함) 강해 4: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창 13:1-9)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20-03-15 10:29
조회
921



구약인물(아브라함) 강해 4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창 13:1-9)
2020. 3. 15.


프롤로그

-아브람은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망신만 당하고, 결국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애굽의 바로가 잔뜩 화난 얼굴로, "네 아내 여기 있으니, 빨리 데리고 가!" 할 때, 아브람은 뒤도 돌아볼 수 없었다.
↳얼굴이 얼마나 화끈거리든지...

-아브람은 서둘러 애굽에서 빠져나왔다.
1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아브람은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잃었다.
↳바로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애굽에서도 아브람을 지켜주셨고, 매순간 그를 인도하셨다.
↳좀 이상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아브람과 함께 계셨는데, 아브람은 하나님을 잃었다니 말이다.
↳그러나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나님은 여전히 아브람의 하나님이다.
↳그 사실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다.
↳아브람은 애굽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신다는 것을 체험했다.
↳그러나 하나님과 아브람의 상태는 예전 같지 않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다.

-창세기 12장 10절의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는, 지리적으로 봐도 맞게 표현한 것이다.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가는 길은 내리막길이기 때문이다.
↳그건 동시에 영적인 측면에서도 내리막길이었다.
↳애굽에서의 아브람의 신앙은 내려간 정도가 아니라 추락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시작 부분에 회복의 기미가 보인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애굽을 떠난 아브람이 “네게브로 올라갔다”고 했다.
↳이 표현 역시 지리적으로 올라감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아브람의 신앙이 올라갈 것에 대한 전조이다.

-그가 어디로 올라가고 있는가?
3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하나님께 처음으로 제단을 쌓았던, 바로 그 곳에 이르렀다.
↳아브람이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만났던 자리로 올라갔다는 말이다.

-우리가 어쩌다 말씀을 놓쳤을 때,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말씀이다.
↳답은 처음 주님을 만났던 때로 돌아가야 한다.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던 상황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것은, 아내를 또 빼앗길까봐서가 아니다.
↳아내를 팔아 얻은 수많은 육축과 은금을 바로가 되돌려달라고 할까봐, 바로의 마음 변하기 전에 도망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 때문이었다.
↳놓쳤던 하나님을 다시 붙들기 위해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것이다.

-대개 다시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처음 자리로 내려가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그러나 다시 시작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다시 시작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이 되레 부끄러운 일이다.

-아브람이 장막을 친 이곳은, 그가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단을 쌓았던 곳이다.
창 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아브람은 처음 출발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순간부터, 다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부터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렸다.
↳아브람이 점점 남방으로 옮겨가면서, 그 이후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에게서 말씀이 사라지자, 그의 신앙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가 말씀을 듣지 못하자, 그는 영적인 파국을 맞고 말았다.
↳그에게 말씀이 없으니까, 그는 세상의 방법대로 살게 되었다.
↳그는 ‘아, 뭔가 잘못 됐구나! 내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구나!’를 깨달았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혹 요즘 하나님과의 관계에 이상이 온 것처럼 느껴지는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왠지 어색하고 서먹서먹한 거 같은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는 시간이 줄어들었는가?
↳하루 한 시간 기도하는 날보다 못하는 날이 더 많아졌는가?
↳그럼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할 때이다.
↳하나님이 말씀의 자리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아브람은 전 단을 쌓았던 곳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갔다.
↳그는 울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이다.
↳돌아온 탕자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렸을 것이다.
↳그 예배는 형식적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마음을 찢는 회개와 감격이 넘치는 예배였을 것이다.

-혹 하나님의 은혜를 잃은 채 살고 있지 않는가?
↳괜히 신경질만 내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 않는가?
↳모든 일에 의욕을 잃은 채 삶을 근근이 버티고 있지 않는가?
↳주님을 처음으로 만났던 때의 가난한 심령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시간 어린 아이 같은 심령으로 하나님을 붙들기 바란다.

-우리에게 예배의 회복 없이 신앙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
↳예배의 진정한 회복 없이, 삶의 회복을 바랄 수도 없다.
↳우리는 한 주간을 예배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한 주간의 삶의 자리에서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다가, 주일예배의 자리로 오는 것이다.
↳주일예배의 자리에서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 능력을 받아서, 다시 한 주간 삶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아브람은 제사를 드리며,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4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제단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을, 아브람이 기도한 것으로 보겠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두 가지가 필요하다.
↳이 두 가지가 신앙생활의 기본이란 말이다.

-첫째가 말씀이다.
↳말씀을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을 걸어오는 행위이다.’
-둘째는 당연히 기도이다.
↳기도를 말씀의 정의와 연관시켜 정의해 보면, ‘사람이 하나님께 말을 거는 행위이다.’

-아브람이 애굽으로 갔을 때, 말씀이 들리지 않았다.
↳말씀이 들리지 않은 동시에, 기도도 끊어지고 말았다.
↳기도가 끊어졌을 때, 아브람의 신앙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말았다.
↳아브람은 지금 자기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제단을 쌓고,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회복해야 하는 이유는, 기도의 회복 없이 신앙의 회복 없기 때문이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믿음 생활을 잘하려고 하는 것은, 요행을 바라는 것이다.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고, 정상적인 믿음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하루 한 시간을 기도에 투자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하루 한 시간 기도로 충분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루 한 시간은 개인 기도의 커트라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루 한 시간은 자기 영혼을 위한 기도의 최소한의 시간인 셈이다.
↳하루 한 시간 기도에 대해서는, 좀 율법적일 필요가 있다.

-물론 기도란 길이와 시간에 구애되지 않다.
↳아무리 짧은 기도라 해도,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클 수 있다.
↳아무리 긴 기도라 해도, 형식에 치우친 기도는 응답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하지만 주님은 잠자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막 14: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그리고 덧붙이신 말씀이 이것이다.
막 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요즘 하루에 얼마나 기도하는가?
↳기도해야 할 분량과 실제로 기도하는 분량에, 상당한 간격이 존재하지 않는가?
↳기도의 통장이 마이너스를 면치 못하고 있지 않는가?
↳기도는 할 수만 있으면, 길~게 오~래 할수록 좋다.
↳5시간 10시간은 못해도, 한 시간 정도는 지킬 필요가 있다.
↳하루 한 시간 기도는, 자기와의 싸움이고, 마귀와의 싸움이고, 세상과의 싸움이다.
↳신앙의 기본인 말씀과 기도를, 억척스럽게 붙들기를 바란다.

-아브람은 처음 단을 쌓았던 곳으로 돌아와, 하나님과의 서먹서먹한 관계를 복원했다.
↳그는 다시 말씀의 자리에 섰다.
↳다시 예배를 삶의 중심에 놓았다.
↳다시 기도를 우선 순위로 삼았다.
↳이렇게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브람의 앞에는 뜻하지 않았던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로 조카인 롯과의 갈등 문제였다.
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롯은 아브람에게 아들과 같은 존재이다.
↳아브람의 아버지인 데라는 롯을 가엾어 했을 것이다.
↳애비 없이 자라는 그가 불쌍해서, 우르에서 하란으로 이사할 때도, 특별히 롯을 챙겼다.
↳데라가 죽으면서, 아브람한테 롯을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아브람도 자기에게 아들이 없었던지라, 그를 아들처럼 여겼다.
↳아브람이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갈 때도, 애굽에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올라올 때도, 롯은 항상 아브람과 동행했다.

-아브람과 롯은, 꽤 긴 시간을 한 식구로 같이 지냈다.
↳그러나 서로는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둘의 꿈이 다를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우리는 그걸 전장인 12장에서 확인한 바 있다.
창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다.
↳하지만 롯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그냥 아브람과 함께 갔다.
↳그는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아브람을 따라간 것이다.
↳이 말은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언제든지 아브람과 헤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롯에게 어떻게 해서 재산이 생겨났는지는 모른다.
↳롯이 아브람의 가족이었다면, 그에게 따로 재산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야곱처럼 롯이 자기 몫으로 빼돌린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사람 좋은 아브람이 조카의 장래를 생각해서 따로 떼어준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한 집에 두 살림을 차린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아브람은 롯을 위한답시고 좋은 일을 했지만, 롯이 개인 재산을 소유한 것이, 둘 사이에 갈등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전에 이미 문제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분명히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집을 떠나라”고 했는데, 친척인 롯을 데리고 떠난 것이 잘못이다.
↳아브람의 부분적 순종이 낳은, 예견된 일인 셈이다.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애굽에서처럼, 즉각적인 징계가 있을 수도 있지만,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나타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당장은 괜찮아 보인다고, ‘뭐 괜찮겠지’ 하고 방심하면 안 된다.
↳말씀에 불순종한 후에 처음엔 조마조마하지만, 하나님의 채찍이 없으니까, ‘하나님도 건망증이 있으신가 보다’ 생각하는 것은, 위대한 착각이다.

-하나님은 롯을 아브람과 분리시키신다.
↳아브람이 보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반드시 롯과 헤어져야만 했다.
↳무슨 말인가?
↳결국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괜한 고집을 부릴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 억지를 쓰면, 괜히 관계만 악화될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소유가 많은 것은 두 사람의 갈등을 증폭시킨 이유가 된다.
6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베델과 아이 사이의 골짜기는 불어난 가축을 먹이는 데는 너무 비좁았다.
↳물이나 풀이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결국 돈이 탈이었고 재산이 문제였다.
↳아브람에게 물질이 없을 때도 시험이 왔고, 물질이 많을 때도 시험이 왔다.
↳물질이란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시험거리가 될 수 있다.
↳적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도둑질을 하기 쉽고, 많으면 하나님을 몰라보거나 교만해지기 쉽다.

-아브람의 재산이 많았다.
2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하지만 아브람에게 재산이 어떻게 생겨났느냐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래가 자기 아내임을 숨기고, 바로에게 신부지참금을 받고 판 결과로 생긴 것이다.
↳그럼 이것이 근로소득인가? 불로소득인가?
↳불로소득이다.
↳이게 문제이다.
↳그럼 롯은 재산을 아브람과는 다른 형태로 모았는가?
↳아니다. 아브람이 자기의 불로소득에서 조금 떼어줬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부를 얻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갑자기 생겨난 부를 관리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된 부자를 일명 졸부라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부 자체를 죄악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부정적으로 보지도 않는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는 한, 부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노동의 대가로, 부를 얻는 것이 죄가 될 수는 없다.
↳다만 부를 어떻게 관리하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죄가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도 있다.
↳바르게 벌어서 근사하게 사용하는 깨끗한 부자가 되기를 바란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아브람과 롯 사이의 다툼이 일어난다.
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표면상으로는 목자들의 싸움이었지만, 사실상 아브람과 롯의 싸움이었다.
↳목자의 싸움이, 두 사람의 대리전 양상을 띠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직접 두 사람이 싸웠더라면, 문제가 쉬웠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가축의 목자들이 싸운 것이 문제를 확대시킨 면이 있다.

-두 집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이 싸우고 나서, 주인에게 어떻게 보고했겠는가?
↳아브람 집의 목자들은 자기들이 잘못했음에도,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이 잘못한 것처럼 말했을 것이다.
↳롯 집의 목자들도 그렇게 거짓보고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브람과 롯은 서로에 대해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갈등이 커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다툼이 누구 앞에서 벌어진 것인가?
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 앞에서’이다.
↳사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싸워도 불신자들 앞에서 싸우면 안 된다.
↳‘그래도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더 낫겠지’ 하고 지켜보는데, 자기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서로 손해 안 보려고 싸우고 있을 때, 불신자들이 신앙인을 우습게 알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하는 예수님까지 우습게 여길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전도하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니나 잘 믿고 천국 가라”

-직장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신앙에 무관심한 척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을 주시하고 있다.
↳그들 앞에서 돈 때문에 신앙을 팔고, 이익에 눈멀어 양심을 포기하면서, 그들을 전도할 수 없다.
↳어떻게 전도해 온다고 해도, 전도한 사람 이상 되기 어렵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적어도 지탄의 대상은 되지 않아야 한다.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보여주어, 부끄러움과 부러움을 같이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의 다툼은, 교회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같은 교회 다니는 사람끼리 싸우는 것은, 믿음의 한 식구 됨을 파기하는 것이다.
↳물론 교회라고 해서, 왜 갈등이 없겠는가?
↳초대교회도 갈등이 있었고, 바울과 바나바도 다투고 헤어졌지 않는가?
↳그러나 그 갈등이 교회 밖으로 표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교회 문제는 어떻게든 교회 안에서 풀어가도록 해야 한다.
↳불신자들 앞에 가서 재판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교회가 갈등하고 다투면,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는 못해도, 그분의 영광을 가리지는 말아야 한다.
↳교회가 갈등하고 싸우면, 우리 원수 마귀가 박수를 친다.
↳예수 믿는 것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환호하며 쾌재를 부른다.

-우리 교회가 평안하여 말씀과 기도로 든든히 서가기를 소원한다.

-아브람은 더 이상 이렇게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그래서 가능한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브람이 롯과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서로 갈등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아브람의 태도를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라는 말이다.
↳당시 문화권에서는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잘 잘못을 떠나서, 손아래 사람이 손위 사람을 찾아가야 했다.
↳그런데 아브람은 어떻게 하는가?
↳아브람이 롯을 찾아갔다.
↳큰아버지 아브람이 조카 롯을 찾아갔다.
↳손위 사람인 아브람이 손아래 사람인 롯을 찾아간 것이다.
↳믿음이 있는 아브람이 믿음이 별로 없는 롯을 찾아간 것이다.

-불신자 앞에서 다투는 것은, 말씀을 따라가는 아브람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지만, 롯에게는 별 대수롭지 않는 문제였다.
↳직장에서 갈등을 빚고 있을 때, 어떻게 하는가?
↳이웃과 무슨 일로 다투고 난 후, 서로 얼굴 대하기가 서먹서먹할 때 어떻게 하는가?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믿음 있는 사람이 가져야 한다.

-아브람이 롯에게 먼저 찾아갔다는 것을 꼭 기억하라.
↳예수 믿는다는 특징은, 먼저 찾아가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신앙 안에서는 이게 맞다.
↳어른이 먼저 말을 거는 것이 좋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이 좋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먼저 말하는 것이 좋다.
↳이것이 아브람의 행위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영적 원리이다.

-둘째,󰡒우리는 한 친족이라󰡓이다.
↳아브람은 누가 잘 했느냐 잘못 했느냐를 따지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잘 잘못을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잘 잘못은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 누구의 편에 서서 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 보일 수 있다.
↳그러므로 잘 잘못을 따지는 것으로는, 갈등을 풀어낼 수 없다.
↳오히려 감정만 상하고, 관계만 더 악화될 뿐이다.
↳정 따진다면, 롯에게 잘못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롯에게 “우리는 한 친족이라”한다.
↳우리는 남이 아니라 한 식구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는 한층 더 성숙해진 아브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람은 서로 사는 길을 찾았다.
↳공존과 상생의 길이 없을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눈을 들어 멀리 쳐다보았다.
↳그리고 롯에게 말한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땅이 비좁아서 생긴 것이니까, 땅을 넓게 쓸 수 있는 대안을 찾은 것이다.
↳그것이 결코 멀리 있었던 것이 아니다.
↳목자들은 그곳까지를 바라보지 못했다.
↳벧엘과 아이 사이의 골짜기만 바라보니까, 서로 다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좀 더 넓은 시야만 가졌어도, 이렇게 문제가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망은 틀린 말이 아니다.
↳원망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러나 원망이 좋은 말은 아니다.
↳관계를 회복시키고 풍성하게 하는 말이 아니다.
↳원망은 관계를 악화시키고 깨뜨릴 수 있는 말이다.
↳잘 생각해 보면, 원망은 멀리 보지 못하고 크게 보지 못해서 생긴 것이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공존과 상생하는 쪽으로 우리의 시각을 교정해 보는 게 어떨까?

-아브람은 양보심을 발휘한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사실 이게 쉬운 결단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브람은 롯에게 우선 선택권을 주었다.
↳자기의 기득권을 포기했다.
↳아낌없이 양보하는 모습을 조카에게 보여주고 있다.

-얼마 전만 해도, 아내까지 포기하면서 자기만 살려고 했었던 아브람이다.
↳그는 다소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꽤나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남도 아닌 아내도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브람이 이렇게 바뀌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그는 믿음의 시련과 실패를 통해, 자기 인생의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그래서 그는 좋은 땅보다 하나님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가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으면, 땅에서 살지만 하늘나라 시민으로 살 수 있다.

-물질적으로 조금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을 선택하기 바란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면, 망설이지 말고 하나님 편에 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