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헌신예배:선교사로 나가든지 선교사를 보내든지 하라.(마 20:18-20)

작성자
류현철
작성일
2020-12-13 12:30
조회
736
선교헌신예배
선교사로 나가든지 선교사를 보내든지 하라.(마 20:18-20)
2020. 12. 8.
 
 
프롤로그

-오늘 우리는 선교헌신예배를 드리고 있다.
↳2016년까지는 선교헌신예배를 다른 헌신예배처럼 주일오후에 드려왔다.
↳그런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2017년부터 주일예배를 선교헌신예배로 드린 게 시발점이 되어, 올해도 계속 되고 있다.
↳선교헌신예배라고 해도 특별할 거까지는 없다.
↳선교에 대한 말씀을 듣고, 선교헌금 작정하는 것이 전부다.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이 선교사로 나갈 건지, 선교사를 보낼 건지를 정한다.
↳선교사를 보내는 것은, 이미 나가 있는 선교사를 후원하는 것이 포함된다.

-12월에 작정한 선교헌금은, 1월부터 드리면 된다.
↳성질 급한 사람은 일시에 드리면 되고, 느긋한 사람은 매월 정기적으로 드리면 된다.
↳물론 작정하지 않고 드릴 수도 있지만, 작정하면 보다 책임감이 생긴다.
↳그리고 선교관계자들이 재정을 집행하기 수월하다.
↳내년에도 모든 교우들이 참여해 주기 바란다.
↳사정상 지금 가정에서 예배 드리는 분들도, 선교헌금 작정에 동참해 주기 바란다.
↳혹 올해 선교헌금 작정하고 덜 납입한 분들은, 해가 바뀌기 전에 정리해 주기를 바란다.

-오늘 선교 헌신예배는, 오늘날 선교 한국이 있게 한 선교사 몇 분을 소개하려고 한다.
↳한국은 기독교 선교역사에 유래 없을 정도로, 교회 성장이 빨랐다.
↳불교가 1,000년간, 유교가 500년간 토착종교로 자리를 잡고 있는데, 기독교가 전래되어 100년만에 전 국민의 1/4이 믿게 됐다.
↳교회가 2,000년대 들어 쇠퇴 조짐을 보이고 있고, 지금은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이 지도급 인사로서 여전히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다만 걱정은, 교회에 젊은이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저출산 고령화’ 영향이기도 하지만, 직분자의 자녀들 중에도 교회를 멀리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교회를 연령으로 보면, 역 피라미드 구조가 되었다.
↳교회가 역 피라미드 구조이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
↳한국교회가 선교사를 두 번째로 많이 파송했는데, 한국교회가 불안정해지면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도 힘들어지고, 그들을 지원하는 것도 힘들 수 있다.
↳선교사를 파송해놓고 지원이 끊어지면, 그들은 줄 끊어진 연 같은 신세가 되고 만다.

-더군다나 코로나 영향으로, 교회마다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교회의 힘은 모이는데서 나오는데, 정기 집회를 갖기 힘들어지니, 교회들마다 재정도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는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믿는다.
↳우리는 이 시기를 어떻게든 잘 견디고 버텨내야 한다.
↳아무리 지금이 어렵다고 한들, 선교사들이 이 땅에 복음을 들고 들어올 때에 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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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선교사

-당시 흥선대원군이 집정하여 쇄국정책을 펴고 있을 때, 두 차례에 걸쳐 우리나라를 방문한 끝에, 이 땅에서 처형된 영국 선교사가 있다.
↳한국 개신교사에서 ‘첫 순교자’가 된 토마스 선교사이다.
↳토마스 선교사는 영국 하노버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런던선교회 파송으로 중국 상해로 오게 되었다.
↳그의 선교사의 길은, 처음부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그의 아내 캐럴라인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거기다가 런던 선교회의 상해 주재 책임자인 무어헤드와의 불화가 겹치게 되었다.

-토마스는 런던 선교회에 사표를 제출하고, 해관에서 근무하면서 선교사역을 계속하였지만, 선교회의 반응은 경멸과 적의 그리고 불신뿐이었다.
↳그러다 그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윌리엄슨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지푸에서 윌리엄슨 선교사의 일을 도우며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그가 우리나라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조선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지푸에서 만나게 되면서였다.
↳그는 그들에게서 우리나라 말을 배우면서, 바로 조선선교여행을 계획하였다.

-드디어 1865년 9월 13일, 그는 조선에 도착하였다.
↳2개월 반 동안 조선 해안가에 머물면서, 가지고 간 중국 성경을 나누어주고, 복음을 전하는 등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벌였다.
↳그 후 서울을 향해 떠났지만, 태풍으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만주를 거쳐 북경에서 사역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오직 조선에 가 있었다.
↳그의 조선어와 조선에 대한 지식이 알려지면서, 프랑스 함대가 그를 통역관으로 쓰려고 하였다.
↳당시 프랑스 함대는 조선에서 프랑스 신부에 대한 학살을 구실로, 조선에 들어가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함대는 인도차이나 방면의 긴급사태에 투입되면서, 토마스의 조선 행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다, 제너럴셔먼호가 조선을 향해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에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통역관으로 이 배에 편승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토마스 선교사가, 꿈에 그리던 조선 땅에 도착하였다.
↳1866년 8월 16일,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평양에 가까워지면서, 제너럴셔먼호와 조선 측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런 긴장 속에, 제너럴셔먼호의 발포사건과 이현익의 억류사건이 일어나자, 조선군의 반감을 사면서 사태는 어려워지기 시작하였다.
↳긴장의 분위기 속에서 며칠 더 버틴 제너럴셔먼호가, 모래톱에 좌초되면서 조선의 화공이 전개되었고, 배에 머무르고 있던 토마스 일행은 뭍에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성난 군민들에 의해 결박되고 살해되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1866년 9월 2일 토마스 선교사는, 27세의 나이로, 평양의 대동강 가에서 순교의 피를 흘렸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복음의 말씀을 이 땅에 전하였다.
↳이때 토마스에게서 한문 성경을 받았던 한 사람이, 뒷날 선교사 마펫을 찾았고, 후에 전도자가 되었다.

-그의 순교는 헛되지 않았다.
↳제너럴셔먼호가 미국 상선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 배의 행방을 추적하면서 조선을 설득하여, 결국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각 미국 교단의 선교사 파견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 된다.”
↳터툴리안의 이 말대로, 한국을 위해 최초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는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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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선교사

-다음은 언더우드 선교사 이야기다.
↳언더우드가 신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1883년 신학교 연맹 모임에서 조선 민족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지금 1,300만 조선 민족은,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채, 가난과 질병과 학대 속에서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그 나라가 드디어 작년에 문호를 열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 중에 누군가가 조선 민족을 위해 선교사로 갈 것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알버트 목사님의 호소력 있는 메시지는, 많은 신학생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언더우드는 그 당시 인도 선교사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 선교에 대한 강한 도전을 받았으나, 조선으로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인도로 선교사로 가기 위해, 인도 말을 자유롭게 구사할 정도로, 잘 준비하고 있었다.

-알버트 목사님의 조선 선교의 권유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언더우드는 개인적으로 친구들에게도 권유해 보기도 했지만, 그들은 다 국내에서만 사역하기를 원했다.
↳언더우드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왜들 이럴까? 헌신을 맹세한 사람들이, 왜들 다 미온적이고 부정적일까? 복음의 처녀지, 주님이 기다리시는 그 땅으로 갈 선교사가 이렇게도 없다는 말인가?’

-그때 돌연 강력한 반문의 소리가 그의 마음을 두드렸다.
↳“너는 왜 못 가느냐?”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나,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한 주님의 부르심의 메시지였다.
↳‘그렇다. 왜 나는 못 가는가?’
↳그는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미전도 종족인 조선인들에게, 선교의 우선순위가 있다고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또 한 번의 희생을 치르기로 하였다.
↳그 동안 인도 선교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것들을, 조선 선교를 위해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
↳어려운 결단을 하고, 조선을 선교지로 정하고 나서, 교회와 선교부에 조선 선교사로 가기로 요청을 하였는데, 웬걸 두 번씩이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는 조선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고, 꾸준히 기도하면서 기다린 끝에, 장로교 본부회의에서 조선 선교사로 임명을 받게 되었다.

-그는 미전도 종족인 우리 민족을 가슴에 품고, 설레는 마음으로 장도의 길에 올랐다.
↳한 달 여 걸리는 긴 항해 끝에 일본을 거쳐, 1885년 4월 2일 부산 앞 바다에 잠시 정박하여, 조선 땅과 조선 민족을 처음으로 바라보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그 후 부산을 떠나, 3일 후인 4월 5일에,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날을 한국교회는 최초로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날로 정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 기독교사의 멋진 장을 연, 최초의 선교사가 되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그는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시작으로 교회개척 사역을 하였고,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시작으로 하는 교육사업을 통해서, 조선의 젊은이들을 깨워나갔다.
↳그가 우리나라를 위해 이룬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언더우드 같은 귀한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주셨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였고, 그 결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살 수 있는 축복의 삶을 허락해 주신 것이다.

-조선에 도착하여, 언더우드 선교사가 드렸다는 기도문이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이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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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 부부

-다음은 로제타,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 부부 이야기다.
↳로제타 선교사는 조선에 여자 의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정보를 듣고, 조선에 선교사로 가기 위하여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병원실습을 하고 있었다.
↳그 때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고, 홀 선교사는 로제타의 미모와 성품과 성실성에 반해, 한평생 함께 사역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 로제타에게 프로포즈를 하였다.
↳그러나 로제타는 홀 선교사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홀 선교사가 이미 중국 선교사로 가기로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제타도 홀 선교사를 좋아하고 있었지만, 조선에 오기 위하여, 홀 선교사의 프로포즈를 거절하고, 처녀의 몸으로 혼자 조선에 들어왔다.

-홀 선교사는 로제타가 조선으로 떠난 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 선교부에 찾아가 선교지를 바꿔달라고 부탁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홀 선교사는 조선에 파송되어, 1891년 12월 조선에 오게 된다.
↳그들은 벙커 선교사의 주례로, 1892년 6월 21일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 결혼식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이다.

-홀 선교사는 평양선교를 위해 개척 책임자로 임명되어, 평양선교를 시작하게 된다.
↳첫 아들 셔우드 홀이 태어난 그 다음해, 매켄지 목사와 함께 평양으로 들어갔다.
↳현, 서울 광성고등학교의 모교인 광성학당을 시작으로, 교육사역과 병원사역을 하면서, 평양에 있는 조선인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그 해 7월에 일어난 청일전쟁으로, 평양은 전쟁터가 되었고, 홀 선교사는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다가, 자신이 병에 감염되고 말았다.

-일본군 패잔병과 함께 서울에 도착한 홀은, 로제타와 아들 셔우드 홀의 손을 붙잡고, 마지막 기도와 유언을 하고, 끝내 숨을 거두게 된다.
↳우리나라에 온지 2년 만에, 그는 조선 땅에 묻히게 되었다.
↳그는 양화진 존 해론의 묘 옆에 묻혀있다.

-홀 선교사가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로제타 선교사는 수많은 위로의 편지를 받게 된다.
↳그 중 홀의 여동생이 보낸 편지가 있다.
↳“내 사랑하는 오빠가, 발진디푸스의 열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는 믿겨지지가 않았습니다. 아마 어떤 실수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언니의 편지를 받고, 우리의 희망은 사라졌어요. 언니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고, 나는 사랑하는 오빠를 잃었어요. 우리는 모두 어머님을 제외하고 매우 건강하답니다. 어머니는 윌리엄 제임스 오빠의 죽음을 매우 힘들게 받아들이고 계셔요. 언니는 집으로 오려고 생각하고 있는지요? 우리는 사랑하는 어린 셔우드 홀을 보기를 원하고 있답니다.”

-로제타는 어린 아들 셔우드를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녀가 임신 말기에 있었기 때문에 출산을 위해 간 것이다.
↳귀여운 딸 에디스가 태어나게 되었고, 얼마 후 윌리엄 제임스 홀의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제임스 홀의 모습을 닮은 셔우드 홀과 딸 에디스를 본, 모든 교우들은 눈물로 그들을 반겼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로제타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사랑하는 딸아, 네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이 이루지 못한 조선 사랑을 네가 이루어라.”

-로제타는 주의 음성에 순종하여,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선에 오자 얼마 되지 않아, 사랑하는 딸이 풍토병에 걸려 죽게 된다.
↳그녀는 딸을 남편 묘 옆에 묻으면서, 다시 한 번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 사랑하는 내 아들 셔우드 홀과, 이 땅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로제타 선교사는 남편과 딸을 잃었지만, 어린 셔우드를 키우면서, 조선 사랑을 실천해 나갔다.
↳그는 평양에 홀 기념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또한 여자환자를 위한 광혜원을 개원하였다.
↳어린이를 위한 병원을 개원하여, 맹인소녀들에게 점자를 교육하면서,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
↳후에 맹인학교를 확충하여 농아교육도 시작하였다.

-김점동이라는 여자를 유학시켜, 한국 최초의 여의사를 만들기도 했다.
↳지금 서울 동대문에 위치한 이화여대 부속병원이, 로제타가 세운 병원이다.
↳서울에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그 병원이 지금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이 되었다.
↳또한 인천의 간호대학과 인천의 기독병원이, 모두 로제타가 세운 병원이다.

-로제타의 43년간의 조선 선교사역을 통해, 하나님은 큰일을 이루셨다.
↳미국은 그의 사역을 인정하였고, 로제타 선교사는 미국이 뽑은 200대 여인의 한사람이 되었다.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면서, 양화진 땅 남편과 딸이 묻혀있는 곳에 함께 안장되었다.

-아들 셔우드 홀도 부모님의 조선 사랑을 이어갔다.
↳16세가 되면서는, 선교사들의 연립주택을 지어주면서 아르바이트를 하였고,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내면서 누구보다도 정들었던 훗날 박에스더로 불린다. 그건 남편 박유산의 성과 세례명 에스더를 따랐기 때문이다.
김점동이라는 최초의 한국 여의사가 결핵으로 숨지게 되자, 큰 쇼크를 받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가 된 셔우드 홀은 결혼하여, 부인 메리안과 다시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결핵협회를 창설하였고, 최초의 크리스마스실을 만들어 판매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선 사랑을 이어가던 셔우드 홀에게, 어려움이 닥쳤다.
↳일본과 미국의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일제는 셔우드 홀을 헌병대에 연행하고, 재판에서 징역 3년과 5000엔 벌금형을 내렸다.
↳셔우드 홀은 가재도구와 집을 팔아서라도, 끝까지 한국에 남아있기를 원했으나, 결국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셔우드 홀 부부는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쫓겨난 셔우드 홀 부부는, 인도로 건너가, 선교에 마지막 힘을 다했다.

-은퇴하여 캐나다에서 쉬고 있던 어느 날, 그는 우리나라에서 온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결핵협회와 아버지가 세운 광성고등학교에서 보내 온 초청장이었다.
↳91세의 나이로, 사랑하는 한국 땅을 밟은 셔우드 홀 부부의 감회는 남달랐다.

-그는 양화진에 묻혀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의 묘를 방문하고, 광성고등학교 예배시간에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유언을 남긴다.
↳“저는 여전히 한국을 사랑합니다. 제가 죽거든 저를 절대로 미국이나 캐나다 땅에 묻지 마시고, 제가 태어나서 자랐던 사랑하는 이 나라, 또한 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누이동생이 잠들어 있는, 이 한국 땅에 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9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그의 부인과 함께 아버지인 윌리엄 제임스 홀과 어머니인 로제타, 동생 에디스와 함께 양화진 땅에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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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토마스 선교사, 언더우드 선교사, 로제타,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 부부 뿐이겠는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묻혀 있는가?
↳그곳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 있을 때, 꼭 한 번은 가봐야 할 곳이다.
↳선교사 묘원은 그곳에만 있는 게 아니다.
↳호남지역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들의 묘원은, 광주 호남신학대학교 캠퍼스 내에 있다.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이다.
↳선교사들에게 복음의 빚을 진 자들이다.
↳그 빚을 갚는 방법은,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다.

-선교에 동참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선교사로 나가든지, 선교사를 보내든지’이다.
↳‘몸으로 선교사로 나가든지, 기도와 선교비를 보내든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내가 맡긴 재물을 너는 어디에 어떻게 썼느냐?”라고 물으실 것이다.
↳그 때 대답할 말이 있어야 한다.
↳“주님이 제게 맡기신 재물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교를 위해 이만큼 사용했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오늘도 선교하는 교회, 선교하는 개인을 축복하신다.
↳선교헌금 드리는데 인색하게 굴면서, 하나님 앞에 풍성한 복 받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
↳혹시 우리 주위에 헌금드릴 돈 아껴서, 살림 나아지고 부자 된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우리 뼈에 사무쳐 있어야 할 주님의 말씀이 있다.
마 28: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